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조선 말기 일제의 조선 침략과정에서,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 즉,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을 일컫는다.
박제순
1893년에는 민씨 정권의 뜻에 따라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교섭하였고, 이듬해에는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직접 보은군에서 궐기하여 충청도로 확산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을사 조약체결 당시 외부대신이며 한일 합방 당시에는 내무 대신이었다. 내부대신으로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한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고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정4위에 서위되었다.
이 xx는 동학농민군 때려잡을때부터 두각을 드러냄.
이지용
이지용은 조선의 왕족으로 황실의 근친이었다. 남연군의 증손이자 흥선대원군의 셋째 형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로, 광흥령 이희하(廣興令 李熙夏)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재긍(李載兢)에게 입양되었다. 고종 황제에게는 오촌 조카가 된다.
1903년 10월 무렵부터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 데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 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일의 정서를 조인에 협조했다. 한일 병합 조약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 xx는 왕족이라는 xx가 나라팔아먹고 좋다고 작위받아서 떵떵거리면서 살았음.
이근택
조선 성종대왕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의 후손이며 충청북도충주에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가 환궁 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910년한일 병합 조약에 협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가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발탁과정부터 참... 민비클라스 민비가 총애해서 초고속 승진하고 결국 나라팔아먹음. 나라팔아먹고 집에서 일하는 종한테 "너는 참으로 개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가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라는 모욕을 들음.
이완용
1905년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적이 되자 친일파로 변신,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해 을사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을 도왔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사건을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고, 정미 7조약에 서명하여 행정권을 일본 제국에 넘겼다.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 제국에 넘겼으며, 1910년에는 최종적으로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철저히 일본 제국의 주구가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融化)'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정책에 호응하여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또한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 투쟁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경고문을 3차례에 걸쳐 발표하면서 만세 운동이 "불순 세력의 선동에 의한 무지한 백성들의 허망한 경거망동일 뿐이다"라고 비난했다.
한일병합이후, 백작이 된 그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주장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일본 천황에게 조선귀족대표로 직접 문안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20년에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주었다.
대표적인 친일파 쓰레기. 여기저기 안끼는데가 없음. 나라팔아먹는데 제일 앞장선 쓰레기 을사늑약, 정미7조약, 기유각서, 경술국치, 3.1 운동 진압 등등 안끼는데가 없는 우리민족 최대의 매국노 후에 이재명열사에 의해 피습당하나 수술받고 살아남.
권중현
1904년에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대수장을 받았다. 이후로도 군부대신을 지내면서 의병 진압 명령을 내리며 의병 운동을 탄압하였다.
1908년 일본 정부가 내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10월 16일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5만원을 수령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정5위에 서위되었으며,1915년에는 다이쇼 대례 기념장이 서훈되고, 1918년에 종4위로 승서되었다.
을사오적중에 제일 비중이 떨어지긴 하지만 역시나 쓰레기. 후에 나철의 을사오적 암살단과강원상의 암살 기도에 노출된 바 있으나 운좋게도 죽지 않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사나 열사들은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의외로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것 같습니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매국노들이 있지만 을사오적은 대표적인 매국노들로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할 이름들입니다.
단순히 욕만 하자는게 아닙니다. 물론 욕도 당연히 먹어야되는 놈들이지만 이들이 절대 잊혀져서는 안되는 이유는
나라 팔아먹는 등의 행위를 했을 경우 역사에 두고두고 이름이 남아 후손들에게 영원히 모욕당하고 기억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깨우치고 교훈으로 삼아야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같은 시대에 한순간에 경술국치같은 치욕을 당할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그래도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며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름들입니다. 나라 팔아먹고 국민들에게 잊혀진다는 건 안그래도 말년을 편하게 보낸 그들에게는 안식을 주는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