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한 장수 TOP5

내고자들 작성일 16.12.24 19: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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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정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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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는 조선의 조자룡이라고 불린 정기룡 장수 입니다.

 

 

정기룡은 1562년 명종 17년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에서 증좌찬성 정호(鄭浩)의 아들로 태어났다.1580년 선조 13년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선조의 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1590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서 일하였고, 다음 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거창 전투에서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금산 전투에서 정기룡의 직속상관인 조경을 필마 단기로 뛰어들어 구출하였는데이 모습이 마치 당양 장판에서 아두 유선을 구하려고 뛰어든 조운과 흡사하여'임진왜란의 조자룡'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이후 곤양의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어어 상주목사 김해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이 되어 상주성을 성공리에 탈환하고,계속하여 여러 공을 세우게 되어 '바다의 이순신과 육지의 정기룡' 이라는 말도 생겨났다.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에 승진되었고, 그 해 왜적에게 왕자를 내준 반역자 김수량 등 16인을 효수하였다.1594년에는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또한 제2차 조일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정유재란 때에 고령에서 적 장수를 생포하고병마절도사가 되고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는데에 성공한다.광해군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와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오른다.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재직 중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4위. 이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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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는 금강야차 이의민 입니다. 소금장수 아들로 태어나서 왕을 꿈꾼 장수죠.

수박깨기를 워낙 잘해 의종이 아꼈다고 합니다.

맨손으로 사람 척추를 부러트렸다고 할 정도로 힘이 장사였습니다. 

 

 

당시 경대승 다음으로 최고 권력을 잡아봤던 괴력의 장수입니다.

성격이 무척 포악하다고 합니다.

실제 역사기록에는 조위총의 난때 적장 김보당의 군사들 300명을 참수시키고, 

그와중에 화살에 눈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돌진해서 적들을 박살내버립니다.

그다음 바로 전투때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고요.

최충헌이 동생 최충수랑 수백명 군사로 기습해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3위.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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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 입니다.  

 


이성계는 1361년 홍건적에 의해 개경이 함락되었을때

사병 2000명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가하여 최초입성 하였습니다. 

또한 원에서 파견한 나하추, 덕흥군, 최유의 침입을 모두 격퇴하여 90년간 이어온 원의 고려지배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함주,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했습니다.

특히 황산전투에서는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의 끈을 맞춰 투구를 떨어뜨린 후 활로 쏘아 죽이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30년동안 단 한번도 패배 하지 않은 장수입니다.


대충 기록들을 살펴보면..


1361- 독로강 만호 박의의 난 제압

1362- 나하추 격퇴

1364- 덕흥군과 최유의 군대 격파

                   1377 - 지리산에서 왜구 격파,서해도에서 왜구 격파          
1378- 승천부 전투에서 왜구 격파       

1380- 황산대첩


등등..거의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병사들 상대로 이긴 전투가 많습니다.  



 

 

 

 

 

2위.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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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는 고구려 최후의 맹장 연개소문 입니다.


 

고당전쟁 당시, 한족에서 가장 강한 장수들이었다던 방효태와 그의 열 셋 아들들이 고구려로 쳐들어왔을 때,

50세가 넘은 고령의 나이로 날려나가 열 셋의 아들들 중 세 명을 담숨에 베어버렸습니다.

비술과 창술은 그야말로 신기라 불렸습니다.

한족 역사에 보면 송나라 황제는 신하에게 

"당태종은 성군이었으면서 왜 고구려를 멸망 시키지 못하였느냐?"

라고 말합니다. 신하는 " 연개소문이라는 비상한 자가 있었기때문입니다"

말할정도로 중국역사속에서 연개소문의 위상은 대단합니다.


기록들을 보면..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명나라 장편희곡“설인귀해정동백포기”에서 연개소문이 당나라 황제에게 호령합니다. 사수 대첩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을 상대로 한 제2차 고당전에서 나온 전투.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660년)여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쳐들어갑니다.


662년 1월23일 연개소문은 방심하고 있는 사수에서  당시 당나라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와 그 아들 13명을 포함 전군 10만을 몰살시킵니다. 당시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고 있었으나 폭설과 사수에서의 대패로 황급히 물러가게 됩니다. 당고종도 아버지 당태종의 말을 듣지 않고 고구려를 침입한 것을 침입한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 645년 당태종의 침입에서도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은 안시성의 혈전으로 당군을 격퇴시키고 당태종을 뒤?i아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지역 깊숙이 쳐 들어갔습니다.  북경시 순의현의 고려영 유적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연개소문이 얼마나 한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가는 아직도 남아 있는 중국의 경극과 희곡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극에서 그는 포악함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영웅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경극 속에서 그는 신기에 가까운 무공을 지니고서 중국 당태종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우선 그는 커다란 칼을 포함해, 등에 4개의 칼을 더 차고 있다. 이것은 옛날 연개소문이 온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는 기록에서 온 것 같은데, 

다섯 자루의 칼이 그저 단순히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투용이었다면, 

'비도' 즉 '날아다니는 칼'이라는 그 이름을 본다면, 틀림없이 고구려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던져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 독특한 검술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그의 등에는 4자루의 칼과 함께,  깃발을 메고 있다. 이것은 중국 경극에서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인물을 나타낼 때 쓰는 상징이다. 그가 한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 즉 고구려인임을 암시한다.그는 희한하게 청룡이 장식된 옷을 입고 있다.


한족들은 그를 '청룡'이란 신비한 짐승에 빗대어 말할 정도로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 다고 합니다.

 

 

 

 

 

 

 

 

1위. 척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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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는 척준경입니다.


위 4명의 장수와 다른점은 척준경은 한족왜구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중국역사서에 따르면 " 한족 10명이 고려인 1명이고 고려인 10명이 여진족 1명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진족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었습니다.

실제로 여진족은 가볍게 중국 북송과 거란의 요나라를 쉽게 멸망 시켜버리죠.

금나라가 세워지기전 고려와 여진족은 수없이 많은 전투를 뤘습니다.

후에 금나라가 세워지고 북송,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드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척준경 때문 이었습니다.

여진족 역사 기록에는 "척준경에게는 졌지만 고려에게는 이겼다"

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여진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국경선까지 남진한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임간을 파견했다가 
임간이 대패하여 군진이 무너졌을 때 당시 중추원별가였던

척준경이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여진 선봉장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힌 고려군 200명을 빼앗아 왔다.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이 석성에 웅거하여 별무반의 앞길을 가로막자

윤관이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부관이었던 척준경이 이르기를

 ' 신에게 보졸의 갑옷과 방패하나만 주시면 성문을 열어 보겠나이다 ' 라고 호언하였다. 

척준경이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성벽으로 올라가 추장과 장군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성문을 열어 고려군이 성을 함락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협곡을 지나다가 5만에 달하는 여진족의 기습에 
고려군이 다 무너져 겨우 1000여 명만 남았고, 오연총도 화살에 맞아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 
척준경이 즉시 10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에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이 이르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으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사내의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라고 소리치며 우뢰와같은 기합과 함께 100여기의 기병과 여진족의 후미를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은 단숨에 여진족 부관 10여명을 참살하고 적장을 활로 쏘아 거꾸러 뜨렸다. 
척준경과 10명의 용사들이 분투하여 최홍정과 이관진이 구원하고 윤관은 목숨을 건졌다. 



여진족 보병과 기병 2만 영주성 남쪽에 나타나 고려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윤관과 임언이 방어만 하려고 하자, 척준경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만일 출전하지 않고 있다가 적병은 날로 증가하고 성안의 양식은 다하여 원군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찌합니까. 공들은 지난 날의 승첩을 보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또 죽음을 힘을 다하여 싸울터이니 청컨데 공들은 성 위에서 보고 계십시오." 
척준경이 결사대 100기를 이끌고 성을 나가 분전하여 적의 선봉장을 참살하고 적들을 
패주시켰다. 

척준경이 방어하고 있던 성이 포위되고 군량이 다해가자 지휘를 부관에게 맞기고 
척준경은 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사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원군을 부르고 당도하여 원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던 여진족들을 격파하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울면서 척준경을 환호 했다.


 이자겸이 인종을 시해하려 수백의 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편으로는 인종이 달아날것을 우려하여

자객 다섯명을 어전(왕의 거처)으로 미리 보내었다.


 어전 내부는 유혈이 낭자하여 내시와 궁녀들이 살해당하였다.

자객들이 인종에게 다가가려 하자

왕을 모시는 상선(내시 우두머리)이 두 팔을 벌려 자객들을 가로막고 버티었다.

이에 자객 우두머리 주충이 일시에 상선의 목을 잘라버리니

이제 어전에는 인종과 사관밖에 남지않았다.

 

자객들이 인종을 시해하려 에워싸려 하자 인종은 대경실색하여 문밖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 순간 어전문이 통째로 박살나며

한 거구가 손에 피묻은 거대한 태도를 든 채로 숨을 가쁘게 쉬며 들어섰다.

거구는 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인종을 향해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폐하! 신 척준경이 왔사옵니다! "


척준경의 갑옷은 이미 한차례 전투를 벌였는지 넝마가 되어있었고,

투구는 고사하고상투가 잘려 봉두난발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마치 그 모습이 조조의 장수 악래 전위가 현신한 듯 하여 자객들과 주충은 감히 먼저 공격하지 못했다.

 

척준경은 즉시 인종을 등 뒤로 숨기고 자객들에게 달려들어

두명을 베어넘기고 삽시간에 나머지 세명 모두 죽이고 인종을 구하였다14825749433085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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