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비겁한 자의 416 기록
2015년 4월 16일 목요일 밤 9시경, 서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희생자 1주기 추모제가 끝나고 광화문까지 유가족을 선두로 한 헌화행진이 시작되었다. 나는 하얀 국화꽃 한 송이 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전에 비가 내려서 바닥이 축축하고, 공기도 4월치곤 차가운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2시간가량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많이 지쳐있었다.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얼른 분향소에 가서 헌화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따듯한 물로 몸을 씻고 싶었고, 따끈한 국물로 속을 달래고 싶었다.
그런데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건 분향소가 아니라 폴리스 라인이라는 이름으로 서 있는 거대한 벽이었다. 아예 청계천부터 가로막고 있었다. 머릿속에 처음으로 물음표가 그려졌다. 도대체 왜? 청와대로 향할 시위대가 무서웠다면 청와대 앞쪽에서 지키면 될 일이다. 왜 분향소를 가지 못하게 하는 걸까?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시민들이 소리쳤다. ‘비켜라!’, ‘평화시위 보장하라!’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시위를 방해하는 경찰의 차벽설치는 11년에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왔단다. 경찰은, 아니 경찰 뒤에 숨은 누군가는 헌법 위에 있었다. 한 시민이 이 점을 지적하면서 왜 경찰이 법을 안 지키느냐고 따졌다. 경찰들은 차벽 위에서, 또 경찰 병력으로 만든 ‘인의 장벽’ 뒤에서 시민들의 얼굴을 카메라로 촬영할 뿐이었다. 침묵의 협박이었다.
시위대는 결국 선두를 돌려 청계천을 따라 움직였다. 청계천 곳곳에도 여전히 차벽과 경찰이 길을 막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서 돌아 가야했다. 그렇게 다시 간신히 종각에 다다랐을 때 경찰 버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는 또 다시 멈춰 섰다.
유가족이 버스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위에서 시민을 향해 발언했다. 그때마다 경찰은 더 큰소리로 방송하며 유가족의 발언을 방해했다. 그 방송을 기억나는 대로 적자면 이렇다.
“세월호 국민 대책 위원회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불법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6조 1항에 의거하여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도로를 불법 점거하여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즉각 해산하십시오.”
그 자리에 유가족이 있었음에도 경찰은 유가족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경찰의 방송이 나올 때마다 소리 지르며 야유를 보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경찰의 방송 소리를 모두 묻어버릴 정도였다.
버스에 올라선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멀리서 봐서 그게 유가족인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다만 사고가 날 뻔한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 이후로 경찰이 올라오려고 하면 제지를 했다. 다음 날 확인한 어느 뉴스는 유가족이 경찰을 밀었다고 보도했다.
경찰 측의 해산명령은 1차, 2차, 3차, 4차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다. 저항은 노래로 이어졌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시위는 계속되었다. 경찰들은 최루액을 뿌리며 도발했다. 그런데도 시위는 거칠어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소리 지르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정도였다. 최루액을 맞은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며 눈물을 흘렸다. 난 군대에서 겪은 화생방 훈련이 떠올라 무서워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앳된 얼굴의 여학생을 보았다. 그녀는 최루액에 맞아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나이 지긋한 목사님도 보았다. 그분은 괜찮으냐고 묻는 한 청년에게 ‘안경 덕에 눈에 직접 안 맞아서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웃으셨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끝끝내 경찰은 길을 비키지 않았다. 결국 시위대가 다시 우회했다. 다른 유가족이 경복궁 쪽에 있다고 하여 우리도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밖에 오래 있기도 했고, 낮부터 계속 걸어서 내 컨디션은 그때 이미 최악이었다.
그러나 인사동 쪽에서 또 다시 길이 막혔다. 거기서 대치하다가 결국 각자 경복궁으로 가서 유가족을 도와주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시위대가 흩어졌다. 나는 길을 잘 몰라 외대 학생으로 보이는 무리를 좇았다.
경찰은 여기저기서 길을 막았다. 안국역에서 막차라도 타고 갈까 고민했는데 길이 막혀있었다. 그 시점에 집에 가는 걸 완전히 포기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맸다. 그러다 조계사 근방에 도착했는데 그 때 길이 사방으로 완전히 막혔다. 갇힌 거다. 시위대는 쪼개지고 나니 힘이 약했다. 나와 함께 있던 시민들은 40명 정도였는데, 그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경찰은 어림잡아 백 명이 훨씬 넘었다.
우리와 함께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시민 중에는 회사에서 야근하다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회사원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집에 가겠다는데 왜 막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벽을 만들고 있는 제복 안의 청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회사원들은 간부쯤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 따졌다. 간부는 짜증을 냈다. 그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아, 그걸 왜 우리한테 따져요? 우린 시키니까 막아야 한다고요!”
한나 아렌트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며 대학생 무리 속에 껴있을 때,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어려 보여서 대학교 신입생이겠거니 했는데 중학생이란다. 별 이야기를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함께 돌아다니던 도중 그녀가 내게 말했다.
“마스크 안 쓰셔도 괜찮겠어요?”
이미 얼굴 팔릴 만큼 팔렸고 조무래기라 팔려도 상관없다고 대답했지만, 한편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나보다10살이나 더 어렸다.
오래 헤매다 마침내 광화문에 도착했다. 그때 이미 새벽 1시 40분 정도였다.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광화문에는 뒤늦게 헌화를 하려는 행렬이 생겨있었다. 나는 아무 데나 주저앉아 주위를 살폈다. 후배를 모아놓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고려대 학생이 보였고,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서서 오늘 있었던 일을 주고받는 인하대 학생도 보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그들은 힘이 넘쳐보였다.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세월호 유가족이 경복궁 앞에서 연행되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시민들의 수는 확연히 줄어있었지만, 그들은 다시 전진했다. 반면에 나는 지쳐있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종각으로 향했다. 패잔병의 꼴로 ‘인의 장벽’ 앞에 서자 누군가 ‘걔 비켜줘!’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헛웃음이 났다. 고생하라고 한마디 하고는 그들을 지나쳤다.
24시간 운영하는 종각역 롯데리아에 들렸다. 거기서 첫차 시간까지 쉴 생각이었다. 그곳엔 나이 좀 있어 보이는 경찰들과 나처럼 시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과 회사 일이나 알바를 하다가 졸지에 집에 못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묘한 조합이었다. 롯데리아 안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글을 쓰려고 노트를 꺼냈다가 너무 졸리기도 하였고, 힐끔힐끔 쳐다보는 경찰 때문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섰다.
종로의 한 구석진 모텔에 방을 잡았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그리고 난 다음 걸신들린 듯이 비치되어있던 비스킷과 음료를 먹어치웠다. 그래도 허기진 배가 차지는 않았다. 편의점에서 먹을 걸 사올 걸 하고 후회하며 침대에 누웠다.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침대에 엎드린 채로 노트 위에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을 정리했다. 노트 몇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안심이 되어 잠을 청했다. 그때가 새벽 3시였다.
아침 8시에 일어나 TV를 켰다. 뉴스에서 어젯밤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언론사 추산 5만 명이고, 경찰추산 1만 명이란다. 내가 봤을 땐 그것보다 더 많아 보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외치는 그 자리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래서 무언가 바뀔 수도 있겠다고 기대를 했었다.
내가 친구들과 만나서 보고 느낀 것들을 떠들어대던 4월 17일 금요일, 유가족을 ‘인의 장벽’으로 고립시킨 경찰은 화장실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유가족은 임시 변소를 만들어야 했다. 이 인권 유린 사태를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글에 댓글이 달렸다. 그럼 집에 가란다. 할 말을 잃었다. 이날 서울 광장에서 4,475명의 촛불이 기네스북 기록 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4월 18일 토요일, 아르바이트를 위해 정발산역으로 향했다. 일을 같이하는 형은 세월호 관련 집회가 없어서 공원이 조용하다고 좋아했다. 그는 유기견을 분양해달라는 한 봉사단체의 구호도 지겹다고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뉴스를 확인했다. 100여 명이 연행되었단다. 16일에 연행된 게 10명 정도였는데 10배가 늘었다. 이번엔 인근 cctv를 끄고 최루액에 물대포까지 쐈단다. 어머니에게 문자가 왔다.어디에 있느냐고. 집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4월 19일, 오늘을 맞이했다. 인터넷으로 어제 있었던 일을 찾아보다가 그 심각함에 한 번 놀라고, 댓글에 또 한 번 놀랐다. 대한민국은 419혁명의 민주이념을 계승한 나라라고 헌법에 버젓이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419혁명을 토대로 세워진 나라에서 ‘영문도 모르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억울함’보다 ‘경찰 버스’가 더 중요하며(애초에 차벽이나 만들라고 세금 내서 사준 게 아니다), ‘시위의 자유’보다 ‘교통 불편’이 더 중요한 문제라면(사실 교통 문제는 경찰이 차벽을 만들어서 더 심각하게 유발되었다. 경찰이 막지 않고 광주에서 한 것처럼 시위대의 가이드라인을 잡아주는 식이었다면 교통에 지장을 주지 않고 시위를 했을 거다.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장담할 수 있다) 이는 국가적 자기모순이다. 그런 나라를 어찌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시위를 부정하는 이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가만히 있으라.
1년 전 우리 사회를 절망과 좌절, 애통함으로 몰아넣었던 말이다. 이 말이 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대한민국을 다시금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건 아니다. 이래선 안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밖에 비가 내린다. 참담한 심정으로 글을 쓴다. 분한 마음에도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것밖에 없다. 이 글을 완성하고 나서 내가 또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겠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2015.4.19.
애끓는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한 분이라도 더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097&iskin=lol&l=381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