관련글 링크 - 과거 일본 폭주족의 잔혹행위
그 글에 폭주족 '블랙엠퍼러'의 70년대 역대 총장이 나오는 영상을 올리고 '지금쯤 이 사람들은 할배가 되어있을 텐데 뭐하고 살려나?' 라고 작성했었는데, 댓글 중에 '폐지나 줍고 있겠지 뭐...' 라는 내용이 있더군요.
그래서 궁금해서 그들의 근황을 검색해 봤습니다. 참고로 이 세대는 전에 제가 올렸던 폭주족들의 비열한 잔혹행위와는 상관없는 세대입니다. 70년대~80년대 초반의 총장들 인데 이 시대는 물론 싸움은 잦았지만 패싸움이나 일대일 싸움이 주였고 납치에 의한 잔혹행위가 성행하기 전입니다.
블랙엠퍼러 초대 총장
이즈미 데루오
블랙엠퍼러의 설립자. 폭주족 은퇴 후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익단체 활동을 했던것 같군요. 우익활동이 직업은 아니었을테고 무슨일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성공한 인생은 아닌듯.
고인이 되었다네요. 비교적 이른나이에 인생을 마감한듯합니다.
블랙엠퍼러 2대 총장
우리타 요시하루
자신의 폭주족 시절의 경험을 쓴 책을 출간했다는 것 외에 근황에대해선 찾을 수 없음
일본어 잘하시는
분은 확대해서 해석 좀 부탁...
그의 근황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아들은 폭력단 및 지하격투기 선수로 꽤나 유명하네요. 저 사람 이름으로 검색하면 죄다 그의 아들 관련 자료만 수두룩....
2ch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
<그의 아들 우리타 준지>
확실히 그의 아버지와 이목구비가 닮아있다.
<최근 사진엔 안면에 까지 문신을 하고 있다.>
블랙엠퍼러 3대 총장
유지 혼마
블랙 엠퍼러를 동행 취재한 다큐멘터리 영화 '갓 스피드 유 BLACK EMPERROR'에 현역 폭주족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그 영화의 감독 야나기 마치 미츠오와 알게되어, 1979년 영화 '열 아홉살의 지도'의 주연에 발탁, 이듬해 제1회 요코하마 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다.
<블랙엠퍼러를
동행 취재한 다큐멘터리 영화 'ゴッド?スピ?ド?ユ?!
BLACK EMPEROR' (1976년 作)>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초대 부터 3대 총장까지 볼 수 있다.
<연기자로 활동할 당시 모습>
이후 주로 조연이나 단역으로 여러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고 1989년도에 은퇴, 그 뒤의 근황은 알 수 없다.
블랙엠퍼러 4대 총장
아베
이름만 남아있을 뿐 사진이나 근황에 대한 자료가 전무.
블랙엠퍼러 5대 총장
이와사키 타카시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을 거점으로 로스 앤젤레스, 하와이, 괌, 인도네시아를 섭렵하여 자신의 국제적인 인맥을 만들고 22세부터 일본의 잡지사에서 취재, 촬영 코디 업무를 시작한다.
86년에는 미국 유명 라디오 방송국에서 새로운 방식인 MASTER MIX에 감명 받아 귀국 후 그 아이디어를 살려 일본에서 최초로 MASTER MIX를 도입한 프로그램 'MARUI 24 CLUB (FM 요코하마)'의 제작도 맡았다. 그 프로그램은 FM 요코하마의 간판 프로그램이 되어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 후'이칸가 이와사키'라는 필명으로 1988년 '담 안의 질리지 않는 소년들', '크레이지 보이스' 등의 소설을 내고 호평을 받아 영화화 되었다.
또한 주간 플레이보이, 스콜라, 핫도그 등 잡지의 작가로도 활약했다.
과거 폭 넓어던 인맥을 살려 시부야 등지의 클럽 'SIJOE', 'ING', 'SOUL TO SOUL', 'FAKE' 와 한국의 대형 디스코텍 등을 기획, 프로듀스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엔 경험을 최대한 살려 작가를 비롯해 점포 기획, 이벤트 기획 등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폭주족 은퇴 후 젊은 시절>
여친 예쁘네~
<나이가 좀 든 후 방송출연 모습>
<그가 쓴 책>
매우 성공한 인생....
블랙엠퍼러 6대 총장
에비사와 켄지
예능 프로듀서, 우익 운동가, 극진 가라데 사범 등의 경력이 있다. 현재는 예능 프로듀서로 재직하면서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경호를 맡고 있다.
<극진 가라데 사범 시절>
<최근>
프로듀서로서 제작 작품
<조어도(일본명 센카쿠, 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방문해 찍은 사진>
그가 우익으로서 쓴 글
004/7 메시지
계속 우리나라 영해에 대한 중국의
침범!
센카쿠
주변에서 중국의 거듭된 일본에 대한 영토 침범과 도발 행위를 이대로 내버려 두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생각해 주었으면한다.
저자세
너무 정부의 대응에 어떻게 든 해 주었으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있을 것입니다. 동중국
해의 EEZ (배타적 경제 수역)과 일본의 영해에 놈들이 가고있는 행위, 영토를 침범 해저 자원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곳마다 일본의 영토를
손에 넣으려고하는 생각은 뻔 입니다. 센카쿠
열도가 일본 영토임을 역사적으로 분명하다, 그리고 조도에 관해서는 "바위"이다. 등과たわけ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국제 무대에서 발언하는 나라, 그것은 중국이다. 놈들의
"천연 가스 개발"라고 칭하는 행위는 국제 합의에 완전히 위배됩니다. 한시라도
빨리, 당연히 형태로 (세계는 당연한 조치를 취할 나라에 불평은 말하지 않는다) 침략 행위에 대한 한 한인 대응을 받고 싶다.
내버려
놓으면 일본뿐만 아니라 남중국해 방면과 대만 (스프 래 틀리 제도 등)도 놈들의 마음대로되어 버린다. 여러분도
잘 생각 괄호가 할 수있는 일을! 너무
늦기 전에 ,
올해는
러일 전쟁 백주년.
무려 기념 할만한 해 일까.
또 이라크에 파병 기타 etc ,,,
왠지 겨우 독립국으로
일반 첫발을 내딛은 느낌이하겠습니다.
임무를 배정하는 분들이 관계자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함께 대원 여러분의 활약과 무사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나는 부족의 지도자로를 보내어 관警各정도 손을 괴롭 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작은 지역에서는 있지만
인근 시회 수준에서 쓸만한 있도록 나름대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TBS에서 다년간 일을하고있는 동안에도 진보적 문화인의 오도 의견,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고 지금의 사회의 흐름은 겨우 조금씩 제대로되어 왔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담배는 던지는구나. 쓰레기는 제대로 낸다. 자전거는
야간 조명을 켜라. 스프레이로 낙서하지 마라.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 차내에서 전화하지 마라. 약은하지 말아라. 부모는 소중히하라. 제대로 된
교사의 말을 들어라. 도쿄 재판 사관에 침범 된 역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라. 국가, 국가를 소중히하라.
신불을尊べ. 영토 문제를 더 생각해라. 끝이 없어 지므로이 정도로 해 둡니다 만, 족 상승이 민족 국가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되도록 앞으로
수있는 곳에서 해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좋은 때 좋은 나날을!
ㅇ
블랙엠퍼러 7대 총장
우카지 타카시
폭주족 은퇴후 연기자로 데뷔... 현재 인지도 높은 배우
<현재 모습>
<데뷔 초기 젊었을 시절>
히야~ 배우 할만했네
출현작품 (엄청 많지만 최근 것만)
카나사키 히로유키
<현재>
변호사...ㅎㄷㄷ
어린시절 부터 행실이 좋지 못했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내내 싸움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으로 부터 니 성적으로는 일반 고등학교 어디에도 받아 줄곳이 없다 라는 말을 듣고서 여름방학 부터 공부를 시작해 도립학교와 사립학교 2곳에 합격한다.
고등학교 입학 후 다시 불량생활로 돌아가 블랙 엠퍼러에 가입, 도쿄도 코다이라 지구 임원이 된다. 우카지 타카시에게는 1년 선배. 그 후 싸움과 신나 흡입 등으로 수차례 경찰에 체포되고 급기야 고등학교에서 퇴학 당한다.
퇴학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력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가 수험공부를 시작, 교토외국어대학에 합격한다. 대학 입학후 다양한 분야의 책을 독파하는 동시에 영어 공부에 매진, 교내 영어웅변대회에서 우승한다.
대학 졸업 후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 학원에 다니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학해 6번의 도전만에 29세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합격 후 2년간의 사법 수습을 거쳐 도쿄의 법률 사무소에 들어가 기업 법무를 다루는 한편, 도쿄 변호사회 소속으로 소년 사건이나 소비자 문제 등 특별위원회 등에서도 활동 했다. 이후 견문을 넓히기위해 변호사 활동을 중단하고 1999 년 8 월부터 2002 년 5 월까지 북미 , 중남미 국가, 동남아 , 중국 을 섭렵 방랑 여행을한다. 귀국 후 약자 구제를 슬로건으로 "법률 사무소 북두 '를 개설. 사회적, 경제적 약자 인 시민 및 중소기업 법률 지원 (구제)을 중심으로, 개인 파산 등 채무 통합에서 이혼, 의료 과실 소년 사건까지 폭넓게 활동하고있다. 그 후, 사무소를 법인화하고 명칭도 「변호사 법인 아방 "고 고쳐 동 변호사 법인 대표 변호사 활동, 강연 활동, 언론 취재 협력 등을 실시하고있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집회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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