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자 전우용의 워메갈 관련 글

무명객혼돈 작성일 16.09.01 13: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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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에 '공기처럼 퍼져있는 성차별적 언어세계'를 '패륜적 언어'의 힘을 빌려 완전히 전복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facebook.com/wooyong.chun/p… 오전 5:48 - 2016년 8월 31일

 

https://www.facebook.com/wooyong.chun/posts/1165251396880481?notif_t=like?if_id=1472647578807421

해방 ? 한국전쟁기의 질병과 의료를 소재로 <현대인의 탄생>을 쓸 때,

사료에 있는 ‘전쟁미망인’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무척 고민했습니다.

 

‘미망인(未亡人)’이란 ‘죽어 마땅한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란 뜻이니까요.

유교 사회가 만들어낸 폭력적인 단어에 순위를 매긴다면, 이 단어가 분명 수위를 점할 겁니다.

 

‘전쟁과부’와 ‘전사자의 부인’을 생각해 봤는데, 후자는 ‘남편 잃고 혼자 아이 키우며 사는’이라는 느낌이 약했고,

전자는 ‘미망인’이라는 말보다 ‘과부’라는 말을 더 싫어하는 사회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실 과부(寡婦)라는 단어도 ‘결격 사유가 있는 부인’, 또는 ‘자격 없는 부인’이라는 뜻이니 미망인 못지않게 차별적이었고요.

결국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사료상의 기록’이라는 핑계로 그냥 ‘전쟁미망인’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남성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의 역사가 짧아도 수천 년에 달하다 보니 언어세계 자체가 남성 중심으로 구축되었습니다.

남성에게 포착되는 개념, 남성의 구분법, 곧 남성의 시선이 세계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기준이 된 거죠.

여성은 해석과 이해의 대상일 뿐 발언의 주체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당장 Man과 Woman, Male과 Female, 남(男)과 여(女)라는 단어와 글자에 이미 ‘차별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언어세계에서는 여성을 ‘남성의 상대’ 또는 ‘부속품’으로만 취급하는 성차별적 언어들이 횡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50여 년 간, 우리 사회는 이 영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진보를 이뤄왔습니다.

지금은 미스김, 이양, 박과부 같은 단어들을 공공연히 쓰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더불어 남존여비, 여필종부, 삼종지도 같은 것도 시대착오적인 단어가 됐습니다.

나이 80 넘은 사람들에게서나 겨우 들을 수 있는 ‘박물관 속의 단어들’이 된 거죠.

이런 단어들이 힘을 잃은 건, 주로 계몽과 일상적 항의 ? 기분 나쁜 표정 정도로도 충분한 ? 덕분이었습니다.

 

‘미망놈’, ‘남자과부(寡夫)’ ‘남필종녀’, ‘여존남비’ 같은 ‘미러링’ 단어들이 횡행했다면,

위의 단어들이 순순히 언어의 박물관으로 기어 들어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남자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가 언어세계에서만 성차별적인 양상을 보인 건 아닙니다.

물질세계 역시 성차별적으로 구축되었죠.

긴머리, 아이셰도우, 립스틱, 매니큐어, 브래지어, 왼쪽에 단추 달린 상의, 치마, 하이힐, 여자화장실 표지 등

여성에게 붙이는 식별표지와 부호 역시 ‘남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여성들은 자신에 관한 단어를 수용한 것처럼 이런 물체들도 수용했죠.

 

그런데 이런 물체들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명료히 인지하는 여성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이런 물체들에서 ‘성차별’과 ‘성적 대상화’를 읽지 못합니다.

그래서 몇몇 단어만 가지고 펄펄 뛰는 거죠.

 

언어세계와 물질세계 모두에서 ‘성차별’과 ‘성적 대상화’가 사라지고 완전히 ‘평등’해진 세상이 언제쯤 도래할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언어세계와 물질세계가 구축되는 데 수천 년이 걸렸던 만큼,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1920년대에 중국 페미니스트들이 ’브래지어 벗기 운동‘을 시도했습니다.

운동 주도자들은 이 운동에 동조하지 않는 여성들을 ’남성에 의해 강요된 여성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매한 여성‘

이라고 비난했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주변의 물체들과 일상적으로 관계 맺으면서 형성되는 이데올로기가 언어로 학습되는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무겁기

때문입니다.

 

메갈 워마드의 패륜적 담화 덕분에 우리 사회의 언어세계가 얼마나 성차별적인지 비로소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우리 사회의 물질세계가 얼마나 성차별적인지는 무엇으로 깨달을 건가요?

남자들에게 여자옷 입히는 것으로?

 

역사상 패륜이 ‘긍정적’ 변화를 이끈 적은 없습니다.

이 사회에 공기처럼 흩어져 있는 ‘성차별적 언어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성차별적 물질세계“도

무너뜨려야 합니다.

 

둘은 강력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사회화‘ 또는 ’여성화‘는 여자 옷을 입고, 여자답게 화장하며, 여자 신발을 신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이 일련의 행동 모두에 미소지니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저더러 ”대안도 없이 메갈 워마드를 비난하는 성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

이 일군의 물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 보세요.

 

여자옷, 여자신발, 여자화장품에 스며있는 미소지니를 분쇄할 대안을 찾아서 먼저 실천하고 알려주세요.

여성혐오적 언어세계와 물질세계 모두를 전복할 유일한 길이 ’패륜적 담론의 확산‘ 밖에 없다고 판단된다면,

누구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전우용@histop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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