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인터넷에서 봤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

신들어라 작성일 15.10.29 22: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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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나사카 히로시 (船坂弘)

1920년 10월 30일 생 - 2006년 2월 11일 사망


 

레전드 

 

후나사카는 도치키 현의 니시가타에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싸움을 잘 해 골목대장으로 소문났던 그는 셋째였기에

소학교를 졸업 후 집안일을 도우라는 것에 싫증을 느껴 혼자서 공부해 와세다 중학의 강의록을 베껴가면서 독학하여

검정고시를 패스해 1939년에 만몽(滿蒙)학교 전문부에 입학해 3년간 공부했다.

 

1941년 3월에 우츠노미야 제 36부대에 현역으로 입대한 후나사카는 바로 만주로 건너 가 치치하얼의 제 219부대에

배치되었다. 치치하얼 제 219부대는 우츠노미야 보병 제 59연대를 주체로 한 부대로 가상적국이던 소련군의 침입에 대비해

부대는 노몬한, 하이랄 일대의 국경지대에서 경비대로 근무했다.

 

후나사카는 제 59연대 제 1대대 제 1중대 척탄통 분대에 배속되었는데 태평양전선의 악화로 인해 1944년 3월 1일에

그의 부대는 남방작전에 동원되어 팔라우의 앙가울 섬에 4월 28일에 도착했다. 남방작전 동원령이 발령되었을 때

후나사카는 제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전황의 악화로 인해 이를 인정받지 못하여 현지로 파견되어지게 되었다.

 

후나사카가 앙가울 섬에 왔을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는데, 중대에선 가장 뛰어난 모범병사로 소문이 나 있었으며

부하들에게도 신망을 받았다. 또 검도와 총검도의 유단자이기도 해 특히 총검술에 뛰어났던 후나사카는 치치하얼의 병영에서

훈련중에 육군 도야마학교 출신의 준위로부터 <너의 총검술은 허리만 해도 3단에 필적한다>라고 보증했다는 일화가 있다.

 

후나사카는 척탄통 분대장이었지만 중대에서 명사수로도 이름을 날려 30차례의 사격대회에서 상장과 상패를 수상했다.

치치하얼 제 219부대에선 사격훈장과 총검술 훈장을 동시에 수상했는데 이것은 그 이전, 이후에도 전례가 없어서 그는

유명자였다.

 

앙가울 섬 전투에서 후나사카는 상륙한 미군을 척탄통과 화포로 200명 이상 살상했다. 그러나 미군의 밀어부침으로 인해

중대가 괴멸되자 후나사카는 척탄통이 붉게 달아오를때까지 쏘아대다가 퇴각 후 대대의 잔병을 모아 섬 북쪽의 동굴에 은신하며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전투 3일째 후나사카는 미군의 공격으로 좌측 대퇴부가 찢기는 상처를 입었다. 미군의 공세 탓에 수십여 시간동안 방치된 후

군의관이 달려왔을 때 그는 상처를 묵시하면서 자결용 수류탄을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후나사카는

빈사상태가 되어 일장기로 지혈을 하고는 야간을 틈타 동굴진지로 돌아오는 초인적인 힘을 보였다.

 

다음날, 왼쪽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다시 전투에 나선 후나사카는 몇 번이나 중상을 입었지만 그때마다 다음날이면

회복되어 전선에 복귀했다. 이러한 이유에 후나사카는 자신이 쉽게 상처가 낫는 체질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권총의 3연사로 미군 3명을 쓰러뜨리고 미군병사에게서 빼앗은 기관단총으로 다시 3명을 거꾸러뜨리고

부상한 상태에서 총검으로 1명을 찌른 후 다시 기관단총으로 1명을 쓰러뜨리는 등 귀신같은 분전을 보였다  


실제로 후나사카의 싸우는 모습을 본 부대원들은 불사신의 분대장, 귀신 분대장이란 별명으로 그를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식수도 식량도 없는 전장에서 일본군 병사들은 서서히 지쳐가 동굴 안에는 자결을 위해 수류탄을 요구하는 중상자들로 생지옥을

이루었다. 후나사카 자신도 복부에 총검의 중상을 입어 그 상처에 구더기가 뒤끓자 자결을 결의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수류탄이 터지지 않자 후나사카는 자결을 미룬 후 왜 살아야 하는지 절망적인 상황을 곱씹었다고 한다.

전우들과 부대원들이 차례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후나사카는 죽음을 각오하고 미군 사령부에 단신으로 잠입해 육탄자폭을

할 것을 결의했다.

 

수류탄 6발을 몸에 두르고 귄총 1정을 찬 후 밤을 틈타 초계진지를 돌파한 후나사카는 4일째 미군 지휘소의 텐트 20m 지점까지

잠입했다. 이 때 후나사카는 온 몸에 24군데의 크고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대퇴부자상, 좌측 어깨관통상, 두개골 함몰,

좌측복부 총검관통상이란 치명상에 우측어깨골 염좌, 좌측발목 탈구란 중중의 상태로 옷은 거의 누더기 상태였다.

 

그리고 연일 거듭된 전투로 온 몸은 화상자국과 전치 20여개의 포탄파편으로 인해 유령이나 아귀처럼 보였었다. 후나사카는

미군 지휘관이 지휘텐트에 집결할 때를 기다려 돌입을 결의했다. 당시 미군 지휘소 주변에는 보병 6개 대대, 전차 1개 대대,

포병 6개 중대 및 고사포 대대 등 총 1만 명의 병력이 주둔중이었다.

 

후나사카는 이들 지휘관들이 지휘소 텐트에 모이는 것을 기다려 은신해 있었다. 지프가 차례로 사령부에 도착하자 그는

오른손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들고 왼손에 권총을 쥔 후 전력으로 텐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괴상한 몰골의

일본병사에 미군들은 깜짝 놀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미군이 아연실색한 틈을 타 후나사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수류탄을 던지려 했지만 그 순간 머리를 가격당해 혼절하여 쓰러졌다.

그를 검안한 미군군의는 가망성이 없다하여 야전병원으로 옮기게 했는데 그때까지 권총과 수류탄을 움켜쥔 채 정신을 잃었던

후나사카는 잠깐 깨어나 미군을 향하여 <이것이 할복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만이 할 수 있는 용맹한 죽음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혼절한 후나사카는 3일이 지난 후에야 야전병원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그는 미군 헌병의 총구에 자신의 몸을 들이대며

<쏘아라, 죽여라, 빨리 죽이란 말이다>라고 난동을 부렸다. 이 기묘한 일본병사의 행동은 앙가울의 미군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후나사카는 무모한 계획으로 돌입했지만 대부분의 미군은 그를 용맹한 병사라 칭했다.

 

그 후 후나사카는 페릴류 섬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때 용맹한 병사의 이 <전설>은 페릴류 섬까지 퍼져 미군은 특히

위험한 후쿠다(당시 후나사카는 후쿠다란 가명을 썼다)라며 요주의 인물로 감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만신창이의 몸에도 불구하고

후나사카의 의지는 꺾을 수 없어 수용소에 들어온 지 이틀째에 그는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 수용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후나사카는 1,000m를 잡입하여 일본군 병사들의 시체 사이를 뒤져 소총탄의 화약을 모아 다시 미군부대에 잠입해 탄약고의

폭발에 성공했다. 다시 붙잡힌 후나사카는 페릴류 섬의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텍사스 등 종전까지

수용소를 이동했다.

 

 

귀향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아 1946년 귀국했다. 고향에서는 이미 전사 처리한 지 오래라 위패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였고(...), 자기가 살아 있음을 알리러 이를 걷어차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후나사카의 전투기록은 전사총서에 게재했다.


후나사카는 앙가울 섬에 위령비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겼다. 이것은 뒷날 애독자들의 후원금으로 실현해, 이후 태평양의 여러 에 위령비를 세웠다. 또, 그는 서점을 경영하는 바쁜 와중에도 앙가울 섬의 영령위령제에 매년 참석했다. 그 뒤 팔라우 원주민의 원조 및 일본간의 교류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 외에도 전후 위안부 증언에 대해 나섰으며 관련제보까지 했는데, 일례로 일본군 위안소 현황에는 후나사카 히로시가 고발한 내용들도 있다. 위안부 만행을 부정하던 세력들이나 몇몇 참전군인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대목이다.

후나사카는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와 검도를 통해 친교도 쌓기도 하면서 후나사카는 자신의 자서전인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울》을 펴낼 때 서문을 미시마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 때의 유키오는 군국주의에 미치지 않았던, 그러니까 병약했던 시절의 정상인이었다. 그러나 후나사카는 뒤에군국주의자로 바뀐 유키오를 아주 한심하게 여겼다고.  또 후나사카는 미시마가 자결 당시 쓴 칼인 마고로쿠 카네모토(孫六兼元)를 증정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때 한 말이 걸작인데 "한심한 작자 같으니라구. 차라리 이 칼로 야쿠자나 베지 그래? 뭣하러 자살하냐?"며 비꼬았다. 그리고 후나사카는 이 칼의 이름을 자살밖에 못 하는 칼이라 지었다.
 

후나사카의 전투기록은 전사총서에 게재되어있다. 전사총서 <육군작전사 2권>에 <후나사카 군조는 격전끝에 중상을 입고

최후에 적장에게 보복하러 은신잠입하다가...중략...3일간 의식불명, 죽음을 경험한 뒤 미군에 의해 소생했다. 1946년 정월에

기적적으로 생환귀국하다>라고 쓰여져 있다.

 

군인으로써의 인격

 

전장에서는 악명 높았지만, 정작 무고한 자들에게는 위해를 끼친 적이 없었음.

전범 재판에서 전범이 아닌 전쟁범죄의 증언을 위해 자진 출두함.

 

전쟁중 포로잡혀 죽게된 미군 병사들을 빈번히 구해줘 전후에 베프가 됨

 

후임에 대한 폭행이 만연한 일본군에서 부하를 인격적으로 대함. 

포로의 목을 베려던 일본군 병사의 손목을 부러뜨린 것으로 유명.

 

100인 참수경기라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두 육군소위를 자신의 이름으로 본국에 고발함.

당시 100인 참수경기는 일본의 신문에 긍정적으로 실릴정도로 사회가 미친 상태였음.이런 상황에 개인이 고발을 하면

사회에서 매장될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후나사카는 "저 두 소위놈들은 정신나간 미친새끼"라며 비난

 

전쟁후 군국주의자들에게 날선 비난을 가했으며 우리나라에 위안부 문제에 적극 협조해 위안부 내용을 직접 고발함.

 

 

 여생

 

후나사카는 앙가울 섬에 위령비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겼다. 이것은 후에 애독자들의 후원금으로 실현되어

이후 태평양의 여러 섬에 위령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또 그는 서점을 경영하는 바쁜 와중에도 앙가울 섬의 영령위령제에

매년 참석했다. 그 후 팔라우 원주민의 원조 및 일본간의 교류사업에 힘을 쏟았다.

 

후나사카는 <살아있는 영령>이라 불리며 많은 일을 했는데, 오오모리도(大盛堂) 서점이란 큰 체인서점을 유통시키며

남태평양 위령협회 이사를 지내다 200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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