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 어느날,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광장.
수많은 군중 앞에서 노래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인간의 목소리와 트럼펫 소리 대결로 큰 관심을 끌고 있었다.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은 남자였다.. 이 남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카스트라토로 손꼽히는 ‘파리넬리(Farinelli)’였다.
파리넬리의 음역은 트럼펫을 뛰어넘었으며, 목소리는 가녀린 여성보다도 아름다웠다. 남자의 목소리라고 믿기엔 어려웠다.
이날, 나폴리 광장에서는 영국왕실의 공인 작곡가인 ‘헨델’이 파리넬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헨델은 파리넬리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영국으로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파리넬리의 형인 리카르도에 의해 좌절된다.
파리넬리..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그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난 1994년 영화 <파리넬리>가 개봉하면서부터이다.
이 영화에서 파리넬리는 카스트라토였다. 카스트라토는 18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거세한 가수’를 의미한다.
외형은 남자였지만 남자로서의 인생을 포기해야하는 운명을 타고난 남자.. 오늘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8세기 당시의 유럽 예술은 르네상스, 바로크를 거쳐 로코코 시대였다. 로코코 시대는 미술, 건축, 음악 등을 아우르는 예술 양식이 크게 발달했는데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의 음악은 화려함과 섬세함, 부드러움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가장 큰 인기를 맞은 가수들이 ‘카스트라토’였다.
카스트라토는 당대 이탈리아의 공연장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었다.
< 18세기 로마에서 열린 오페라의 한 장면 >
카스트라토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카스트라토는 어떻게 로코코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의 교회와 강당에서 노래를 부를 여성 가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여성은 교회에서 소란스럽게 해선 안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그대로 직역하여 여성들이 교회나 강당에서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따라서 여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가수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카스트라토를 탄생시킨 것이다.
목소리 변화가 나타나기 전에 소년을 거세시키면 어린시절 특유의 고음 음역대 목소리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 음악계에는 이런 거세한 가수들이 즐비했다. 이탈리아에서만 해마다 6,000명의 소년들이 거세당했다.
파리넬리는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에 의해 거세당했고 유명한 작곡가였던 니콜라 포르포라의 제자가 된다.
영화 <파리넬리>에서는 파리넬리의 거세 장면이 등장하는데, 거세 방법은 환관을 거세할 때와 같은 ‘물리적 거세’가 아니라 고환에 칼로 상처를 내고 양잿물에 담그는 ‘화학적 거세’였다.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인권 침해이자 유린이었지만 서양의 17세기(바로크 시대)~18세기(로코코 시대)에는 이러한 카스트라토가 매우 많았다.
파리넬리는 작곡가인 형과 함께 유럽을 누볐고, 금세 유명해졌다. 또한 그가 속한 포르포라 극단은 파리넬리를 등에 업고 유럽 제일의 극단이 된다.
그리고 파리넬리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음악가가 있다. 바로 ‘헨델’이다.
1734년, 파리넬리는 라이벌이었던 헨델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공적으로 런던 공연을 마친다. 이 공연으로 헨델은 파리넬리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게 된다.
헨델의 극단은 영국 왕실의 지지를 얻고 있음에도 관객을 끌어 모으는데 실패하고, 단골 관객까지 파리넬리의 극단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다.
결국 헨델은 파리넬리 때문에 오페라 작곡을 포기하고, 오라토리오(18세기에 성행했던 종교적 극음악)로 전향한다.
그 당시 파리넬리는 엄청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여자들은 심지어 기절까지 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귀부인들은 카스트라토를 불륜 상대로 선호했다.
하지만 정작 파리넬리는 성(姓)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그의 형이 자신의 연인을 안아주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737년, 파리넬리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 국왕의 부인 ‘엘리자베타’의 초청을 받는다. 당시 펠리페 5세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엘리자베타는 파리넬리에게 국왕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노래해줄 것을 부탁한다. 결국 파리넬리는 은퇴할 때까지 그 앞에서 노래하였고, 국왕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은퇴 후, 파리넬리는 비교적 평안한 삶을 살았다. 이미 축적한 부(富)는 수많은 재물과 하인을 가질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음악가들이 은퇴한 파리넬리를 보러 찾아왔고 모차르트도 그중 한 명이었다.
파리넬리는 남은 여생을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다. 또한, 죽기 전에 하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파리넬리는 역사상 가장 유명세를 떨쳤던 카스트라토였다. 하지만 거세했다고 해서 모두 가수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공하는 카스트라토는 1%에도 미치지 못했고 나머지는 거세당한 채, 남자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암울한 삶을 살았다.
물론 파리넬리와 같이 성공한 카스트라토는 돈과 명예를 한 번에 가질 수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인생은 매우 힘들고 고독했다고 전해진다.
인간을 노래하는 기계로 만들었던 ‘거세 행위’는 현재 세계 모든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다. 순수 카스트라토로서, 가장 최근까지 활동했던 사람은
20세기 초반까지 교황청 성가대에서 활동했던 ‘알레산드로 모레스키’이다. 그의 실제 목소리는 아직까지 음원으로 남아있다.
파리넬리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 <파리넬리>에서는 파리넬리가 헨델의 아리아 '울게하소서, Lascia ch’io Pianga'를 부르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나 실제로 파리넬리가 라이벌이었던 헨델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공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파리넬리와 같은 ‘순수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는 아마 영원히 들을 수 없을 듯하다.
출처. 피키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