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주차장에서 여성을 납치해 살해한 뒤 자동차 트렁크 시신을 넣고 불을 지른 ‘트렁크 살인’ 사건의 용의자 김일곤(48)이 17일 검거됐다. 범행 8일만이다. 차를 버린 서울 성동구에 다시 나타난 그는 이날 오전 한 동물병원에 들어가 흉기를 들고 “개 안락사 약을 달라”며 강도 행각을 벌이다 붙잡혔다. 행색은 경찰이 14일 공개수배하며 배포한 운전면허증 사진과 확연히 달랐다. 회색 티셔츠와 파란 면바지에 운동화를 신었으며, 며칠간 머리를 감지 못한 듯 꾀죄죄하고 얼굴색도 검었다. 진료 시작 전인 오전 8시30분 동물병원에 나타난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문을 두드렸다. 혼자 출근해 있던 간호사가 “9시에 업무가 시작되면 오라”고 하자 돌아갔다. 30분쯤 뒤에 다시 찾아와서는 “푸들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데 지금껏 1000만원이나 들었다”면서 “안락사를 시키려고 하니 우리 집에 가서 도와줄 수 있겠냐”고 했다. 동물병원장이 “우리 병원에는 안락사약이 없다”면서 다른 병원을 안내해주자 밖으로 나갔다. 돌아간 줄 알았던 김일곤은 오전 10시쯤 다시 찾아왔다. 갑자기 길이 30㎝ 칼을 꺼내 들고는 “안락사약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병원에 있던 원장과 간호사 2명은 진료실로 도망쳐 문을 잠그고 112에 신고했다. 김씨는 진
료실 안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전화하지 마”라고 괴성을 지르며 도망쳤다고 한다.
출동한 경찰은 주변을 수색하다 동물병원에서 약 1㎞ 떨어진 성수2가3동 거리에서 김일곤을 붙잡았다. 그는 순찰차를 피해 빌딩 주차장으로 숨어 들어갔고, 경찰이 제압하려 하자 칼을 휘두르며 몸싸움을 시도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갈색 복대에는 칼 한 자루가 더 들어 있었고, 주머니에선 커터 칼도 나왔다. 경찰서로 이송되면서 기자들 앞에서 “나는 잘 못 한 게 없고, 앞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물병원 간호사 A씨는 “걸음걸이가 이상했고 불쾌한 눈빛으로 한참을 병원에 앉아 있었다”면서 “다시 올까 겁이 난다”고 아연실색했다. 이 동네에서 야채 노점상을 하는 B씨는 “16일 오후 3시쯤 근처 은행 벤치에 앉아있는 것을 봤다”고 전했다.
김일곤은 9일 오후 2시10분쯤 충남 아산의 대형마트 지하주차장에서 주모(35·여)씨를 납치해 끌고 다니다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천안 두정동에서 주씨가 용변을 보러가는 척하면서 도망가려고 해 낚아채다가 목을 졸라 죽였다”고 진술했다. 이어 “차와 휴대전화만 뺏으려고 했다”면서도 “식자재 유통업을 할 당시 여자 주인들에게 못 받은 미수금이 많아 여성에 대해 증오심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주씨의 시신을 트렁크에 싣고 서울, 강원도 속초·양양, 부산, 울산 등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어 지난 11일 오후 2시40분쯤 성동구 한 빌라 주차장에서 시신에 불을 붙이고 달아났다. 그 뒤로는 경기 하남시 등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