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광주항쟁-6월항쟁의 역사
[프레시안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현직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권총 살해한 10.26사건은 역사 상 어떤 자리매김을 받을까.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의리와 배신, 권력경쟁과 충동적 행동, 정국대처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대립, 망상적 사명감과 소영웅심…. 지금까지 10.26 김재규 거사에 대해 이런 평가들이 유행어처럼 전파돼 왔다.
그런
평가들은 10.26사건과 김재규에 대해 맨 먼저 재단했던 당시의 전두환 합수부가 발표한 수사결과에 주로 의존한 결과다. 김재규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경쟁에서 밀리고 박정희의 신임을 잃으니까 욱하는 충동적 성미에 일을 저질렀다는 수사 발표였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은
이유는 당시 선명야당 노선의 신민당 지도부와 부산마산 시민항쟁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학계나 언론계 일각에서 10.26을
집권세력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 대립과 갈등이 표면화한 것이라고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김재규 중정의'큰 영애와 최태민 내사보고서'박정희의 역린 건드려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불과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10.26사건의 원인에 대해 지금도 웬만한 학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집권층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권력투쟁을 꼽는 것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갇힌 결과다. 무엇보다도 전두환 합수부는 훗날 대법원이 판결한 내란집단과
동질적 조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수사결과 발표란 실체적 진실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강경파에 밀린 온건파로서의 김재규가 아니라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한 절대권력에 대한 국가위기 관리자로서 예방조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10.26사건의 원인은 당시 상황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면밀히 분석해야 실증과학적인 역사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는 물론 극단적 반민주체제인 유신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으로부터의 저항과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압력이 크게 폭발한 것을 들어야 한다. 직접적으로 부마항쟁이 큰 원인이었다.
둘째,
당시 유신독재정권의 대국민 인권탄압에 대해 도덕적 근본주의와도 같은 노선을 내세운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강력한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했으나
박정희가 반발함으로써 조성된 한미관계의 파국이 또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미국놈들 갈테면 가라고 해"라고 내뱉었다면서
이에 크게 충격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경력을 보면 보안사령관- 군단장-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장관을 거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보기 드문
국가안보주의자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미국이 등을 돌리면 "한국은 태평양 상의 일엽편주와도 같이 위태로워진다"고 군사법정 진술을 통해
강조했다.
셋째, 위의 두 가지 사실만으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확인사살'까지 한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거기엔 바깥의
제3자가 알기 어려운 박정희와 김재규 사이의 인간적 감성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 김재규 변호인단에 참여한 강신옥, 안동일
변호사들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절대권력자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에 대해 직접 그것을 뒷받침해 왔던 중앙정보부 간부들의 실망감과 인간적 환멸
때문에 김재규의 야수성이 폭발했다는 보아야 한다.
10.26이라는 역사적으로 희귀한 사건의 배경에는 이 같은 3대 원인이 작용했으며
여기서 비로소 설득력 있는 설명이 가능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 중 사생활 문제에 대해서 는 학계 인사들이 별반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10.26사건에 대한 군사법정의 신문과 진술 내용은 비밀재판까지 이미 녹취록으로 출판된 바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1차자료에 속한다.
그런데도 사생활이라는 이유로, 또 남자의 허리 아래 이야기는 역사 평가와 관련 없는 뒷얘기일 뿐이라는 고루한 생각 때문에 소홀히 취급돼 왔다.
그러나 대통령이 국가기관에 전담인력을 두고 권력을 이용해서 외부 여인을 데려다 술자리를 빈번하게 가진 것은 결코 사생활로 가려질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대통령의 권력 행위에 속하며 따라서 사생활이라는 이유로 덮어 두면 안된다. 더구나 10.26 사건도 외부에서 온 두 여인이 동석한
술자리에서 부마항쟁과 이른바 야당 공작을 얘기하다가 터진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주의와 박정희 각하는 양립할 수
없어"
10.26은 정당방위"다수 국민 희생 막기 위해 한 사람 죽였다"
당시 태풍전야와도 같은 민심 이반과 전국의
시위 동향에 대한 대책에서 차지철은 무자비한 진압을 주장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즈가 1975~79년 사이 3백만명을 학살한 것을
인용하면서 "우리도 한 1,2백만 쯤 싹 쓸어버리면 문제없다"고 내 뱉었다. 어쩌면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라기보다는 박정희의 복심을 헤아리고
그것에 추종한 결과였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는 그런 강경책에 반대해 왔고 10.26 현장에서 차지철의 그 말을 듣고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시 폭발한 부산마산 시민항쟁이 불순세력과 야당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차지철 등 강경파의 주장과 강압적 진압대책에 극력
반대했다. 그는 부마 시위사태가 유신독재 체제 때문으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불순세력과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이 아니라 일반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보고했다. 김재규는 유신체제를 완화해서 민심을 달래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다.
이에 박정희는 김재규에 대해
"김영삼을 구속하랬더니 유약한 중앙정보부가 야당 공작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시국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며 질책했다. 전두환 합수부는 이런
정황을 권력투쟁에서 밀렸다고 했다. 그래서 상관이며 은인인 박정희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박정희 신봉자들이
믿어왔고 그렇게 믿고 싶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김재규 거사의 정당성을 은폐하기 위해 조작된 수사 결과였다. 김재규가 거사 당일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던졌다고 합수부가 발표해서 세간에 회자된 "형님, 나는 한다면 합니다"라는 말도 지어낸 각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
인정신문에서 "나는 그런 식의 말을 쓰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 진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이
일어나니까 하야했지만 박정희 각하는 결코 물러날 줄 모르는 분이다"면서 "자유민주주의와 각하는 양립이 불가능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희생될지 모르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그는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각하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비록 그가 법정에 선 피고인으로서 사후 변명을 전혀 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도 이 대목은 틀린 말이 아니다. 부마항쟁에 대한 계엄령 선포와
그로부터 불과 7개월 뒤에 일어난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살상진압을 보더라도 그렇다. 10.26은 독재권력으로부터 다수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 성격이 있었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10.26으로 유신체제 종식되지 않고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이어져
전두환의 하나회 내란집단 12.12와 5.17광주학살로 잔악한 복고반동
그러나 김재규의 그런 거사
목적은 박정희 친위대인 전두환 하나회 집단의 12.12 군사반란과 5.17 광주학살로 실패하고 말았다. 혁명의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복고반동
그것이었다. 여기서 1인중심 유신체제가 10.26 거사에 의해 박정희가 제거됨으로써 종식됐다는 일부의 평가는 옳지 않다는 근거가 드러난다.
유신체제는 10.26으로 종말을 고하기는커녕 더욱 잔악한 5.17 내란을 거쳐 친위대 전두환 노태우 등의 하나회집단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유신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였다.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한 계기는 1987년 6월
시민항쟁이었다. 당시 전두환 5공 정권은 시민항쟁을 강압적으로 진압할만한 군대와 경찰력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6.29 항복
선언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당시의 민중적 힘도 작게 평가할 수 없지만, 보다 큰 배경은 그들이 겪은 광주항쟁의 살상진압이라는
'악몽'이었다. 제아무리 '인간 성악설'을 생각하게 하는 내란정권이었지만 그들이 또 한 번의 그런 살상진압책을 검토할 수는 없었다. 광주항쟁은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좌절했지만 훗날 6월항쟁 때 내란정권을 결국 굴복하게 만든 역사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유신체제의 종식을 분석할 때는 이처럼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시민항쟁을 연계해서 역사적 상관관계에 바탕해야 할
것이다.
10.26의 두 번째 원인으로 민주헌정을 복원하라는 미국 쪽의 압력은 직접적인 박정희 살해 지령설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 밝혀진 근거가 없다. 당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에 걸맞게 유달리 인권과 도덕을 대외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카터의 그런 기준에서 볼 때 박정희 유신독재는 당연히 방관할 수 없는 '악의 축'이었다. 미국의 언론들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9년 봄, 미국의 영향력 있는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는 박정희 독재에 대해 한국 군부 내에 미묘한 저항 움직임이
있다는 관측을 보도했다. 이런 기사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검은 먹칠로 칠해지거나 아예 절단된 뒤 잡지의 국내 배포가 가능했다. 그러나 뜻 있는
사람들은 전국 곳곳의 미국문화원 도서실에 비치돼 있는 잡지의 원본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기사는 사실 근거가 약했지만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라는
메시지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미국의 분위기가 김재규에게 상당한 시사를 던져주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김재규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된 뒤 얼마 지나서 교도관들에게 "미국 쪽에서 무슨 소식 없느냐"고 두어 번 물었다.
이것도 10.26에 대한 미국 관련설의 한 배경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80년 5월24일 김재규가 처형될 때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구원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카터 행정부의 정책으로 보더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개입할 가능성은 작지 않았다. 전두환 내란집단은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두었는지 김재규를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재빨리도 사형 집행시키고 말았다. 5월21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지 불과 사흘만이었다. 당시는
광주항쟁이 진행 중이었다. 단순 살인이 아니라 명분 있는 정치범이며 양심범으로서 김재규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인권단체들에서 구출운동이 벌어질 것을
두려워 한 내란정권에 의해 보복적으로 처형된 것이다.
박정희 뒤통수 정조준해 확인사살한 김재규의 비정한 행동 배경
사생활
타락으로 인간적 환멸감과 정상적 판단력을 의심한 때문
10.26사건에서 풀기 어려운 의문은 김재규가 동향 선배로 군 출신 상관이었으며 자신을 중용해 온 은인인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점이다. 김재규가 군사법정에서 국민의 요구인 민주회복과 국가안보상 한미관계가 중요하다고 역설했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 관계의 파탄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더구나 김재규는 10.26 사건의 현장검증에서 박정희의 머리 뒤통수를 정조준해 확인사살하는 장면을 재연한다.
10월26일
저녁, 궁정동 비밀연회장 참석자는 박정희 김재규 김계원 차지철과 외부에서 데려 온 두 여인이었다. 여기서 김재규는 먼저 차지철을 향해 쏘았다.
차지철은 팔에 관통상을 입고 화장실로 피신한다. 김재규는 다음으로 박정희에게 첫 발을 쏘았다. 박정희는 가슴을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김재규가 2차로 권총 방아쇠를 당겼으나 철컥 소리만 들리며 불발, 총은 고장이었다. 밖으로 나간 김재규는 연회장 앞 뜰에 서 있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의 권총을 손에 잡았다. 방안으로 돌아 온 김재규는 한 여인의 무릎에 상반신을 눕히고 있는 박정희 곁으로 다가가 머리 뒤통수에
권총을 정조준했다. 여인은 기겁을 하며 밖으로 튀어 나갔고 김재규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런 확인사살만 안했어도 박정희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재규의 그런 비정한 행동은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증오와 환멸감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환멸감은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그의 사생활, 술과 여자를 조달해 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의전과장 박선호가 가질 수 있는 비밀이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정치학적 금언처럼 박정희의 사생활 타락상은 도를 넘은지 오래였다. 궁정동 비밀연회장을 관리한 중앙정보부 사무관
남효주도 10.26 당일 저녁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한다"고 다른 직원과 대화했음이 군사법정에서 알려졌다.
대통령의 채홍사로 불린 박선호는 군사재판 진술에서 "외부에서 여인들을 데려다 술자리를 갖는 대행사 소행사를 한달이면 열 번
한다"면서 "이 때문에 나는 일년 내내 휴일도 없고 쉬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법정에서 변호인의 질문에 "궁정동에 왔다 간 여인들은
지금 시내에서 일류로 활동하는 연예인들로 내가 밝히면 시끄러워 질 것이고 해서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 말한다"고 답변했다. 당시 강신옥
변호사는 역대 의전과장들과 궁정동 술자리 행사 주변 얘기들을 취재하면서 박선호와 면담을 통해 박정희의 술과 여자 문제를 처음으로 재판과정에서
공개했다.
궁정동에 온 여인들은 단순히 술 시중만 든 것이 아니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박정희는 좌우에 앉은 두 여인 중 어느 한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그날 밤 잠자리 시중을 들게 되는 낙점이었다. 이런 그의 사생활타락은 1974년8월 육영수 여사가 사거했기 때문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인간적 변호도 있다. 그러나 궁정동 비밀연회장의 대행사 소행사는 육영수 생전에 청와대 경호실이 맡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일을
청와대가 하는 것으로 국민에게 알려지면 큰일이라면서 외부에 완전히 가려진 중앙정보부로 넘겼다는 진술이 군사법정에서
공개됐다.
김재규는 그렇게 술과 여자에 빠진 박정희가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또 그 옆에서 시국대응책을 강경 일변도로
주입시키는 차지철 때문에 큰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10.26 사건은 이렇게 복합적인 배경 아래 거사된
것이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