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무장공비 침투때 다친 군인의 처우.

소고기짜장 작성일 15.08.26 07: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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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추격작전중에 팔에 관통상을 입은 이종갑 예비역 소령     군 생활 18년 중 10년을 북파공작원(HID) 교관으로 근무 96년 당시 육군 3군단 정보분석장교로서 북한군의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대응책을 짰다.    
96년 9월18일, 북한군 25명을 태운 잠수함이 강릉 대포동 앞바다에서 좌초된 채 발견됐다. 침투 당일 이광수는 민가에 숨어있다 잡혔고 이후 11명은 자살, 11명은 교전 끝에 사살됐다. 이들은 모두 잠수함 승조원에 불과했다. 핵심은 살아 남은 나머지 2명이었다. 김정일이 "1개 사단 병력(8,000~1만 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한 최정예 침투조였다.   
북한군 침투조 2인은  49일째인 11월5일 새벽, 강원 인제군 용대리에서 초병들이 북한군과 교전했다. 이 씨는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되뇌이며 현장에 출동했다. 탄피를 분석하며 도주방향을 예측하던 순간, 해가 막 떠올라 시야가 잠시 가려지는 사이 숲 속에서 "탕, 탕, 탕"하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첫 발은 이 씨의 왼팔 윗부분을 관통해 뼈와 살이 뜯겨졌고, 나머지 두 발은 팔꿈치 아랫부분을 스쳤다. 계속되는 총격에 근처에 있던 장교 3명과 병사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북한군 2명은 뒤쪽에서 덮친 특전사 요원들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기나긴 추격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남은 1명이 더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이 씨는 "다음 날 바로 작전이 종료됐다. 북한군이 더 있었다면 그랬겠나"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군 당국도 "놓친 북한군은 없다"는 입장이다.     부상은 심했다. 오른다리 정강이 뼈를 잘라 왼팔에 붙이고 혈관도 이식했지만 뼈와 근육을 간신히 연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살은 여전히 움푹 파여있고 왼팔과 왼손가락은 힘을 쓰지 못한다. 
그래도 망가진 몸은 상관없었다. 진짜 시련은 그 다음이었다.   병원에서 1년 정도 치료를 받자 육군 3군단은 "치료기간이 길어져 소속부대가 바뀌었다"며 관사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졸지에 가족들은 떠돌이 신세가 됐다. 900여 만원의 병원비도 절반 정도는 본인이 먼저 내고 몇 년이 지나 할부로 나눠 받는 방식이었다.  
작전이 끝나자 40여명이 훈장, 20여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부상자들은 모두 참모총장 표창에 그쳤다.      그는 "작전에 참여하지도 않은 군 고위층이 훈장을 받았다. 우리는 거들떠도 안보더라. 이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97년, 중령 진급심사가 있었다. 그는 전상(戰傷)을 입었고 과거 최우수 교관으로 선정되는 등 촉망 받는 군인이었기에 진급 1순위로 꼽혔다. 하지만 탈락했다.  이 씨는 "주변의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심지어 지뢰지역에 잘못 들어가 다리를 다쳐도 진급했다. 난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에 뛰어들었지만 비주류인 3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차별을 견디며 더 이상 군에 남을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    돈없고 빽없는 사람이  ( 3사출신 )  목숨걸고 적과 교전하다가   팔에 관통상을 입으면 훈장을 안줌 

그리고 다음해 진급에서 탈락시킴 

 

 

 

 

추가내용-

 

3군단 정보처 전투정보장교인 이종갑 소령은 군단 작전사령부에서 군단장에게 작전상황을 브리핑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용대리에 공비 잔당이 나타났다”는 다급한 전갈이 왔다. 

이소령은 군단 기무부대장 오영안 대령, 특공연대 중대장 서형원 대위 등과 함께 합동신문조를 구성, 현장으로 급파됐다.

 

===>  오영안 대령 ,  서형원 대위 전사 ,   이종갑 소령  팔 관통상

 

이종갑 소령은 수도통합병원으로 실려와 수술을 받았다. 병원측은 이소령의 부상 정도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골반뼈를 조금 잘라내 으깨진 팔뼈 부위에 이식하면 뼈에서 진이 나와 자연스레 위 아래가 연결될 것으로 봤다.

 

그러나 경과는 좋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뼈는 붙지 않았다. 그 무렵엔 치료를 받는 것보다 X레이 촬영이 더 고통스러웠다. ‘이번에는 붙었겠지’ 하며 잔뜩 기대를 품고 사진을 찍어보면 결과는 늘 마찬가지였던 것.

 

그렇게 7개월을 허비했다. 그 기간 내내 왼팔을 고정시켜놓고 지냈다. 목욕은 팔에 비닐을 덮어씌우고 했다. 그는 민간 병원에서 재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사정한 끝에 겨우 서울 이대목동병원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소령은 군 병원보다 오히려 민간 병원에서 ‘상이용사’ 대우를 제대로 받았다. 이대병원 정형외과장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이렇게 다쳤으니 전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다”고 약속했다. “뼈뿐만 아니라 피부와 근육도 많이 상해서 성형 수술을 함께 받는 게 낫겠다”며 성형외과에도 협조를 구했다. 수술 일정이 빨리 잡히지 않자 “저런 분을 위한 일인데, 왜 이렇게 일 처리가 늦냐”며 자기 일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채근했다.

 

이소령은 1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오른쪽 다리뼈 일부를 잘라서 팔에 이식하고, 뼈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혈관 일부도 잘라 이식했다. 마취를 너무 오래 할 수 없어 일단 수술을 끝낸 다음, 이튿날 아침 왼쪽 허벅지 두 부위에서 살을 떼내 팔에 갖다붙이는 수술을 다시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팔은 빠른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좀더 일찍 이런 수술을 받았으면 결과가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었지만, 일곱 달 만에 왼팔을 ‘내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기쁨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치료비 일부 본인 부담

 

그러나 이소령은 군인이 전투에 참가해 공상(公傷)을 입더라도 국가가 치료비를 다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는 이대병원에서 두 달 남짓 입원했는데, 군인연금법은 공상으로 인한 요양 기간을 20일밖에 적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외부 병원에서 피부 이식 등 성형 치료를 받을 경우에는 비용을 지원받을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규정도 이유가 있고 필요해서 만들었겠지만, 그렇다고 ‘예외’와 ‘참작’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800여 만원에 이르는 병원비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 부담했다. 국가가 지원하는 부분도 일시불로 지급되지 않았고, 정산 절차도 복잡했다. 그는 일단 자비로 병원비를 치른 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의료보험공단 등으로 뛰어다니며 일일이 서류를 작성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고 나면 은행 계좌로 몇푼씩 입금되곤 했다. 그나마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주위 사람들이 요로에 호소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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