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시행착오
일본만화 원작실사영화!! 그 험난한 도전기
2015년 3월 중순 현재, 극장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요, 가장 기대를 모으는 영화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다. 둘의 공통점은 만화 원작 실사영화라는 것. 이처럼 서양에서 만화 원작 영화들이 황금시대를 누리는 광경에 복통 증상을 호소할 법한 곳이 있으니, 만화와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웃나라 일본 영화계다. 이유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원작에 대한 오랜 애정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극장을 찾았다가 피눈물을 흘리며 상영관을 나선 기억,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테니까. 원작에 버금가는 일본 만화 원작 영화라는 것은 불 뿜는 용이나 여자 친구와 같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존재였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나마 최근 [바람의 검심]이라든가 현재 상영 중인 [기생수 파트1] 등이 기술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황금시대까지는 물론 아니어도 청동기시대쯤으로는 진입한 듯한 지금, 21세기 일본 만화 원작 실사영화들의 험난한 도전사를 정리해 보았다. 다시 말해 이것은 지난 10년간 시행착오의 연대기다.
※ 경고 : 본 매거진에는 각 영화에 대한 직·간접적인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영화 시청 후 읽어주세요.
√ 원작을 지나치게 무시해서 문제 : [캐산](2004)
"두 시간짜리 우타다 히카루 신곡 프로모션 비디오 같다." '신조인간 캐산'을 원작으로 한 실사영화 [캐산]이 개봉된 2004년, 이 영화를 워스트 2위에 선정한 일본판 라즈베리 어워드 '문춘 나무딸기상'의 코멘트다. 사진작가이자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으로 [캐산]의 연출을 맡았던 키리야 카즈아키는 알다시피 가수 우타다 히카루의 전 남편인 바, 주제곡으로 아내의 새 싱글 '누군가의 소원이 이루어질 때'를 쓴 것을 비꼰 것이다.
일단 팬들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원작의 흔적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는 데 경악했다. 물론 각색으로 새롭게 탄생한 영화는 별개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적어도 원작의 세계관이라든가 캐릭터라든가 설정에서 영감을 받은 부분이 있을 텐데,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뼈와 살을 분리해버린 본 작에서는 그 단서를 찾기 쉽지 않았다는 것. 캐산의 아이콘인 헬멧은 미완성의 형태로만 한 컷 반짝 등장, 로봇견인 '프렌다'는 캐산과 별 상관없는 동네 멍멍이의 이름으로 붙여졌다. 주적인 로봇 군단 브라이킹 보스는 주인공과 마찬가지인 신조인간으로 설정된 데다, 무엇보다 내내 음울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호의적이지 못한 평가에 쐐기를 박았다.
한 마디로 안드로(이드) 군단과 싸우는 정의의 사도 캐산을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린 이 작품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평가가 높아지는 기현상을 낳았다. 여기에는 이후에 등장한 만화/애니메이션 원작 실사영화들이 줄줄이 삽을 푼 데 따른 반사이익의 효과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캐산]은 원작을 무시하고 막 나갔을지언정 나름 막 나감의 미학은 존재했다는 얘기다. 소련 구성주의 양식의 미술과 세트, 그리고 스팀펑크 풍의 메카닉 디자인을 마치 애니메이션 마냥 2차원의 레이어로 배치한 전략은 빈약한 CG를 가리는 기능적인 효과를 넘어 [캐산]만의 독창성이 되었고, 과장되고 과격한 액션 연출은 [철남]의 츠카모토 신야라든가 [일렉트릭 드라곤 80000 V]의 이시이 가쿠류 감독 등 슈퍼 8mm 세대 선배들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에너지는 이후의 일본 영화들이 좀처럼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원작을 지나치게 존중해서 문제 : [크로마티 고교](2005)
만약에 에이지 노나카의 원작 만화 '돌격! 크로마티 고교'에서 모든 대사를 지우고 그림만 본다면 개그 만화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과격파 불량 청소년들이 모여 있는 문제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경파물, 즉 '캠퍼스 블루스' 류의 전형적인 학원 폭력물 풍의 극화체로 이루어져 있다. 선 굵은 그림체의 인물들이 콘트라스트가 두드러지는 비장한 표정으로 모여앉아 기껏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논쟁한다든가 하는 식의 괴리, 바로 그 괴리가 원작 유머 코드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실사판 [크로마티 고교]는 에피소드 중심의 원작을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까지 충실히 재현했다. 특히 록 밴드 퀸의 프레디 머큐리에서 따온 캐릭터 '프레디'라든가 로봇 급우 '메카자와'의 실사버전은 놀라운 수준. 그 외 인물들도 험악한 인상의 배우들을 총동원하여 싱크로율을 극대화했다. 문제는, 그런 캐릭터들을 데려다 놓고 원작의 에피소드를 고스란히 재현했다고 해서 만화의 재미까지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았다는 데 있다. 원작만이 가지고 있는 그 괴리를 영화적으로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의미다.
만약 영화 전체의 화면을 철저히 비장한 느와르 톤으로 갔다면 그 괴리가 살아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마치 1970년대 야쿠자 실록 시리즈처럼 다큐멘터리 느낌의 화면과 내레이션으로 크로마티 고교의 연혁을 소개하는 도입부까지는 그런 야심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면 어째선지 화면은 '뽀사시'한 세피아톤으로 바뀌고 무게를 잡아야 할 인물들은 늘 봐왔던 '험악한 인상의 개그 캐릭터'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연기를 보여준다. 재미있었던 만화 스토리를 화면에 그대로 옮기기만 해도 재미있을 거라는 안이한 발상으로 실패한 이 작품은, 반대의 관점에서 원작의 재미를 완전히 잘못 이해해서 실패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 안습의 CG가 문제 : [철인 28호 실사판](2005)
현재 상영 중인 [기생수 파트1]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들을 얻었던 가장 큰 이유가 어색하지 않은 컴퓨터 그래픽이었다. 그만큼 SF나 판타지 계열의 일본 만화 원작 실사영화에서 특수효과는 오래도록 계륵이자 뜨거운 감자이자 안습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잘못된 첫 단추를 꿴 영화가 21세기 첫 거대 로봇물 [철인 28호 실사판]이었다.
[철인 28호 실사판]의 설정도 원작과는 딴판이다. 원래 주인공 쇼타로는 과학자 아버지를 둔 소년탐정이며 초등학생 주제에 거대한 저택에 홀로 산다는 설정으로, 과거 주 시청 층인 어린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쇼타로는 아버지도 없고, 생계를 위해 일하느라 아이에게도 포장음식만 사다 먹여야 하는 엄마와 좁은 집에서 살고 있으며, 심지어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받는다. 그럼에도 늘 밝고 쾌활한 쇼타로... 이면 좋겠으나 성격도 그리 좋지 않아 늘 투정만 부린다. 요컨대 선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공감의 대상으로 주인공의 설정을 바꾸고, 좀 더 현실적인 드라마에 치중한 것이 [철인 28호 실사판]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드라마가 현실적인 만큼 CG, 그러니까 로봇도 충분히 현실적으로 보여야 마땅했다는 점이다. 하나 사전 시각화 수준 컴퓨터 그래픽 내지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합성으로 보이는 로봇이 등장하는 순간, 모두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로봇이라고는 하는데 뭔가 육중한 감각은 전무, 그냥 속이 텅 빈 거대한 드럼통이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이런 컴퓨터 그래픽이었으니 액션 장면에서 위압감이나 박진감 또한 제로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 미스 캐스팅이 문제 : [최종병기 그녀 - 실사 극장판](2006)
일단 고교생들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아무리 봐도 대리급 회사원은 돼 보이는 아저씨다. 촬영 당시 주인공 슈지 역의 쿠보즈카 슌스케는 25세였는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25세로도 보이지 않는 연식의 얼굴이다(하필이면 더 나이 들어 보이게 올백 머리를 하고 나온다). 여주인공인 치세, 그러니까 최종병기 그녀는 원작에서 참으로 '모에'한 캐릭터였다. 다시 괴리 이야기를 좀 하자면, 또래보다 발육도 늦은 귀염상인 데다 부끄럼도 많이 타는 여자애가 알고 보니 군의 마지막 결전 병기였다는 괴리가 원작이 가진 매력의 핵심이었다. 그 괴리로 인해 역으로 '모에'함은 더욱 증폭되고 드라마의 비극성은 극대화된다. 그런데 보호본능을 자극해야 할 그 치세가 영화에서는 대단히 강렬한 눈빛으로 일단 먹고 들어간다. 어쩐지 전투력이 높아 보인다고 느꼈다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치세 역의 마에다 아키는 일찍이 [배틀로얄]에서 지옥 같은 서바이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두 학생 중 하나인 나카가와 노리코를 연기했었기 때문이다.
일본 만화는 어떤 장르건 대개 평균적인 일본인의 외모를 반영해 그림을 그리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실사영화가 나올 때마다 싱크로율은 늘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종병기 그녀 - 실사 극장판]의 문제는 전혀 풋풋하고 모에하지 않은 미스 캐스팅에만 있지 않다. 명색이 사랑 이야기인데 두 남녀 주인공이 함께 있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 데이트 좀 하려면 늘 사건이 발발하고 치세는 자대 복귀. 의외로 만화에는 야한 묘사가 꽤 많았는데 어째서인지 영화는 그런 장면들을 몽땅 무시하고 순화해버렸다는 아쉬움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초반부에 정통 학원 연애물로서 서로의 설렘을 착실히 키운 까닭에 후반부에선 마침내 감정의 폭발을 낳았던 원작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것. 이처럼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공감이 되지 않는 드라마에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은 것은 역시나 안습이라는 표현 외에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 CG의 조악함이었다.
√ 총체적 난국, 모든 게 문제 : [독수리 오형제](2013)
2013년 여름, 일본 영화계는 뜻밖에 맞닥뜨린 두 개의 거대한 사건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첫 번째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요, 두 번째는 [과학닌자대 갓챠맨] 즉 [독수리 오형제] 실사판의 개봉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공개된 [독수리 오형제]의 실체는 '일본 영화계의 종언'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현지의 이러한 반응이 그저 호들갑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독수리 오형제]에는 지금까지 언급한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원작 실사영화들의 문제점들이 모두 농축되어 있다. 먼저 각색의 문제. 오형제(?) 중 홍일점인 '백조' 준의 미니스커트 슈트를 전신 타이즈 슈트로 바꿔버렸다는 아쉬움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원작의 화려한 변신 과정을 없앤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목덜미에 감자탕 뼈다귀 같은 것이 붙어 있는 새 G 슈트 디자인도 물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준이 부업으로 재즈 바를 운영하는 여사장님이었던 원작과 달리, 쇼핑중독 처자인 데다 오형제 중 맏이인 '독수리' 켄을 열렬히 짝사랑한다는 새 설정과 함께 감초 캐릭터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 이런 준과 '제비' 준페이의 감초 행각은 다른 형제들의 궁상 행각과 함께 장르의 발목을 잡으며 몰입을 방해한다.
이에 반해 불필요한 부분에서는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이 두 번째 문제. 원작에서 켄은 늘 전투에 앞서 "내가 보이느냐 악당들아."로 시작하는 독백 레퍼토리를 주절주절 읊는 습성이 있었다. 헌데 배우 본인도 대사를 하며 어색해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이 멘트를 고스란히 영화에 가져온 것이 과연 적절한 판단이었을까? 그리고 세 번째는 또 CG 문제다. [철인 28호 실사판]으로부터 거의 1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독수리 오형제]에서의 컴퓨터 그래픽은 화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보다는 가짜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오류들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독수리 오형제]의 진정한 패착은 장르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뭐, 고뇌하는 슈퍼히어로라고 하면 이미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볼 만큼 봤고 그 자체로 흠집이 될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고뇌하니 문제다. 고뇌할 때는 고뇌하고, 일할 때는 일해야 올바른 히어로들이라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고뇌와 트라우마와 삼각관계의 치정은 마지막까지 지지부진한 독백, 회상 신 등의 형태로 액션과 사건의 발목을 잡는다. 그다지 심도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고뇌와 상처의 드라마가 장르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내러티브에서 원작 팬들은 최소한의 로망도 기대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지구의 절반이 악의 무리 갤렉터에 정복되었다는데 지금까지의 일상과 다름없이 전혀 긴박감 없는 도쿄의 광경을 보자면, 지난 17년 동안 갤렉터는 대체 뭘 했단 얘긴가?"라는 일본 영화평론가 야나시타 키이치로의 지적은 그리 큰 결점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
√ 그럼에도 성취는 있었다.
이상의 오류들만 피해 가도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영화들이다. 먼저 CG가 만화 원작 일본 영화의 아킬레스건이었던 만큼, 그간의 장르 영화 중에는 [내일의 죠]라든가 [바람의 검심]과 같이 특수효과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작품들이 일단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원작의 강점을 적극 수용하되 영화적으로 어색할 수 있는 부분들은 과감히 버렸다는 것. 디테일한 예로, [바람의 검심] 원작에서 거대한 참마도를 휘두르는 주인공의 조력자 사가라 사노스케(아오키 무네타카)는 늘 생선뼈를 입에 물고 다닌다. 영화에서는 그럴 수도 없고(대사를 해야 하니) 차마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걸 제작진들은 알고 있었던 듯. 또한 지나친 고민이나, 사연, 상처, 독백, 회상 등등에 허우적대지 않고 장르에 충실하다는 점 또한 두 영화의 장점이다. 감정은 장르의 기폭제 역할에만 머무를 뿐이다. 조금은 어색한 CG의 '사신'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스릴러 본연의 긴장감에 성실히 집중한 [데스 노트]도 비교적 호평을 받은 영화 중 하나다.
어떤 면에서는 원작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은 의외의 수작도 있었다. 슈퍼히어로물이자 섹시 코미디인 [변태 가면]이 그것. 앞서 언급한 [크로마티 고교]의 오류와 달리 이 작품은 원작의 개그코드를 안이하게 가져오기보다 코미디 영화의 문법으로 원작을 수용하는데 성공했다. 만화책 페이지가 차르르 넘어가는 마블 스튜디오 특유의 로고를 '변태 가면' 만화책으로 바꿔서 패러디한 로고와 스파이더맨의 거미줄 대신 팬티의 레이스가 펼쳐지는 오프닝 크레디트은 단적인 예. 감독인 후쿠다 유이치는 과거 [우리들과 경찰아저씨의 700일 전쟁]의 각본을 통해 이미 만만찮은 코미디 감각을 선보인 바 있다.
[네이버 펌]
이번엔
진격의 거인 실사영화,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