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최고의 이론가 윤세주

무명객혼돈 작성일 16.09.02 13: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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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많은 친구이자 조선의열단을 함께 창단한 약산 김원봉은 석정 윤세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의열단 대표의 자격으로 다방으로 분주하면서 각종 문제에 대하여 접흡소통(接洽疏通)의 공작을 다하였고,

또 정확한 주장을 많이 발표하여 통일 성공에 대한 공헌이 컸다.”

 

이처럼 석정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인내심, 논리적 대하술, 정확한 상황 판단과 민첩한 대응력 등을 발휘함으로써,

지난한 과제로만 여겨지던 전신통일과 조직봉합이 성취되게끔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1930년대 해외 혁명전선통일운동의 향도요 조타수요 견인차적 존재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1942년 6월 요현(遼縣) 마전(麻田) 십자령전투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투중 사망하였는데

중국을 개방개혁으로 이끈 등소평도 이 전투에 참여했었고 윤세주부대로 인하여 죽음을 면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며 이를  중국정부에서도 인정 윤세주의 공로를 높이 사 묘비를 세워주었다. 

 

간략하게나마 그의 행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01년생인 그는 3살위인 약산과 동향이며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 부터 친하게 지냈다,

어릴적부터 함께해온 김원봉과 함께 학교에서 일장기를 쳐박는 등 항일 운동을 해왔고 ,

성인이 된후 국경을 넘어 김원봉가 같이 의열단의 일원이 되고 그와 평생을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지가 되었다.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에서 비밀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하고,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되었으나 그는 항일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밀양 지역 만세운동을 조직하여  19세로 나이였지만  윤치형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드러나, 

궐석재판에서 밀양 만세운동과 관련자들  가운데 가장 중형인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그후 이회영 형제가 세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그해 11월에 결성된 의열단에 단원이 되었다.

이후 단원 윤치형, 곽재기, 황상규, 이성우 등 수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인으로부터 폭탄을 구입한 뒤, 동지들과 폭탄과 무기의 국내반입 및 군자금모금, 폭파공작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이해 6월 즈음 거사를 위한 공작 도중 정보가 누설되어 윤세주와 그의 동료 50여명이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징역형을 선고받고 1927년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중외일보 기자, 경남주식회사 사장 등으로 독립운동의 뜻이 없는 듯 조용이 지내다

1932년 여름 경에 중국 난징으로 망명하였다.

 

그 해 11월 10일 윤세주는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함께  핵심 인사로 참가하여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

(韓國對日戰線 統一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37년 김원봉 등과 통일연맹을 모체로 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설하고 1938년에는 중국군과 제휴하여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조선의용대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였던 그는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였다.

 

1941년 4월에 윤세주는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 갔다.

조선의용를 조선의용으로 개칭하고 국민혁명군 8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42년 2월 일본군은 4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태행산을 공격하기 시작하다가 5월에는 20개 사단 40만 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때 조선의용군의 규모는 불과 3000~4000명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20개 사단 40만 명으로 태행산을 완전 포위한 후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 맹공세를 퍼부어 5월 29일

항일 연합군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군에게 전군의 탈출로를 확보해 탈출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

전 부대원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

 

작전개시 5시간 만에 마침나 탈출로를 확보하였으나, 윤세주는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선생을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

6월 3일 선생은 석굴에서 4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윤세주 열사의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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