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그룹 창립자 이야기

재지팩트 작성일 16.12.11 22: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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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보생명, 교보증권, 교보문고 등의 금융중심기업집단 교보그룹을 탄생시킨 고 신용호는 전남 영암군에서 탄생.

당시 이 지역의 거창 신씨 집안은 일제시대 알아주는 독립운동가 집안이었음.특히 신용호의 아버지 신예범은 호남 지방을 돌며 일본인 지주들에게 항의하는 소작쟁의를 주도했던 인물로, 그의 네 아들들 중 너무 어렸던 막내 동생을 제외한 형제 전원이 독립운동에 투신할 정도로 유서 깊은 명문가.
첫 째 아들 신용국은 호남지방의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옥고를 치르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떠돌던 독립투사였고,둘 째 아들 신용율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였으나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잡혀 고초를 겪었고,셋 째 아들 신용원은 음악가였는데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노래 <우미유카바>를 부르지 않아 일본경찰에게 고문을 당하는 등 힘겹게 항일 음악가로 활동, 그리고 넷 째 아들이 바로 교보그룹을 탄생시킨 신용호였음. 이 정도면 최소 라이언 일병급...
2) 때문에 남편과 아들들의 위험한 독립운동을 봐야했던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늘 집안에 일제 형사들이 드나들며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위협.이에 신용호는 "나라도 어머니를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며 사업을 하러 베이징으로 떠나지만, 그 곳에서 우연히 이육사 시인과 친분을 맺게되며 결국 베이징에서 또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ㅠ
온 가족이 독립운동밖에 모르는 바보..
3) 그러다 광복을 맞이하게 되고,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던 신용호는 자원이 없는 땅덩어리에서는 인재가 희망이라는생각에 전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 이러한 개념은 오늘 날까지도 신선한 시도로 평가되며 신용호는 1983년 국제보험회의로부터 세계보험대상을 수상, '세계 보험인의 스승'이라는 칭호를 얻게 됨.
당시 신용호는 전국의 시골을 돌아다니며 '당신이 오늘 담배 한 갑을 안피우고 그 돈을 저희에게 맡겨두시면, 몇 년 후에 댁의 자식들은 모두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이오'라며 사람들을 설득했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게 됨.
4) 그리고 사업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드디어 1979년 종로 1번지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상징적인 땅덩어리에 교보빌딩이 세워지게 됨. 그런데 이때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이 22층 이상의 높은 건물은 청와대의 보안에 위협이 될 수 있으니 17층 이하로 잘라내라며 압박을 가함. 이미 뼈대가 모두 세워진 상황에서 그 이야기는 모두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지으라는 이야기. 이에 신용호 창립자는 박정희에게 직접 "건물을 잘라야한다면 차라리 광화문 한 복판에서 내 배를 직접 가르겠소"라는 편지를 보냄. 당시 시대 분위기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ㅎㄷㄷ한 강단이었고, 박정희 또한 그 기세에 감복하여 건물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말라고 차지철에게 지시. 
5) 당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이 금싸라기같은 건물 1층에 어떤 점포를 열까였음.하지만 신용호는 직원들의 사업 아이디어를 모두 물르고 "서울을 대표하는 서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엉뚱하게'교보문고'를 세움. 그리하여 1981년 6월 1일, 단일면적 8,930제곱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서점이 들어서게 되고이는 단일면적으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서점이었음.우스갯소리로 만약 이때 교보그룹이 이 곳에 서점이 아닌 다른 사업을 했다면 재계순위가 뒤바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정도(현재 생보업계 빅3는 자산총계 및 매출액 기준으로 삼성, 한화, 교보 순).
실제 교보문고는 매출로는 약 5천억원으로 업계 1위이지만, 순익은 꾸준하게 마이너스인 상황.교보문고 자체에서 발생하는 도서 매출이 많지 않고 대부분 시민들이 책을 읽거나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활용되기 때문에오히려 시설 및 도서 훼손으로 인한 적자가 엄청남. 하지만 교보그룹은 오히려 5만년 된 카우리 소나무로 만든 책상(책상 제작부터 운송까지만 무려 5억원이 들었다고)과 소파를 비치하고 시민들의 무료 독서를 권장할 정도로 대인배 영업을 하고 있음.
6) 사실 교보그룹 내에서 교보문고는 굉장한 골칫거리. 
교보그룹 교보생명은 또한 교보그룹은 이전부터 꾸준하게 우리은행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데,번번하게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금산분리법(제조업 또는 서비스업을 하는 회사가 은행 소유 불가능)때문.마이너스 매출의 교보문고때문에 은행 인수에도 제동이 걸리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그룹이 교보문고를 매각하지 않고 계속 운영하는 것은, 시민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신용호 창립자의 유언때문에 사회공헌차원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 신용호는 교보문고 개업 당시 다음 다섯 가지의 당부 사항을 직접 직원들에게 신신당부함.
"초등학생에게도 존댓말을 쓸 것.""책을 한 곳에 오래 서서 읽는 것을 절대 말리지 말고 그냥 둘 것.""이것저것 책을 빼서 보기만 하고 사지는 않더라도 절대 눈총을 주지 말 것.""점포에 앉아서 노트에 책을 베끼더라도 내버려 둘 것.""책을 훔쳐가더라도 도둑 취급하여 망신을 주지 말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데리고 가 좋은 말로 타이를 것."
(때문에 그 시절에는 교보문고에서 책 훔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1997년 말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 관계자가 우연히 교보문고의 광화문 지점에 들렀다가 많은 젊은이들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이 나라는 분명히 다시 일어난다”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는 교보그룹 임직원들의 자랑거리 중 하나.
7) 현재 그룹사 회장인 신창재는 신용호 창립자의 첫째 아들로, 본래는 의대를 졸업한 산부인과 교수. 그룹 경영을 맡지 않겠다며 거부했으나 신용호 창립자가 암에 걸리면서 마음을 바꾸게 됨. 현재 신창재 회장 오너 일가는 일절 경영에 관리하지 않으며 부인과 두 아들 모두 그룹에 단 한 주의 지분도 가지고 있지 않음. 신창재 회장의 부인 박지영씨 또한 이화여대 교직원으로 10년째 근무하고 있는 평범한 주부로 대외노출을 극히 꺼리며 재계 30위의 그룹사임에도 불구하고 타 기업과 혼인 경영 등의 행사를 일체 꺼리고 있어, 족벌경영이 관례화 된 대한민국에서는 상당히 보기 힘든 윤리 경영을 보여주고 있음.
8) 또한 신용호 창립자는 2003년 타계하면서 상속세 1천 3백 38억을 단 한 푼도 빼돌리지 않고 모두 고스란히 납부하여, 국내 유가족 상속세로는 현재까지 깨어지지 않는 기록을 가지고 있음. 국내 재벌 문화에서는 굉장히 희귀한 사례. 심지어 신용호 창립자의 개인 현금 자산이 이를 미치지 못하기에 주식 및 현물로 신고하였으며 당국은 이를 허용, 때문에 정부 산하 기관이 소유한 교보그룹 주식이 상당한 상황.
독립운동은 물론 기업의 사회공헌이념을 확립한 대표적인 기업인으로서 신용호의 일생은 한 번쯤 알아두면 좋을 듯.대한민국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축으로 기능했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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