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김재규는 5.16 군사 쿠데타와 관련이 없고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던 이종찬 계열의 사람이였다.
2. 중앙정보부장 취임 이후 남산 고문실 폐지
3. 중정에서 간첩조작사건을 없앳다. 전 중정부장 임기 3년동안 70건이 넘던 간첩조작사건이 김재규 재임시절 0건.
4. 중정에 의한 선거개입 차단
5.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카톨릭 계열 사제들을 방면했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과 친분을 얻게 된다.
6. 야권 인사중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김영삼 지원
7. 박정희에게 1977년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고,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박정희는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앗다. 박정희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이유 중 하나다.
8.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 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
9. 10.26 직전, 차지철이 캄보디아 처럼 전부 밀어버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박정희는 이 말을 듣고 "얼굴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 있던 김재규에게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그렇게 물러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나?"며 면박을 주었다. 그날 김재규는 집무실에 돌아와 수행비서관 박흥주에게 "귀를 좀 씻어야 겠다."고 말했다.
10. 강압수사 금지 조치, 기구 축소,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 개편, 부장 판공비 8억 원을 내놓아 퇴직기금을 제공했다.(이부분은 사실 믿기가 어려울 정도다. 당시 8억원이면 뉘집 강아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11. 아버지가 세운 사학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12. 10.26 일어나기 3개월전 고 장준하 선생의 아드님에게 시끄러워질거 같으니 미리 미국으로 피해 있으라는 말을 하였다. 10.26이 우발적이 아닌 의도된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주장이다.
13. 김재규가 장준하의 가족을 찾아가 "장선생님은 추락사 한 것이 아닌 정권 차원에서 돌아가셨다"라고 진실을 말해준다. (장남 장호권의 증언)
14. 중정부장 시절에 그의 부모님은 쌀가게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중정부장이니 그의 동생에게 비리에 연루됐다고 하자 건설사를 그만 두라고 한 일화, 건설부 장관 시절엔 그의 무남독녀 딸의 결혼식때 친지들 이외엔 누구도 오지 말라고 한 일화가 있다.
15. 부마항쟁 당시 김재규와 박흥주가 최루가스에 맞아 초주검이 된 어린아이를 구하려 노력하였다.
16. 4.3항쟁의 주역인 송요찬 장군과 마찰이 있었는데, 당시 김재규 대령을 영창을 보낼려 했을때 이를 말린 사람이 이종찬이다.
17. 그는 최태민의 비리를 파해쳐 박정희에게 보고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자 상당히 화를 냈다고 한다. 이는 항소이유서 중에 10.26 발생의 계기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18. 10.26 이후 김계원의 증언에 의하면, 시해 당일 본인에게 "부마사태를 폭동 진압하듯 무조건 누르면 부산 시민이 다 일어나 봉기한다. 공화당도 차지철이 무서워 대통령께 바른말을 못하고 있다. 이놈을 오늘 없애 버려야겠다."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19. 박정희 시해 바로 전 김재규는 박정희와 김영삼 구속과 관련해 서로 언성을 높힐정도로 싸웠다고 한다. (김계원 증언)
20. 중앙정보부장이였던 시절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21. 투옥 이후 재야인사 및 김수환 추기경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하였다.
22.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 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서, 이런 방식으로 생긴 '자생적 빨갱이'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진짜 빨갱이'보다 무서운 존재라며 박정희에게 정책의 시정을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평소에 유능한 인재들이 빨갱이란 이유로 탄압받는 일에 안타까워 하며, 인재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지도록 몰아가는 사회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생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