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스압]일본 최악의 엽기 연쇄살인사건범

무명객혼돈 작성일 16.02.22 16: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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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아 연쇄 살해마 미야자키 츠토무 (1962년 8월 21일 - 2008년 6월 16일) 

 

(소녀들의) 몸을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사체는 썩어버리지만 비디오라면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지. 

 

1988년에 일어난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의 범인이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가벼운 장애를 가져, 집에 틀어박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사회로부터 떨어져 살았던 인물이다.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은 그 엽기성, 이상성으로도 유명하다. 

성인여성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어서 유치원에 다닐 정도의 어린여자아이 4명을 유괴, 살해하고 실제로 

그 사체를 먹음으로써 열등감을 해결하려고 했던 검정 뿔테 안경의, 손에 장애를 가진 20대 초반의 부모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는 반대로 힘없는 할아버지와 자신을 동일화시켰던 청년. 

 

홈 비디오나 로리콘계 비디오(어린 여자아이를 상대로한 성인물) 매니아로, 공개 된 그의 방 모습 등에서 '오타쿠'의 범죄로서 크게 파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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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츠토무의 방은 성인물 비디오테이프가 6천 개나 있었고, 만화와 잡지로 파묻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방에서 발견된 수천개에 이르는 특촬영화 (울트라맨, 고지라 등으로 대표되는)와, 로리에로만화 및 아동성인물, 그리고 소녀들을 죽인후 촬영한 사체의 비디오는 그당시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오타쿠>라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히게 되었다고한다 

 

 

<사건 개요> 

 

1988년 8월 22일, 미야자키는 사이타마현 이루마시에서 4세의 여자어린이 a양를 차로 유괴, 살해했다. 

사후, 그는 비디오 카메라로 a양의 **에 장난하는 모습을 촬영하였다. 

 

1988년 10월 3일, 사이타마현 한노우시에서 7세의 여자어린이 b양를 차로 유괴, 살해했다. 

살해한 후, 시체의 옷을 벗겨 **에 장난을 한다. 

 

1988년 12월 9일, 사이타마현 카와고에시에서 4세의 여자어린이 c양를 차로 유괴.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는 등 유린한 후, 살해한다. 

 

1989년 2월, a양의 집에 골판지 박스가 도착한다. 안에는 a양의 치아, 뼈, 그리고 "a양, 골, 소, 증명, 감정"이라고 쓰여진 문서를 넣어서 보낸다. 그 후, '이마다 이사무자'라는 이름으로 범행 성명문, 고백문을 매스컴에 보낸다. 

 

1989년 6월 6일, 토쿄도 코토구에서 5세의 여자어린이 d양을 차로 유괴, 살해했다. 

a양과 같이, 비디오 카메라로 d양을 유린하는 장면을 촬영한다. 

 

1989년 7월 23일, 여자어린이에게 장난을 하려고 했으나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그 이전의 사건에 대해 모두 자백했기 때문에, 1989년 8월 11일,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서 체포 된다.

 이 사건은 사건의 잔인성이나 엽기성만으로도 굉장하지만, 그것이 한층 더 굉장한 인상을 주는데는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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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어린 여자아이가 목적이었던 일, 성기에 장난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던 것, '4명 중 한 여자어린이의 양손을 먹었다'라고 자백한 것, 미야자키의 방이 공개되었을 때, 그 모습이 특수 촬영이나 애니메이션, '기니핏그'와 같은 공포영화 등의 비디오 테잎이나 만화로 가득 차 있었던 것, 최근 이상 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화제로 떠오르는 '정신감정'이 이 때 세상에 클로즈업 된 것, 등이다. 

 

이 사건이 세상에게 준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워낙 파문이 컸던 사건이라 친아버지가 지쳤다는 유서를 남기고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했는데, 이에 대한 미야자키 츠토무의 코멘트는 "아버지가 그렇게 되어 속 시원합니다" 였다. 

 

사형이 확정된 후로는 모 출판사에 300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내서, 교수형은 인권을 침해한다는 둥, 사형 집행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죄나 반성을 할 수가 없다는 둥 「무죄입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등을 주장, 피해자나 유족에게는 끝까지 사죄하지 않는등 여러가지로 뻔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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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일본~  이 사건을 만화로 출판

 

 

 

 

 

미야자키 츠토무 출생과 성장 그리고 사형 집행까지

 

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츠카이치쵸에 있는 현지 신문 회사를 경영하는 유복한 일가의 장남으로 출생. 

 

양친은 맞벌이로 바빴기 때문에, 미야자키가 출생한지 얼마 안되어 아이를 돌보는 남성을 고용한다. 

어린 시절에는 거의 이 남성과 조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다. 미야자키가는 증조부는 촌(村)회 의원, 조부는 쵸(町)회 의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그 지역의 명사였다. 

 

가족은 조부, 조모, 양친, 여동생 2명으로 7명. 어릴 때부터 손바닥을 위로 향할 수 없는 '양측 선천성 요척골 유합증(?側先天性橈尺骨癒合症)'이란 당시의 일본에 150명 정도 밖에 사례가 없는 드문 신체 장애가 있었다. 

 

초등 학교 시절에는 '괴수 박사'라고 불릴만큼 괴수에 열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장기부에 소속, 질경우에는 다양한 공략책을 읽어서 졌던 상대에게 반드시 이길만큼 승리에 집착했다. 손의 장애를 신경쓰고 있어서 자택에서 편도로 2시간이나 걸리는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동급생은 어둡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년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본인은 메이지대학으로 추천 입학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고교시절에 계속 성적이 떨어져서 희망을 이룰 수 없었다. 

 

고교 졸업 후인 

1981년, 도쿄코게이대학 단기대학부 화상 기술과에 진학. 퍼즐에 열중해서, 자작 퍼즐을 전문지에 투고하거나 잡지의 퍼즐 회답자로 잡지에 이름이 게재되기도 했다. 배우인 카와사키 마요(川?麻世)가 단기대학의 동급생이었지만, 미야자키의 체포시 인터뷰에서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으로, 80명 정도의 소수 인원 클래스였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고), 친구에게 물어봐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라고 할만큼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1983년 4월, 단기대학졸업 후에는 숙부의 소개로 코다이라시의 인쇄 회사에 취직해서 인쇄기 오퍼레이터로 근무. 한 동료는 '근무 태도가 매우 나쁘고, 평판도 매우 나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6년 3월에 해고. 

양친이 가업을 돕도록 몇 번이나 이야기 했지만, 자기 방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수개월동안 계속한다. 9월 경부터 광고 원고를 받으러 가는 정도의 간단한 심부름으로 가업을 돕는다. 이 무렵부터 애니메이션 동인지를 발행하지만, 동료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1회만에 발행이 끝난버린다. 

 

그 후에는 수많은 비디오 서클에 가입해서, 전국 각지의 회원이 녹화한 애니메이션이나 특촬(특수촬영)프로그램의 비디오를 더빙 교환, 콜렉션을 하지만, 대부분의 테잎은 자신이 감상하는 일이 없었다. 

 

비디오 서클에서는 다른 회원에게 무리한 녹화나 더빙 주문을 했기 때문에, 미움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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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후 가택 수색에서 6000개에 가까운 비디오 테잎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된다. 

 

1988년 5월, 조부가 사망. 

1988년 8월 22일에 제 1 범행을 일으킨다. 

1989년 3월에는 하루미 코믹마켓에 만화 작품을 출품했다. 

 

사건 후 

 

1989년 7월 23일, 외설사건을 일으키려 하던 것을 피해자의 부친에 의해 붙잡혀 미야자키는 강제 외설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1989년 8월 24일, 도쿄 지검의 총무부 진단실에서 간이 정신감정을 받는다. 정신 분열병(당시의 호칭)의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현시점에서는 인격장애의 범위에 머문다고 판단, 검찰은 기소를 단행한다. 첫공판에서 '전체적으로 깨지않는 꿈을 꾸고 일어났다고 할까, 꿈을 꾸고 있었다고 할까...'라고 죄상 인부(죄상의 인정여부를 묻는 절차)에서 말했다. 

  

1992년 3월 31일 정신감정서가 제출되었고 인격장애로 보여졌다. 실재로 성적 도착은 인격장애 환자에게서 잘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조부의 뼈를 먹은 증언에 대한 변호측의 증거제시가 있었지만, 검찰측은 그것만으로는 확증이 될 수 없다고 반론했다. 

 

1994년 11월 30일에 제 2회 감정서가 제출된다. 

1명은 통합 실조증, 2명이 해리성 동일성 장애의 감정을 냈다.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사형 판결. 책임 능력에 관해서는, 체포시 그에게 그러한 다중 인격이나 통합 실조증을 의심하게 하는 비정상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고, 체포에 의한 구금 반응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는 이유로 제 2회 감정은 채용되지 않았고, 책임 능력은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고 판결되었다. 

 

당일 공소.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1심 지지. 공소 기각 판결. 

2001년 7월 10일, 상고.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가 변호측의 상고를 기각. 변호측이 판결 정정을 요구했지만, 

2008년 6월 17일, 도쿄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된다. 

 

잡지 '츠쿠루(創)'의 시노다 히로유키(篠田博之) 편집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의 현행 사형 방법인 교수형을 비판하고, 약물 주사에 의한 사형 도입을 호소하기도 한다. 편집부로 보낸 편지는 약 300통, 내용은 구치소에서 읽은 만화의 타이틀을 나열하기만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인에게도 총 2000통 가까운 편지를 구치소내에서 보냈다. 

또, 사형 판결이 결정된 후에는 독방에서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감상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죽을때까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원없이 보다가 뒤지라고 그런건가?)

 

동기 

 

사건의 기이함으로 인해 다양한 억측이 난무하고, 미야자키 자신도 요령부득(要領不得)의 진술을 반복하고 있어서 재판에서도 특정한 동기는 밝히지 못했다. 

 

감정을 담당한 의사들에 의하면, 그는 본질적으로 소아성애자(小?性愛者)(페도필리아: 어린아이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하는 성도착증)가 아닌, 어디까지나 대체적(代替的)으로 여아를 노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인을 포기하고 여아를 대체물로 한 것 같고, 

 

소아성애나 사체성애(死?性愛) 등의 경향은 볼 수 없습니다' (제 1차 정신감정의 법정 증언) '유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성도착은 인정되지 않고... 유아를 대상으로 한 것은 대체이다'(간이 정신 감정) 

 

사형 집행

 

2008년 6월 17일 오전에 하토야마 쿠니오(鳩山邦夫) 법무장관의 명령으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된다. 

     

 

사형 집행 전

 

범행 동기는 미해명인 채로 정신감정도 계속 진행중인 상황이었다. (과거 10년간) 사형 확정으로부터 사형 집행까지 평균 약 8년이었지만, 사형 확정으로부터 2년 4개월의 스피드 집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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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서

여아 연쇄살인마 미야자키 츠토무는 사형전까지 두권의 책을 출간한다. 

 

 

http://cafe.daum.net/mizesagun/J8cC/9691

 

당시 3명의 사형수라는걸 보니 일본은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고 있군요

 

그 외 검색해보니 더 끔찍하고 잔인한 그러면서도 놀라운 내용들이 많더군요

 

요즘 뉴스마다 아동학대 아동폭력 영유아/아동 살해 등이 많아서 다른 나라 형벌규정 찾다보니

 

우연히 본건데 처음 보는거고 내용이 너무 엽기적이라 올려봅니다

 

결론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아동학대자는 개 쓰 레 기 라는 것

 

더군다나 학대 후 살해까지 가는 놈들은 태어날 가치조차 없었다는거네요

 

ps)미국의 보름달 미치광이라고 불린 여아 연쇄살인범 알버트 퓌쉬(19010~1934)라는 놈이 있는데 이놈도

    만만치 않네요 미야자키 츠토무가 사건당시 일본판 알버트 퓌쉬라고 불리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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