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악녀 에르제베트바토리

다음너랑깨 작성일 15.05.02 22: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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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제베트바토리 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비견될정도로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장 유서깊고 유복한 바토리가 태생이다.

당시 유럽의 여러 가문은 재산과 영지를 유지하기위해 근친혼을 많이 하였는데 그로인한 정신질환이나 기형아등의 부작용이 많았다.

그녀역시 어릴때부터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괴팍안 성격을 지녔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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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때 바토리는 5살 연상의 헝가리인 페렌츠 나더스디 백작과 결혼을 하였고

그녀가 남편보다 더 높은 신분이였기때문에 결혼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유지하였다.

백작이 워낙 전쟁을 좋아한데다 투르크가와의 전쟁때문에 둘은 결혼후에도 거의 떨어져 지냈다.

(나더스디는 용맹하기로 유명하였지만 동시에 잔혹하기로도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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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람 사이에는 다섯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전쟁때문에 남편의 부재가 잦았던데다,

나더스디는 1604년 51세의 나이로 전장에서 전사했고, 바토리는 일찍 남편을 여읜 미망인이 되었다.

그뒤로 바토리의 남성편력은 더욱 심해졌다.

 

 

 

마흔이 넘으면서 아름다운 피부가 삭아가는것에 대한것에 초초해하던 그녀는

어느날 머리를 빗겨주던 하녀가 실수를 하여 머리가 심하게 땡겨지자, 하녀의 따귀를 때렸고,

좀 심하게 때렸는지 하녀의 뺨이 손톱에 긁혀서 피가 났다.

그런데 그 피가 바토리의 손 에 떨어졌고, 순간적으로 손의 피부가 탱탱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젊은 처녀의 피가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비밀"이라 생각한 그녀는 그 이후 수시로 처녀를 잡아다 죽여서, 그 피로 목욕을 했다.

발목을 밧줄로 묶어서 거꾸로 매단 다음 목을 따서 그 피를 받아 목욕을 했으며,

가끔 진짜 예쁜 처녀 아이가 잡혀오면 "특별메뉴로 "로 피를 마시기도 했는데,

처음엔 잔에 받아마셨지만, 마지막엔 직접 목을 물어뜯어 생피를 그냥 받아마셨다고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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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의 잔혹한 성품

금화를 훔치다 들키면 불에 달군 금화를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바토리"의 옷을 잘못 다리면 시뻘건 인두로 얼굴을 지져 놓는다.
어쩌다 수다라도 떨면 굵은 바늘로 입을 꿰매 놓는다.
과일 훔치다 들키면 온몸에 꿀 발라 불개미에게 뜯어 먹게 한다.

심심하면처녀 알몸을 꽁꽁 묶은 뒤 얼음 위에 굴린다

 

 

 

[배나무 사건]

그녀의 영지에 사는 농부의 딸 하나가 배가 고픈 나머지 배를 하나 훔쳐먹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토리에게 아첨을 하는 하인들이 이 소녀를 밀고했다.바토리는 소녀를 잡아다가 고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소녀는 고문을 하기도 전에 배를 따먹은 일을 자백하고 말았다.
바토리는 소녀를 용서하기가 싫었다.

러나 많은 농부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면서 배나무에 하룻동안 묶어놓게 했다.

그 대신 그녀는 하녀에게 시켜 이 소녀의 전신에 꿀을 발라놓도록 했다.

꿀 냄새를 맡은 벌들이 사방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소녀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수천, 수만 마리의 벌들에게 쏘인 소녀는 온몸이 퉁퉁 부어서 죽었다.

그래도 벌들은 그치지 않고 날아와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꿀을 먹으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녀가 죽자 이번에는 개미와 구더기가 달려들어 그녀의 시체를 파먹었다.

농부들은 에르체베트 바토리의 잔인한 처서에 진저리를 쳤다.

러나 그녀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농부들은 감히 불평을 말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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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가 즐겨 사용한 고문 도구


철의 처녀


독일의 유명한 기술자에게 특별 주문 제작한 것으로 실제 사람처럼 아주 정교하게 만든 철제 인형.

고뇌에찬 성모마리아라고도 불렸다.
등신대의 벌거벗은 인형으로 피부는 사람과 똑같은 색이고, 기계장치로 눈과 입도 열리고 머리카락도 있었다.

여자를 벌거벗겨 인형 앞에 놓으면 톱니바퀴가 움직여 인형은 두 팔을 올려 여자를 감싸안는다.

다음에 인형의 가슴이 열리는데 그 안은 비어있다.
좌우로 펼처진 문에 다섯 개의 칼날이 있다.

인형의 몸안에 갇힌 여자는 필사적이지만 칼로 전신을 찔려 뼈가 부서지고 처녀의 온몸을 사정없이 찌르면서 피를 뽑아낸다.
그 피는 인형안의 홈을 따라 흘러 바토리의 욕조로 쏟아지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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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새장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새장에 여자를 무리하게 집어넣고 도르레를 사용해 허공에 매단다.

시녀들이 벽의 스위치를 두르면 몇십개의 가시가 일제히 새장의 창살안쪽으로 튀어나온다.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들은 몸을 움직여 가시를 피하려고 하지만, 새장은 허공에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여자의 육체는 새장안에서 잘게 잘라지고 부수어져 그 피는 밑에 뚫린 많은 구멍 아래에있는

큰 그릇으로 흘러내리게 된다.

새장 아래에 있는 엘리자베스바토리는 그 쏟아지는 피를 맞으며 샤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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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자 처녀의 피는 처음 만큼 효과가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이에 측근들은 천한 농촌 처녀가 아니라 귀족 처녀의 피라야 더 효과가 있다고 부추기고

이에 바토리는 성내에 귀족적 소양을 가르치는 "귀족 여학교"를 설립해 한번에 25명 씩 학생을 받았다.

물론 이들도 농촌 처녀들 처럼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피를 빨렸는데 이때쯤부터 바토리는 조심성을 잃었던 것 같다.

시체는 들판이나 헛간, 성 바로 옆 창가, 근처 채소밭 등에 아무렇게나 묻고 시체 네 구를 성벽 밑으로 그냥 떨어뜨린 적도 있다하니

당연히 꼬리를 잡히기 시작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그러다 희생자 하나가 극적으로 탈출해 정부 당국에 신고를 했다.

 

1610년 12월 30일 성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 조사팀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에 피가 모두 빠져버린 젊은 여자 시체가 있었고, 꼬챙이에 찔린 채 아직 살아있는 여자도 몇 명 있었으며,

지하실에 내려가보니 온갖 종류의 고문으로 만친창이가 된 젊은 처녀들이 수두룩했다.

곳곳에서 피가 말라붙은 칼, 송곳 등의 고문 도구들이 발견되고 게다가 성 주변을 파보니 여자 시체가 50여구나 나왔다.

 


재판은 1611년에 열렸지만, 정작 바토리는 재판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며, 유무죄에 관해서도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재판에서 집사인 Ujvary는 처녀 37명을 살해했으며, 그중 여섯은 일자리를 찾아 성에 들어왔던 여자였다고 자백했는데,

대개는 몇주일 심지어는 몇 달 동안이나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자백은 그러했지만, 실은 총 612명을 죽였다고 한다. 바토리는 모든 것을 일기에 써서 기록에 남겼고, 숫자는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

고문은 대개 수하들이 담당했지만, 가끔은 백작 부인이 직접 처녀들을 고문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 끔찍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목이 잘린 후 화형을 당했고, 수뇌급 두명은 손가락을 잘린 후 산채로 불에 타죽었지만,

바토리만은 오로지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목숨을 건졌다. (법적으로도 귀족은 처형할 수 없다고 한다)

바토리는 그대신 높은 탑 꼭대기에 감금되었는데, 음식을 넣어주는 작은 구멍 이외에는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방이었다고 한다.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로 연명하면서도 그녀는 참회의 말 한 마디 없었다

.감금 4년만인 1614년 8월 말, 54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바토리는 어두운 감방에서 세상을 떠난다.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그녀의 시신은 그곳에 묻힐 수 없게 되었고,

그녀가 Ecsed 혈통의 마지막인 것을 감안하여 헝가리 동북부 지역의 Ecsed에 묻혔다.

바토리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화 되기도 했는데, Peter Sasdy가 감독했고,

소위 B급 영화의 스타라고 정평을 받고있는 Ingrid Pitt이 주연했는데, 제목은 Countess Dracula (드라큘라 백작부인)이다.

바토리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첫째. 에르제베트바토리는 엄청나게 미인이었으며,

천사처럼 선해보이는 용모였고, 특히 피부가 거의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우유빛이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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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바토리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여자였을 뿐 아니라 남자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나게 똑똑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군주들이 거의 글을 읽지 못했던 반면,

바토리는 헝가리어는 물론 라틴어, 로마어에도 능통했으며 지적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었다고 전한다.

셋째. 그녀가 죽은 후에도 100년 이상 바토리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금지되어있었을 만큼, 악명이 하늘을 찔렀다.

넷째. Bram Stoker의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군주 Vlad Dracula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실은 바로 이 여자 에르제베트바토리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여럿 있다.

다섯째. 에르제베트바토리백작 부인의 재판 기록은 아직도 헝가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여섯째. 그 사건이 일어났던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 되어있으며,

주로 슬로바키아 출신 하녀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름 대신 "The Hungarian Whore"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하는데

이 지역의 인종 분포가 주로 헝가리 인과 슬라브 적이어서 직역하자면 "헝가리 갈보년"쯤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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