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뉴기니 웨아크에서 카비엥을 거쳐 라바울로 향하던 구축함 아키카제에서
일본 해군이 민간인 60여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대부분은 백인, 중국인이었죠.
여기까지만 보면 2차대전 당시 흔한 일본군의 학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이 민간인들의 구성이었죠.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대부분 미처 탈출하지 못한 호주 민간인들과 중국인들이었고,
일본의 '우방국'이었던 독일 국적의 목사들과 그들의 부인들, 독일 국적 수녀들,
또 일본의 우방국이었던 헝가리인 선교사, 그리고 그 휘하 말레이인 인부들이었습니다.
목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일본의 우방국민들이 많이 껴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일본님하가 이들을 살려 보냈을까요?
아니요
다 죽였습니다
한명도 안남기고당시 일본 상층부는
'이 백인 새끼들! 모두가 연합군이랑 한빼들이야!'라는
참으로 기상천외한 생각을 머리에 박고 다녔습니다.
카비앵 지역 사령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민간인들을, 자기네 우방이었던 독일인과 헝가리인까지,
모조리 선상에서 학살한 것이었습니다.
수단이 부족했었나?
절대 아니었습니다.
학살이 저질러진 1943년 봄은 아직 일본 본토와 점령지 사이의
교통 상태에 심각한 지장이 초래되기 한참 전입니다.
당시 점령지의 역량으론 모자랄지 몰라도, 본국에 요청하면 독일인과 헝가리인들은
충분히 전선 뒤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일본은 개전 초반에 미국과 민간인들을 교차 송환한 전례가 있습니다.
방금 전쟁선포한 적국한테도 이러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자기네 우방국 국민들인데!
근데 이 멍청한 놈들은 '아 얘네도 백인들인데 연합군에 동조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
다 죽이죠'하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휘하 군인들 중, 아무도 이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처형 방법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위 사진과 같았습니다.
당시 독일인 목사가 데리고 있던 두 중국인 아이들은 총으로 쏘기 귀찮다고 그냥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렇게 민간인 60명은 전원 아키카제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거 하나뿐이냐고요? 아니요
이들은 1944년 3월 17일, 위의 학살이 있었던 지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시기에
카비엥 항구에서 또 독일인 목사 9명을 호주인 23명과 함께 학살합니다.
소리 크게 나면 안된다면서 일부러 와이어로 목을 졸라 죽였죠.
이번 이유도 '연합군 귀축영미가 상륙하면 호주놈이든 독일인이든
협조할 가능성이 있어서'였습니다.
이쯤 되면 그냥 생각하는 걸 포기한 겁니다.안 그래도 자기 계획과 달리 일본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도 있어서
일본과 관계를 끊고 전쟁을 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습니다.당시 태평양에는 독일 U보트와 위장상선(상선으로 위장한 무장선박)들이 꽤 전개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은 U보트와 타 국적 선박으로 위장한 위장 상선들을 세계 각지에 배치해서
여기 저기서 갑툭튀하여 공격할수 있게 해놨습니다.
1940년에는 독일 무장선박과 유보트가 갑자기 나우루 근처에 나타나
호주, 미국, 영국 상선들을 죄다 파괴하고 홀연히 사라진 사례도 있었죠.
이런 상태에서 독일 민간인들을 살해하는건, 적국을 하나 더 생기게 할수도 있는
그야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행동이었습니다.
겁먹은 일본군은 바로 부랴부랴 독일과 헝가리에 사과를 하고
담당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진상 조사 했냐고요?
아니요
당시 독일도 소련떄문에 여러모로 많이 바쁜 상태라 이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기에
사과만 대충 받고 소련과의 전쟁에 집중했습니다.
진상 조사는 훗날 호주군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호주군은 자료고 뭐고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근성을 발휘하여
2년 만에 민간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다 밝혀냅니다.
근데 60명 학살 건은 일단 학살을 직접 자행한 측은
아키카제 자체가 1944년 침몰했기 때문에 대부분 전사했고
나머지 책임자들은 서로 떠넘기거나 부인하기에만 급급했기 떄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피해자 확인도 어렵고 사건 조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이유로
호주군이 기소를 포기해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통역으로 참여한 한 호주군 장교는
상급자로써 부하의 책임을 지지 않는 소인배라고 이들 책임자들을 디스했습니다.
32명 학살건은 학살명령을 내린 다무라 소장이
42년부터 자신들의 책임하에 있는 민간인억류자들을
라바울이나 일본으로 옮겨야 한다고 상부에 계속 요청하였으나
상부에서 무응답으로 일관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했다고 여겨지자
더 이상 시간여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학살을 명령하였다고 자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진짜로 닷시는 동맹국 국민을 안 죽였냐고요?
아니요
이게 끝이 아니였습니다.
마닐라는 방금 전투가 끝난, 그야말로 잿더미 상태였습니다.
근데 이 마닐라에서, 대검에 찔리고 불에 탄 채 발견된 50여구의 시체가
집단으로 한 곳에서 발견됩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무차별 폭격때문에 그렇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대검에 찔린 채'라는 부분부터 미국의 폭격 때문은 아닌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체들이 발견된 곳은?
일본의 동맹국 스페인 대사관 터였습니다.
1945년 마닐라 공방전,
당시 일본군은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에 눈이 벌게져서 뵈는게 없던 상태였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마닐라에서 필리핀인과 미국인들을 상대로 자행한 범죄는
그야말로 전쟁범죄 종합선물세트라고 불릴만큼 막장과 비인간성의 향연이였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본군은 또다른 막장전설을 하나 만들어냅니다.
바로 추축국에 우호적인 국가이자 중립국, 그리고 일본과는 동맹국 관계였던
스페인 대사관을 공격한 것이었죠.
그것도 국기까지 당당히 게양한.사실상 추축국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추축국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일본과도 정말 친해서 일본의 몇 안되는 대외 창구이기도 했죠.
이렇게 외교적으로 중요한 스페인인데,
일본군은 그런 스페인 대사관을 공격한 겁니다.
그것도 실수가 아닌, 매우 고의적으로.
그냥 총으로 죽인것도 아니고 남녀 50명 전원 총검으로 찔러서 죽여놓고
시체는 대충 그 근처에 팽개쳐서 대충 태우고 도망갔습니다.
당연히 스페인은 노발대발하여
4월 11일을 기하여 일본과의 모든 외교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우호적인 외교 채널이 끊어져서
한동안 독일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의 주동자들은 마닐라 학살의 핵심 세력으로 판단되어
훗날 수용소로 끌려가 미군, 필리핀군 헌병들에게 그야말로 죽을때까지 후드려맞고 죽었습니다.
이처럼 일본군은 자기 동맹국 국민들까지 마구 죽일 만큼 생각없고 잔악한 군대였습니다.
그야말로 또 다른 적국을 생성할 뻔했던 문제덩어리들이었죠.
하긴 자국민들한테도 자살을 강요했던 양반들이니.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자료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아텐보로의 블로그 http://yangsp3.egloos.com/5804348
CAL50의 떄늦은 일기장 http://egloos.zum.com/CAL50/v/3079342루리웹 - Vrick님의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