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대, 에도 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은 대대적인 도로망 정비와 상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폅니다.
조선은 오랑캐가 쳐들어올 때 도움이 된다는 이유가 첫째, 둘째는 조선은 농업 국가라는 이유로 도로 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이는 구한 말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다이묘들을 수도로 정기적으로 불러 올리는 참근교대제 실시. 이동할때마다 숙박, 식사 할때마다
무거운 현물을 지급 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화폐 사용이 증가했고, 화폐 경제로 전환이 되기 시작합니다.
반면, 조선은 상당히 후세까지도 현물교환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쌀 몇 되 - 삼베 몇자 이런식으로)
에도시대 교토의 모습
에도에 가신들과 함께 머물게 되었던 다이묘들은 대단한 소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예품을 사들이고 연극공연을 관람하고 차와 비단 과 같은 사치품을 사들이는 큰 손이었습니다.
이러한 '수요'는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생산자들을 에도에 집결, 이는 에도의 경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고
참근교대는 일본 전국의 도로 인프라를 발전시키고 이러한 도로망을 따라 무역망을 촉진시키고
화폐경제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수요를 집중시키는 블랙홀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데지마 섬.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덜란드와의 무역 및 교류가 이루어진 유일한 장소
에도시대 일본과 무역관계에 있던 네덜란드를 위해 막부에서 설치한 무역 거주구.
부채꼴모양의 인공섬으로 면적은 축구장 2개 넓이보다 조금 큰 정도였습니다.
이곳의 의의는, 일명 난학이라 불리는 서양과학을 접하는 통로가 되어 200년 후 메이지 유신 때
서구열강의 쇄도에서 일본내의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완충제 구실을 톡톡히 했다는 것입니다.
철학(哲學) ,과학(科學) 전람회(展覽會), 경제(經濟) 등 수많은 번역어들도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일본에 갔던 통신사와 일본 학자의 대담이 기록에 남아있는데,
일본 막부의 외교 거물이자 최고 학자라는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가
1711년 파견된 통신사 정사 조태억(1675~1728) 일행과 붓글씨로 대화한 기록을 담은 <강관필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이 구라파(유럽), 이탈리아, 화란(네덜란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귀국에는 만국전도(세계 지도)도 없는가” 하고 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18세기 기준으로 일본의 1/4를 차지하고 있던 에도막부의 세입규모만 따져도 절대적인 수치로 보면
조선의 후기 전성기였던 정조시대 조선정부가 거둬들인 세입의 2배, 메이지 유신 1년차 때에는
이미 세입규모가 13배로 차이났습니다. 상업과 무역이 경제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메이지 유신을 대충은 알고 있고 일본에게 역전당한 조선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일본은 그저 조선보다 조금 빨리 개항했기 때문이야!'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근대화와 사회 개혁은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기반이 되어 촉발되는 것입니다.
일본이 어떻게 우리를 앞서나가 치욕의 역사를 안겨주었는지 알아야 과거 우리 지배층의 실수를 되짚고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글을 써봤습니다.
출저 : 이종격투기 글쓴이 : SPO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