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터키에 대해서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그 이유중 하나가 한국전 당시 미국과 영국다음으로 많은 1만 4천 936명의 병력을 파병했다는것.
한국전 참전 터키군 10명중 6명이 쿠르드족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한국전 참전당시 터키 병력은 반이 넘는 숫자가 "터키인"이 아니라 "쿠르드"족이였단 사실이다.
한국인들이 터키를 형제국가로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6`25전쟁 때 세 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견해서 피를 흘렸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터키가 보낸 군인 중 많은 군인이 쿠르드민족으로 이뤄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케말 압데
야비한 터키인들..
그의 이름은 ‘케말 압데’(터키식 이름은 케말 하이마제)이며 1932년생이다. 곧 그는 그의 아내가 들고 온 두 개의 한국전 참전 기념메달을 가슴에 달았다. 한국사람으로는 필자를 처음 대한다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렇게 잘산다는 한국에서 지금까지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면서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는 어렸을 때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단지 쿠르드어만 할 줄 알았지 터키말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18세가 되자 터키의 법에 따라 터키군에 징집될 수밖에 없었다.
“터키말은 한국에 가서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터키말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터키군에 징집한 터키정부를 맹렬히 비난했다.
“터키의 ‘볼루’시로 징집돼 군사훈련을 3개월 받다가 한국으로 보내졌다. 당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국전에 참전하는 데 동의하는지를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고 강제적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처음 한국에 보내질 때만 해도 우리 부대의 쿠르드 병사들은 거의 터키말을 할 줄 몰랐고 터키말은 한국에 주둔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는 놀라운 사실도 밝혔다. 케말과 함께 “거의 6천 명의 병사들이 보내졌는데 당시 대부분이 쿠르드 병사들이었고 10% 정도만 터키 병사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케말을 비롯한 쿠르드 병사들과 터키 병사들은 부산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훈련을 다시 받았다.
케말 압데와 그의 쿠르드 동료들은 1953년 초 한국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무렵 한국에 보내졌다.
당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상호 간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북한군이 내려와 부대 막사를 14동이나 불태웠던 침공이 있으면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쿠르드 병사들을 모질게 구박하던 중대장인 터키 장교를 죽이려고 모의를 한 사실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터키 장교의 이름인데 레샤프, 우리 쿠르드 병사들을 너무 모질게 구박해서 그를 죽일 모의까지 한 적 있었다. 중대원 100명 중 쿠르드 병사가 90명이었고 터키 병사는 10명이었다. 터키 장교는 우리 쿠르드 병사를 눈엣가시처럼 차별했고 우리의 분노는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갔다. 레샤프는 터키 병사들에게서 들었는지 이 사실을 알아채고 아예 부대를 이탈해 도망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일도 있었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는 한 번씩 "영등포, 서울, 부산"을 습관처럼 외쳤다.
케말이 겪었던 가장 힘들었던 일은 바로 터키말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었다. "당시 우리 부대에는 대부분의 병사가 쿠르드인들이었기 때문에 터키말을 배울 기회나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터키인 장교들은 우리가 터키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항상 구타와 고문을 일삼았고, 심지어는 우리의 머리를 밀어버리기까지 하는 처벌을 내려 우리를 매우 화나게 하였다."
그는 휴전이 성립되고 나서도 2년 더 주둔하다 1955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돌아올 때 터키군은 그의 손에 메달 두 개만 달랑 쥐여줬을 뿐 월급은 물론 아무런 포상도 없었다.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한국의 모습을 물었다.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하고 비위생적이어서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 주는 물조차 마시지 않았고, 도리어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빵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정말로 순박했고 마음이 따뜻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장례식 행렬에서 '아이고'라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회상을 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야스메 이세
야스메 이세(1932년생, 터키식 이름 야스메 비르단)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국으로 보내졌다. 터키 제2의 대도시 '이즈미르'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에 갑자기 한국으로 보내졌다.
당시 그는 8소대 소속으로, 소대원은 50명이었는데 21명이 쿠르드 병사들이었고 29명이 터키 병사들이었다.
한국에는 한국전이 끝나던 해인 1953년 초부터 1954년 초까지 1년을 주둔하다 돌아왔다.
야스메는 쿠르드의 시골 마을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양과 염소를 돌보는 일을 했고, 도시에 있는 학교까지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아예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당연히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터키말은 전혀 할 수 없었고, 터키어는 터키군에서 배울 수 있었다. 물론 터키 병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배웠지만, 터키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인 한국으로 가기 싫었지만 개인적으로 전혀 반항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의 여행은 길고 험난했다. "터키에서 한국으로 배를 타고 24일 동안 밤낮으로 항해한 후에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고 말했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의 한국은 너무 못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너무 가난해 군인들이 행진하는 길 양편에 늘어앉아 음식을 구걸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터키 빵을 '찹찹'이라고 부르면서 구걸했다는 것이다.
야스메가 투입됐던 한국전의 상황은 상당히 치열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획득하기 위한 전투는 상당히 격화된 상태였다. 야스메는 터키 여단이 휴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중공군과 치른 전투에 투입됐다.
야스메가 싸웠던 전투를 일명 '네바다 전투'라고 한다. 중공군은 터키 여단이 확보하고 있던 네바다 전초(前哨)를 1953년 5월 28일 야간에 2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공격하였다. 이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터키 여단은 다섯 번이나 '베가스' 고지를 점령당했으나 역습으로 다섯 번 다 그곳을 되찾았다.
그러나 네바다 전초 중에서 '카슨' 전초는 상실하였으며 '엘코' 전초는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여단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격전을 치렀으나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사단이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네바다 고지'에서의 철수를 승인함에 따라 여단은 이 전초에서 철수하였다. 야스메가 소속된 부대에서도 상당수의 전사자가 나왔다.
그는 죽지 않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지만, 그와 함께 싸웠던 부대원 중 많은 수가 죽어갔다. 이 얘기를 하면서 야스메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옛날 함께 싸우다 죽어갔던 쿠르드의 전우들이 생각나는지 눈에서는 이슬처럼 눈물이 맺혔다.
"당시에 무엇보다도 나를 화나게 했던 일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우리 병사들의 월급을 한 달에 80달러로 알고 있었는데 다 떼어먹고 5달러만 지급했다. 당연히 나머지 75달러는 터키군 지휘관들이나 장교들이 모두 도둑질해 먹었다"고 언성을 높였다. 당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고 월급마저 뺏긴 일은 팔순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는지 이 얘기를 할 때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한국 사람들에게...
"제발, 우리 쿠르드민족의 피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부탁을 드린다. 난 지금도 한국의 어디에서 싸웠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수많은 쿠르드 친구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해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금 발전하게 된 초석에는 우리 쿠르드 민족의 피도 함께 배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터키는 역사적으로 이웃나라에서 대학살을 저지르고 그리스의 혈통까지 바꿔벌릴 정도로 악랄한 국가임
이런 나라가 멀고 먼, 작은 나라를 도와주려 자국인들을 희생 시킬 이유는 없음.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45/read/19624905
요약
1. 한국전 참전결정은 터키가 내렸지만, 정작 피흘려 싸운건 핍박 받던 쿠르드족 이었음.
2. 터키는 참전한 쿠르드족들에게 차별과 뭘급까지 가로챘음
3.터키 생색내기
터키가 아시아에서 제일먼저 수교맺은나라가 일본.
150년전 일본이 태풍때문에 표류중인 터키상선을 도와준 계기로 양국우호탑 세움.
그외 걸프전 터졌을때 중동에서 고립되있던 일본교민들을 터키군대가 자국비행기로 실어날라주면서 양국관계는 더욱더 친해짐
터키가 아시아에서 제일먼저 수교맺은나라가 일본.
150년전 일본이 태풍때문에 표류중인 터키상선을 도와준 계기로 양국우호탑 세움.
그외 걸프전 터졌을때 중동에서 고립되있던 일본교민들을 터키군대가 자국비행기로 실어날라주면서 양국관계는 더욱더 친해짐
2013년도에 터키에 수십조원짜리 원자력발전소 지어주는 사업권을
한국, 캐나다, 미국 거르고 일본한테 줌 ㄷㄷㄷㄷ (후쿠시마문제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ㄷㄷ 이건 일본에서도 놀램 ㅋㅋ)
한국도 존나 로비질했는데 쌩 ㅋㅋㅋ
심지어 터키는 한국이 t-50 고등훈련기 좀 사달라고 하니까 쌩까고, 이탈리아제 훈련기 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형제국은 무슨 니미........
출처: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yy=2015#axzz3Wc091f16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69&yy=2015#axzz3Wc091f16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042&yy=2015#axzz3WcZqPVaG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333&yy=2015#axzz3WcZqPV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