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평양을 날아가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수고 싶다."
그러나 이승만은 집요했다. 상해에 파견한 자신의 심복 안현경을 통해 기호파 세력을 움직이며 재정권 장악을 추진했다. 1920년 3월 결국 독립성금을 둘러싼 갈등은 이승만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내분에 휩싸였다.
각부 차장들 집단사직 결의 < 구미위원부 폐지, 이승만 사퇴 요구 >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모든 충돌을 보면은, 돈과 관련이 있어요. 이승만과 관련된 수많은 충돌을 보면은 다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병준 교수 <이화여대 인문과학부> 인터뷰"그것은 이승만의 본능이나 본성에 가까운 행동이었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임시정부의 돈줄을 장악한 이박사. 그는 신이 나서 미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에게는 정말, 찬란한 봄날이었다.
나이 마흔 여섯에 자신을 숭배하는 스물 두살자리 여대생과 여행도 하고 틈만 나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최고급 럭셔리 호텔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192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덜컥 미국 수사관들에게 잡혔다.
<MANN ACT 맨 법률 위반>
당시 미국은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그래서 부도덕한 성관계를 목적으로 주 경계선을 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믿어주세요. 우리는 아빠와 딸 같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사관들은 집중 조사를 벌였다. 그러자 이승만의 감추고 싶은 비밀까지 드러났다. 이승만이 백인 여자들에게도 접근해 마치 재벌 2세처럼 최고급 식사를 사주며 데이트를 즐겼던 것이다. 결국 미국 수사관들은 이승만을 부도덕한 플레이보이라고 판단했던지 그를 기소해버렸다.
사태는 심각했다. 만약 이 사건이 등골이 휘도록 일해서 독립성금을 내주는 한인들에게 알려지면 일단 개망신은 기본이고 다시는 이승만에게 땡전 한 푼 줄 리가 없다. 그는 조심스럽게 해결책을 강구했다.
일단 대통령 환영회에 불참을 통보하고 그 이유는 비밀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재판은 하와이에서 받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비밀리에 백인 유력인사들과 접촉했다. 이승만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던 백인들, 그들은 '이박사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다' 라고 보증을 해주었고 결국 그는 위기상황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지 1년 만에 상해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에피소드 4 상해의 결투 (Fight in Shanghai)
이 때, 일본은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초토화 시키겠다고 대규모 병력을 출병시켰다. 그러자 홍범도와 김좌진은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 집결했다. 죽음을 각오한 3천여 명의 독립군들. 그들은 3만 5천 명의 일본군에 맞서 6일간의 대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완벽하게 박살내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본. 그런 일본이 의병과 다름없는 조선인 독립군들에게 대패하면서 처음으로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일본군은 조선인 민가들을 습격하며 소름끼치는 대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강경파들은 당장 중국과 연합해 게릴라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온건파들은 군사력을 제대로 키워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중요한 시점에 이승만이 상해로 왔다. 일단 모두가 환영을 해주었다. 독립성금 문제로 이승만을 비판했던 사람들도 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자 임정요인들은 일본에 맞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벌이자며 정부 개혁방안들을 건의했다.
"대통령은 정부에서 근무해야 효율적이다. 그게 힘들면 국무회의에 권한을 위임해달라."
하지만은 이승만은 모조리 거부했다.
"나는 미국에 있을 것이고 어떤 권한도 넘겨줄 수 없다."
결국 정부요인들은 폭발직전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승만은 전격적으로 대통령 교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거기엔 아주 획기적인 이승만의 독립운동 전략이 담겨 있었다.
"우리 형편 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독립운동가들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이승만은 왜 이런 돌대가리같은 전략을 내놓은 걸까? 그 이유는 역시 돈과 관련이 있다. 임시정부 수립 후 한인들은 독립성금을 냈고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서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끼어들어 브로커 역할을 했다. 성금을 받아서 성과도 못내는 외교활동을 내세우며 13%만 송금한 것이다.
그런데 독립전쟁 준비를 국민들에게 떠넘기면 어떻게 될까? 이승만으로서는 정부에 보내야 할 돈을 더 파격적으로 줄일 수 있다. 바로 이게 핵심이다.
드디어 독립운동가들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대통령이란 자가 독립성금이나 눈독들이고. 정부역할이 중요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허무맹랑한 전략이나 지껄이면서 아무런 비전도 내놓지 못하니 임정요인들 사이에서 '이대로는 안된다!' 그런 매우 건설적인 공감대가 확산됐다.
마침내 정부 핵심요인들은 이승만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돈과 출세에 청춘을 바친 이승만이다. 결국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동휘 "저런 썩은 대가리와 함께 일할 수 없다."김규식 "말이 되는 대책이 있어야 참여해서 돕지 시간만 낭비하기 싫다."안창호 "당신이 사퇴해야만 독립운동 세력이 통합된다."
국무총리(이동휘)가 이미 떠난 상황에서 김규식 그리고 안창호마저 임정을 떠났다. 위기탈출의 귀재 이승만. 과연 그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했을까?
"긴급한 외교사명이 있어 미국에 간다."
그렇게 임시정부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고 이승만은 백인 미녀들과 럭셔리 레스토랑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에피소드 5 우리는 혁명을 꿈꾼다 (We dream about A Revolution)
1924년 상해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임정을 개혁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 입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들은 독립운동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이승만의 대통령 권한부터 정지시켰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 그는 곧바로 하와이 깡패본색을 드러냈다.
"지금부터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보내지 마라."
독립운동의 자금줄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 이승만 스고이~
악질 친일파를 능가하는 이승만의 행동에 임시정부는 즉시 칼을 빼들었다.
< 이승만 탄핵 >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탄핵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에 이승만쪽에서는 거기에 미주지방 동포들이 걷어준 돈을 끊어버리거나 그렇게 나오는 걸 볼 수가 있어요.
다시 말해 돈을 가진 자가 정치권력에서 헤게모니를 쥘 수 있다라는 역시 이승만다운 발상이라고 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그 뒤 임정은 새출발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잠은 청사에서 자고 밥은 동포들에게 빌어먹는 상황이다."
이 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남자가 임시정부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나라를 잃은 분한 마음에 일본 첩자를 맨주먹으로 때려 잡았던 터프한 남자. 그리고 조국이 독립할 수만 있다면 임정의 문지기가 되도 좋다는 순정파 로맨티스트. 그는 열혈민족주의자 김구였다. 역시 진짜 독립운동가는 이승만과 달랐다.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반드시 한국 문제를 처리해 줄 것이다." - 이승만
< 미국과 영국, 일본의 한국 지배를 동의 >, 워싱턴 군축회의 1921
이 냉정한 국제관계를 정확히 직시했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김구의 임시정부는 눈물겹도록 현실적인 독립운동 전략을 세웠다.
"미약하더라도 우리가 일본과 직접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의 적대국들이 한국을 주목한다."
그리고 곧바로 구체적인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상해 일본군 사령부, 국내 조선총독부, 만주 관동청, 그리고 도쿄의 일본 천황까지 직접 타격하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를 위해 김구는 특무조직,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1932년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천황에게 폭탄투척>, 1932년 1월 8일
그러나 목표달성은 쉽지 않았다. 그 때에 운명처럼 김구를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그는 농민들을 가르친 계몽운동가였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일본군 전승축하기념식>, 1932년 4월 29일
나도 알고 있다.일본 장교 몇 명 죽인다고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한국인의 독립의지를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목숨을 바친다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나의 자유, 민중의 자유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나아진다.
- 윤봉길
이 소식은 하와이에도 알려졌다. 그러자 이승만은 김구에게 주제넘은 충고를 했다.
"어리석은 짓들 좀 작작해라.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윤봉길의 희생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다.
"중국의 3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 - 장제스 총통
그리고 장제스 총통은 한국의 레지스탕스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40년 9월
드디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8일
"미합중국은 갑작스럽고 계획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정의로운 힘을 가진 미국인들은 압도적인 승리를 할 것입니다." -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일본과 미국이 친할 때에는 외교 노선이 제일이라던 이승만, 이제 일본이 미국의 적이 되자 화려한 변신을 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우리 2천 3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 이승만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발전시킨다고 극찬했던 이승만. 그런 그가 감쪽같이 반일항전의 투사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유력자들과 접촉하며 다시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때,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영국군에 광복군 파견>, 1934년 8월
그런데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의 전략첩보국이 한국인들을 대일전에 활용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To use Koreans against Japenin Korea and Japan 한국인들을 한국과 일본에침투시켜 대일전에 활용한다 - 미국 전략첩보국
OSS는 먼저 이승만과 접촉했는데 그가 OSS와의 관계를 대외선전용으로 이용한다고 판단하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직접 손을 내밀었다.
<도쿄 대공습>, 1945년 3월 9일
1945년 5월, 마침내 임시정부는 OSS와 한미공동작전에 합의했다. 이것이 국내진공작전이라 불리는 이글 프로젝트(EAGLE PROJECT)였다.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도 광복군 병사들은 가슴이 벅찼다. 만약 광복군이 국내로 들어가 직접 일본군을 몰아낸다면 임시정부가 한국의 독립에 대해 당당하게 발언할 권리를 얻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되면 독립운동가들이 구상해 온 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다. 그것은 NEW DEMOCRACY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만열 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인터뷰"인민의 자유와 인민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그럼 자유만 가지고 나라를 우리가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거냐? 그렇지 않다..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그런 합의도 건국강령속에 넣어야 한다.."
한국의 레지스탕스들이 꿈꾸던 나라, 그것은 지금의 프랑스나 영국같은 유럽국가 들과 가장 비슷하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국민들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공공분야는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다. 특히 교육은 프랑스처럼 대학 등록금까지 무료로 해서 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인터뷰"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1945년까지 그 당시 사료를 보면은, 자신들을 전부 혁명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전의 사회와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 자유로운 사회, 평등한 사회, 착취가 없는 사회, 억압이 없는 사회, 그건 민주공화국이다."
1945년 7월, 임시정부의 활발한 움직임에 이승만은 초조해졌다. 그는 상황을 역전시킬 승부수를 찾았다.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그는 미국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태평양의 황제였다. 일본이 항복하면 한국 문제의 실권도 그가 쥐게된다. 결국 맥아더의 선택을 받는 자가 한국의 최고권력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는 소련을 싫어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이승만은 맥아더를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미친듯이 러브레터를 쓰기 시작했다.
저희는 대일전에 꼭 참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쁜 소련의 방해로 좌절됐어요." - 이승만
물론 소련은 방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분의 사랑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좀 섞었다.
그러자 3일 후, 그분에게서 답장이 왔다.
"Splendid Spirit. 이 박사의 숭고한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소." - 더글라스 맥아더
아, 이게 현실일까? 이승만은 꿈꾼 기분이었다.
원자폭탄을 맞자 일본은 예상보다 빨리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 패전>, 1945년 8월 15일
이것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 때, 이승만은 웃고 있었다. 그는 신이 나서, 맥아더를 향해 더욱 노골적인 구애를 펼쳤다.
"미국이 단독으로 한국을 점령해주세요. 전 소련이 싫어요."
그리고 이승만은 맥아더와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를 만나면 이승만이 할 말은 뻔했다.
"제가 마음에 드시면 저를 한국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 때, 맥아더는 도쿄에서 일본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연합국들은 침략전쟁의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히로히토, 그는 전범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받을까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상태였다. 9월 27일, 히로히토는 조용히 맥아더를 찾아갔다.
그리고 정치적 거래를 시도했다.
저를 살려주시고 천황제를 유지시켜 주십시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맥아더는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까?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한 히로히토를 처벌했을까? 아니면 미국의 국익을 확대하려고 정치적 거래를 수락했을까?
그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삶을 바쳐 온 애국자다.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전범재판에 회부하지 않았다. 그 댓가로 미국은 일본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와 동북아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제 다음 차례는 한반도 문제였다.
미국의 영웅 맥아더, 그는 어떠한 사람을 한국의 대통령으로 세우고 싶었을까? 맥아더 자신처럼 자기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애국자였을까? 물론 그럴리가 없다. 맥아더는 미국의 국익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인물을 원했다.
1945년 10월 13일 이승만은 도쿄로 향했다. 이제 한국의 미래가 결정될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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