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6.03 자료
중국의 행정기관에 가면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팻말이 붙어있다. 중국 공산당 정권을 출범시킨 마오쩌둥(모택동)의 말씀이다. 인민은 중국 공산당 정권을 낳은 주역이기 때문에 당과 정부는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실상은 어떤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13억명이 넘는 인구가 있는 만큼, 극소수 당 간부나 유력 인사가 아니면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어렵다는 것은 물어보나마나다. 중국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도 겉으로는 소수민족을 챙기는 것 같지만 한족이라는 주류 사회에 밀리는 55개 소수민족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구색맞추기 성격이 강하다.
지금 중국 북부 네이멍구(내몽고) 자치구가 난리다. 수도인 후허하오터를 비롯해 3개 도시는 계엄상태다. 한족과 몽고족의 민족 갈등으로 학생 시위가 잇따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 2개의 사고가 잇따라 일어났다. 하나는 5월10일 밤에 일어났다. 몽고족 유목민이 네이멍구 초원 지대에 있는 시린궈러(석림곽륵)에서 석탄 운반을 하는 한족 트럭 운전기사와 시비가 붙었다.
내몽고 시위
석탄 차량의 소음과 먼지에 화가 나 트럭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열받은 한족 운전기사는 유목민을 트럭으로 깔아 죽였다. 5월15일에는 석탄 탄광에서 소수민족의 하나인 만주족 주민이 탄광 인부와 말다툼 끝에 맞아서 숨졌다. 민족 갈등이 도화선이 되면서 시위는 네이멍구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몽골 시위
5월 25일에는 몽고족 대학생과 중·고교생 2000여명이 시린궈러를 관장하는 시린하오터(석림호특) 시청으로 몰려가 관련자 엄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30년만에 네이멍구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이들 사건의 밑바탕에는 돈을 중시하는 한족과 마구잡이식 개발에 반대하는 소수민족의 갈등이 담겨 있다.
네이멍구에 사는 몽고족들은 전통 목축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하지만 네이멍구에서 석탄이 발견되면서 마구잡이 탄광 개발에 불이 붙었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7414억t의 석탄이 매장된 네이멍구는 지난해 석탄 생산량이 중국에서 으뜸이었다. 탄광을 개발하면서 한족 업주들은 떼돈을 벌지만 초원은 쑥대밭이 되면서 몽고족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내몽고 탄광 내몽고 석탄 내몽고 노천탄광
그동안 네이멍구 자치구는 중국 5대 소수민족 자치구 가운데 가장 안정된 분위기를 유지했다. 몽고족 비율이 한족보다 그다지 많지 않고, 경제 성장이 빨랐기 때문이다. 한족과 소수민족간 큰 마찰도 없었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네이멍구 경제성장률은 연속 8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으뜸이었다. 지난해는 국내총생산(GDP)이 1조 위안(약 170조원)을 넘어 이른바 ‘GDP 1조 위안 클럽’에 가입했다.
하지만 네이멍구 초고속 경제성장은 소수민족 목축민들의 생존권을 희생하고, 초원 생태환경 파괴를 대가로 치렀다는 사실이 이번에 수면 위로 떠오른 셈이다. 주목할만한 대목은 이번 사건 발생 이후 해외에 망명하고 있는 몽고 독립세력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미국 뉴욕에 근거지를 둔 남몽고인권정보센터는 인터넷을 통해 몽골족들이 중국 당국에 항쟁을 벌이도록 독려하고 있다.
내몽고 초원
전세계 몽고 사람들이 각국 중국 대사관을 찾아가 항의를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위구르족 분리독립주의자들과 티베트(중국 공식 행정구역은 시짱 자치구)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만 두드러졌을 뿐 몽골 독립 운동은 이번에 처음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2월, 필자는 티베트에 지구온난화 취재를 간 적이 있다. 당시 루비처럼 빛나던 호수가 인상적이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티베트 사람들의 한족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었다.
현지에 있던 지인 소개로 가까스로 만난 2명의 티베트족은 한족들이 들어와 마구잡이로 신성한 호수와 산에서 금이나 광석을 캐내고 있다며 흥분했다. 원주민들이 신성스럽게 여기고 있는 자연이 돈에 눈이 먼 한족들의 횡포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 가슴아프다는 게 이들의 절규였다.
소수민족 문제는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다. 중국은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을 주축으로 위구르족, 티베트족, 몽고족, 조선족을 비롯해 모두 55개 소수민족, 그러니까 총 56개 민족으로 이뤄져 있다. 중국 공산당 정권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위구르족과 티베트족이다. 그리고 3번째로 걱정하는 것이 몽고족이다.
이들 3대 소수민족은 단순히 숫자가 많은 게 아니라 뒤에 배후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위구르족은 이슬람교를 믿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알 카에다가 후원자다. 티베트족은 인도에 망명한 달라이 라마가 후원자다. 몽고족은 독립국가인 몽골(중국 영토가 된 내몽고와 구별한다는 의미의 외몽고를 말한다)이 뒤에 버티고 있다.
이들 3대 소수민족은 2008년 8월 베이징 올림픽에 즈음해 수도인 베이징에 진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이들의 움직임에 중국 당국이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티베트족은 올림픽 개막을 앞둔 2008년 3월14일, 유혈시위를 일으켜 강제 진압된 바 있다. 위구르족은 2009년 7월5일 폭동을 일으켜 위구르족과 한족 200여명이 숨진 바 있다. 이번에 몽고족마저 들고 일어난 셈이다. 중국 당국은 위구르족 독립 세력과 티베트 족 독립세력에 몽고 독립세력까지 합쳐질 경우를 우려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강온 양면책으로 사태 수습을 서두르고 있다. 일단 한족 살인범들은 서둘러 재판에 회부해 사형판결을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의 탄광은 이미 문을 닫았다. 네이멍구 최고 지도자는 바로 ‘리틀 후진타오(호금도)’라는 이름이 붙은 후춘화(호춘화) 네이멍구 자치구 당서기다. 후춘화 서기는 시위가 번지자 동유럽 순방을 중단하고 급거 귀국했다. 그는 5월27일 사고가 난 시린궈러로 달려가 현지 학생, 교사들과 대화를 가졌다. 중앙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경제 지원도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후춘화 서기는 1963년생으로 올해 48세의 젊은 지도자다. 그는 2012년부터 2022년까지 중국을 이끌게 될 제5세대 중국 지도부의 핵심인 시진핑(습근평) 국가 부주석에 이어 2022년 이후 10년간을 책임질 제6세대 최고 지도자의 강력한 후보다. 후 서기는 베이징대 중문과 줄신으로 공청단 활동을 하면서 티베트에서 17년을 보냈다.
이후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지냈다. 후진타오 주석이 공청단 제1서기를 거쳐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를 지낸 것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이번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향후 후춘화 서기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짓게 될 전망이다. 후진타오 주석도 1988년 티베트 유혈 시위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덕분에 결국 국가 지도자로 발탁된 바 있다.
중국 당국의 재빠른 사태 수습으로 네이멍구 시위 국면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중국내 민족 갈등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한족들이 마구잡이 자원개발을 중단하지 않는 한 몽고족들의 분노와 반발을 잠재울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 갈등
중국의 민족갈등, 분리분쟁의 원인으로 종교를 제시할 수 있는데, 신장위구르지역은 이슬람교가 주요종교이다.
이슬람교-신장위구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하는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도 불린다.
이슬람교는 발생하고 나서 오래되지 않아 중국에 들어왔는데, 서기 652년 당 영휘(永徽) 2년 대식국(大食國)의 사절이 중국에 도착한 것을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도된 시.발로 여겨진다.
사실 651년 이전부터 아랍상인들이 중국에 와서 상인활동을 하였는데, 그들과 함께 이슬람교가 전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랍상인이 중국과 상인활동을 하는 데에는 육로와 해로를 사용하였다. 그 중 육로인 비단길은 페르시아(波斯)·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신강의 천산남북으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장안으로 이어졌다.
육로를 통해 무슬림(이슬람교도)은 중국에 일찍이 두 번에 걸쳐 들어왔다. 한 번은 당고종이 '안사의 난(安史之亂)'을 평정할 때 아라비아 등으로부터 병마 20여 만을 빌렸는데, 그 중 많은 사람이 중국에 남아서 후대에 번성하여 청진사(淸眞寺)?중국에서는 이슬람 사원을 청진사로 통칭함?를 세웠다. 또 한 번은 원대 칭기즈칸이 원정 후 돌아올 때 중앙아시아의 많은 무슬림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의 서북 각 지역에 거주하였다.
또 한 번은 서기 13세기에 칭기즈칸이 서역 정벌을 하면서, 이슬람교를 믿는 중앙아시아인,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이 몽골 군대에 의하여 대거 중국 서북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탐마적군’(探馬赤軍)에 편입되어, 변방을 지키거나 장인(匠人)이 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은 사람이 각급 관직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무슬림 상인들이 중국 내에서 장사를 하였다. 이처럼 중국에 들어온 무슬림을 회회(回回)라고 불렀는데, “원 왕조 시대에 회회가 천하에 고루 퍼졌다(元朝回回遍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후 송대에 이르기까지 아랍과 페르시아의 수많은 상인들이 중국에 지속적으로 와서 무역을 하였으며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기간 거류하는 과정에서 중국 여성과 결혼하여 중국 내에서 최초의 이슬람교 신자집단이 되었다. 송대에는 아랍이 부단히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이어 신강(新疆) 지역에 이슬람교를 전파하였으며, 서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역에 이슬람교가 전해졌다.
명대에 이르러 회족(回族), 위구르족(維吾爾族), 카자흐족(哈薩克族), 키르기즈족(柯爾克孜族), 우즈베크족(烏孜別克族), 타타르족(塔塔爾族), 타지크족(塔吉克族), 뚱샹족(東鄕族), 보안족(保安族) 및 싸라족(撒拉族) 등 10개 민족 모두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이슬람교 내부에는 양대 교파가 있는데, 하나가 수니파이고 다른 하나가 시아파이다. 정통파인 수니파의 내부에는 다시 4개 교파로 나누어지는데, 하나이페 교파, 싸페이 교파, 미리크 교파 및 파이한베리 교파이다. 중국 내 회족, 뚱샹족, 싸라족, 보안족 등 대다수 소수민족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는 수니파의 하나이페 교파에 속한다. 다만 타지크족은 원래 수니파에 속하였지만 후에 시아파로 전환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이스마일파에 속한다. 신강위구르자치구 내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민족 가운데 타타르족을 제외한 위구르족, 카자흐족 등 대다수 투르크계 소수민족 집단은 수니파에 속한다.
중국 내 이슬람교 신자를 율법의 엄격한 준수 여부에 따라 백산파(白山派) 무슬림과 흑산파(黑山派) 무슬림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먼저 백산파(白山派) 무슬림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종교 및 일상생활에서 엄숙한 생활을 하는데 주로 중국 서북지역에 거주하는 회족, 위구르족, 카자흐족, 타지크족, 타타르족, 키르키즈족 및 우즈베크족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슬람교의 3대 종교 명절은 개재절(開齋節), 희생절(犧牲節) 및 성기절(聖紀節)로서, 모든 이슬람교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이 명절들은 후에 이슬람교를 믿는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민족적 명절이 되었다. 현재도 신장위구르지역의 소수민족들은 3대 종교명절을 성대하게 지낸다. 또한 대체로 이슬람 교리에 따라 돼지고기 등을 먹는 것을 삼간다.
중국 소수민족..갈등 뿌리깊은 화약고
中, 56개 민족의 용광로?… 갈등 뿌리깊은 화약고!
중국 소수민족 몽골족의 자치구인 네이멍구(內蒙古)에서 5월 중순부터 몽골족의 항의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몽골족은 소수민족 중 한족과의 갈등이 깊지 않았던 민족이다. 이번 시위는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간의 조화와 협력이 중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 네이멍구와 신장, 티베트의 같고도 다른 점
중국에서 소수민족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주요 지역은 31개 성·시·자치구 가운데 면적이 1, 2, 3위인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시짱(西藏)자치구(티베트), 네이멍구 등 3곳이다. 한족과의 민족갈등, 차별 등이 주요 원인이지만 사태의 전개과정과 배경에서 차이가 있다.
2009년 7월 신장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위구르족들이 한족을 무차별 공격하는 유혈폭동이 발생했다. 이 사태로 192명이 숨지고 1721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우루무치 사태는 중국 소수민족 문제의 극단을 보여줬다. 겉보기엔 한족과 위구르족은 함께 평화롭게 산 것처럼 보이지만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동쪽으로 수천 km 떨어진 광둥(廣東) 성에 일하러 간 위구르족 젊은이들이 한족에게 습격당해 숨졌다는 유언비어가 도화선이었다. ‘한족이 조상의 터전에 침입해 경제적 혜택을 독점하면서 주인인 위구르족을 차별한다’는 ‘화약고’에 불이 붙자 무차별적 살육이 벌어졌다.
2008년 3월 티베트에서 발생한 유혈폭동은 조직적으로 독립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루무치 사태와 다르다. 승려들이 주도해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拉薩)에서 분리독립 시위가 발생했다. 중국 정부는 이를 무력 진압하면서 유혈충돌로 확대됐다. 이 사태로 18명이 숨지고 382명이 부상했다. 이번 네이멍구 사태는 한 유목민의 억울한 죽음이 도화선이 됐다. 현재까지 한족을 공격하는 등의 민족 간 갈등을 불러오는 사건이나 시위 조직은 생기지 않았다.
○ 자치구 핵심 요직은 한족 차지
중국은 인구의 다수(91.52%)를 차지하는 한족과 나머지(8.48%)를 차지하는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다. 인구는 적지만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은 중국 전체 면적의 64%에 이르며 이 지역에는 막대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다. 소수민족들은 중국 중앙세력의 팽창과 수축에 따라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거나 혹은 예속돼 왔다. 중국 공산당은 건국 이후 소수민족 지역에 군대를 보내 강제 병합했다.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펴고 있다. 소수민족 자녀에게는 대학에 들어갈 때 우대점수를 준다. 한족에게 엄격한 ‘1가구 1자녀 정책(계획생육)’도 소수민족은 예외다. 범죄를 처리할 때도 체포와 사형은 가급적 줄이고 관용을 먼저 베푼다는 ‘량사오이콴(兩少一寬)’ 정책을 시행해 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소수민족이 중국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조금씩 늘고 있다.
하지만 소수민족이 느끼는 피해의식과 상대적 박탈감은 뿌리가 깊다. 중국 최고 권력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 소수민족 출신은 한 사람도 없다. 또 소수민족 자치지역 행정기관에는 소수민족 임용 할당비율이 있지만 핵심 요직은 대부분 한족이 독점한다. 또 경제적 이익 역시 한족이 더 큰 몫을 차지한다.
중국 소수민족 이야기
중국인은 18세 되면 민족 선택권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 각 민족으로 이뤄진 통일적 다민족 국가다….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반대한다….” 중국 헌법 전문의 한 구절이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늘 56개 민족의 단합을 강조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도 중국 내 각 민족 의상을 입은 56명의 어린이가 오성홍기를 들고 입장해 민족 간 결속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것.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인구는 한족, 자원은 소수 민족에
1953년 중국의 제1차 인구센서스 때 등록된 민족 명칭은 무려 400여 개에 달했다. 이후 중국은 언어·지역·경제·문화의 공유 여부인 과학적 특징과 민족 단위로 존재하려는 민족 의지 등 두 가지 기준에 입각해 민족 식별작업을 펼쳤다. 민족 사업을 총괄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가 파견한 조사단은 79년 윈난(雲南)성에 사는 지눠(基諾)족을 단일민족으로 확인함으로써 모두 55개의 소수민족을 확정했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엔 73만여 명의 미식별 민족이 남아 있다.
가장 최근 이뤄진 2000년의 제5차 인구센서스를 보면 12억4261만 명의 전체 인구 중 소수민족은 1억449만 명으로 8.41%를 차지했다. 가장 많은 소수민족은 좡(壯)족으로 약 1618만 명. 2위는 만주족으로 약 1078만 명. 이어 먀오(苗)→위구르→투자(土家)족 순으로 연결되며 조선족은 약 192만 명으로 13위다. 가장 적은 뤄바(珞巴)족은 2965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수민족의 자치가 시행되는 지역은 전 중국 960만㎢ 가운데 616만㎢로 64%가 넘는다. 성(省)급 규모의 5개 자치구, 30개 자치주, 120개 자치현에서 민족 자치가 실현되고 있다. 전체 소수민족 중 자치구역 밖에서 한족과 어울려 사는 이들은 약 3000만 명에 달한다. 한편 자치구역은 2만2000㎞에 달하는 중국의 육지 국경선 가운데 90%인 1만9000㎞를 차지한다. 조선족과 몽골족, 러시아족 등 34개 소수민족이 이웃 국가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변계(邊界) 지역에서 살고 있다. 중국이 국가 통합과 국가안보전략 차원에서 소수민족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게다가 산림자원과 광물자원 등 주요 자연자원 대부분은 소수민족 자치구에 있다. 마오쩌둥은 1956년 “중국은 땅은 넓고 물산은 풍부하며 인구는 많다(地大物博 人口衆多)”고 했지만 사실 인구가 많은 건 한족이요, 땅 넓고 물산이 풍부한 건 소수민족의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수민족으로 대학간 뒤 한족 선택하기도
양징(楊晶)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은 지난해 말 민족 업무에서 “발전은 가장 중요한 일이며, 단결은 제일 직책”이라고 말했다. 중국 당국이 소수민족 정책과 관련해 ‘발전’과 ‘단결’을 양대 화두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대륙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민족자결론’을 주장했으나 현재는 중국이 56개 민족으로 구성돼 있다는 ‘중화민족론’을 내세우고 있다.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한 이후 중국은 민족자치, 경제적 혜택, 두 자녀 허용, 민족교육, 민족문화, 민족간부 육성 정책 등을 구사하며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단기적 공존과 장기적 융합을 꾀하고 있다. 문화적 민족주의는 허용하되 정치적 민족주의는 불허하는 중국의 민족 정책은 당(唐)대에 등장한 ‘기미(羈?)’ 정책이 그 뿌리다. 기(羈)는 군사적 수단과 정치적 압력을 이용해 변방을 통제하는 기술이고, 미(?)는 경제적·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는 것으로, ‘당근과 채찍’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민족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이다. 부모가 서로 다른 민족일 경우 18세 이전엔 부모가 상의해 아이의 민족을 정할 수 있다. 18세부터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 20세가 넘으면 원칙적으로 바꿀 수 없다. 단, 부모가 모두 소수민족인 사람이 외지에 나가 한족으로 잘못 기재했을 경우엔 변경이 가능하다. 부모 가운데 한 명이 한족이고 다른 한 명이 소수민족일 경우, 우선 소수민족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혜택을 받아 대학에 입학한 뒤 20세가 되기 전에 한족으로 변경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가능하다.
소수민족은 대학에 진학할 때 영어 대신 제2 외국어 선택이 가능하고 총점에서 10~15점의 가산점을 받는다. 소수민족은 또 산아제한 정책의 예외로 특례를 받는다. 부부당 두 자녀가 허용되고 민족자치구의 농촌 거주자는 3명 출산도 가능하다. 자치 지역의 행정장관과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로 선출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한편 민족 이름이 바뀐 경우도 있다. 33년에 걸친 민족 식별 과정에서 몇몇 소수민족은 아예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중국 남부지방에 넓게 분포하는 야오족은 왕조시대엔 삵이나 족제비를 뜻하는 ‘야오’족으로 불렸다. 49년 이후 사람을 뜻하는 ‘야오’족이 됐다가 다시 아름다운 구슬을 뜻하는 ‘야오’ 족으로 불리게 됐다. 야오족의 이름은 동물에서 사람을 거쳐 보물이 된 셈이다. 먀오(苗)족의 경우도 원래의 마오(猫)에서 ‘개’를 의미하는 앞의 부수가 생략됐다. 민족 식별 과정에서 894만 먀오족의 호칭이 동물에서 사람으로 ‘복권’된 것이다.
쓰촨성의 해발 2500m가 넘는 오지에 사는 이(彛)족은 19세기 말까지 한족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았다. 한족은 이들을 오랑캐 무리라며 이(夷)족으로 불렀다. 그러나 공산당이 국민당에 쫓겨 대장정에 나섰을 때 큰 도움을 줬고, 마오쩌둥은 신중국을 세운 뒤 이에 보답하고자 이들의 민족 명칭을 ‘이(夷)’에서 장중한 청동기 그릇을 뜻하는 ‘이(彛)’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