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대학살 목베기 시합의 주모자와 후손들 클라스

귀리야화 작성일 17.02.07 21: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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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카이 도시아키 (向井敏明) - 사진 좌측. 오른쪽은 노다 츠요시 소위.

1912년 6월 3일 생 - 1948년 1월 28일 사망

 

 

 

 

야마구치 현 출신의 무카이는 육군소위로 제 16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1937년 11월 13일에 양자강 하류에 도달했다.

무카이는 제 9연대 제 3대대 제 3 보병포 소대의 소대장이었는데 그의 소속부대는 난징(南京)으로 패주하는 중국군의 격퇴였다.

이 때 11월 29일에 우시(無錫)교외에서 도쿄 일일신문의 기자와 카메라맨이 무카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 11월 30일에

도쿄 일일신문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실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100인 참수시합>이었다.

 

무카이는 3대대 참모이며 동료장교인 노다 츠요시(野田毅)와 중국인 포로와 군인을 상대로 일본도를 이용한 목베기

시합을 벌였다. 이것은 4번에 걸쳐 신문에 게재될 만큼 유명했는데, 무카이와 노다는 나중에 500인 베기의 경쟁내기를

벌였다고도 한다.

 

당시 신문에 게재된 100인 참수시합의 기사는 다음과 같았다.

 

 

<1937년 11월 30일자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1보>

 

(제목) 100인 참수경쟁! 양 소위, 빨리도 80명.

 

상열(常熱), 무석(無錫)간의 40km를 6일간에 답파한 ○○부대의 쾌속은 이것과 동일한 거리의 무석, 상주(常州)구간을

3일만에 돌파했다. 이것은 신속, 쾌진격, 그 제일선에 선 카타키류(片桐)부대에 <백인참수경쟁>을 꾀한 두 명의 청년장교가 있다.

무석출발 후 재빠르게도 한 사람은 56명을 벳고, 한 사람은 50명을 벳다고 한다. 한 사람은 도야마 부대의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26세)

- 야마구치 출신 - 한 사람은 같은 부대의 노다 츠요시 소위(25세) - 가고시마 출신 -

총검도(銃劍道) 3단의 무카이 소위가 허리에 찬 보도 <세키노 마고로쿠>를 휘두른다면 노다 소위는 무명검이지만 선조 대대로의

보도로 말한다. 무석출발 후 무카이 소위는 철로를 따라 16,7km를 따라 대이동하며 전진, 노다 소위는 철도노선 앞에서 전진하면서

일단 둘은 헤어졌다. 출발 다음날 노다 소위는 무석에서 80km 떨어진 무명부락에서 적 토치카에 돌입해 4명을 베면서 선진의 이름을

떨쳤다. 이를 들은 무카이 소위는 분연히 야간에 적진에 부하와 함께 뛰어들어 55명을 베어넘겼다. 그 후 노다 소위는 횡림진에서

9명, 위관진에서 6명, 19일 상주에서 6명, 합계 15명을 벳다. 무카이 소위는 그 후 상주역 부근에서 4명을 베고 기자가 역에 갔을 때

두 사람이 역전에 서 있는 광경과 마주쳤다. 무카이 소위는 남경과 단양에서 백명을 넘게 베었다고 해서 노다의 패배였다.

무카이의 칼은 56명을 베었지만 날이 상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노다 소위는 두 놈이 달아나버려 베지 못했다고 하며 대신 고관을

처치했으니 내가 성적이 더 위가 아닌가하고 단양까지 대기록을 세우겠다고 했다.

 

 

 

<1937년 12월 4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2보>

 

(제목) 급핀치로 활약, 백인 참수경쟁의 경과

 

남경까지 백인참수경쟁을 시작한 ○○부대의 급선봉 카타키류 부대, 도야마 부대의 두 청년장교, 무카이 도시아키, 노다 츠요시

소위는 상주 출발이래 분전을 더하여 2일 오후 6시 단양에 입성하기까지 무카이 소위는 86명 참, 노다 소위는 65명을 참하는 서로

호각인 대접전을 이루어냈다. 상주에서 단양까지 십리간에 전자는 30명, 후자는 40명의 적을 베었다는 것으로, 장렬하다고 말할

아수라의 분전이었다. 이번에는 두 용사가 함께 철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우진, 여성진, 능구진의 적진에 뛰어들어 적들을 베어넘겼다.

그 중에서 무카이 소위는 단양중정문의 일차돌입을 결행했는데 노다 소위도 우측 손목에 경상을 입었지만 이 백인참수경쟁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기자 등이 단양입성 후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추격을 실행하는 도야마 부대를 쫓아갔지만 무카이 소위는

행군대열 속에서도 여유를 부리며 이야기하더라. 노다녀석이 갑자기 따라와 놀랐다. 노다의 상처는 가벼워 염려않는다. 능구진에서

벤 놈들의 뼈에도 나의 마고로쿠는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다, 아직 백명, 이백명을 더 벨것이다. 기자가 심판관이 되주구려라고 하더라.

 

 

 

<1937년 12월 6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3보>

 

(제목) 89-78, 백인베기, 대접전/ 용장! 무카이, 노다 양 소위!

 

남경을 둘러 싼 백인참수경쟁의 두 청년장교, 카타키류 무카이 도시아키, 노다 츠요시 소위는 무사히 입성했지만 최전선에 서서

분전. 입성직전까지 전적은 무카이 소위가 89명, 노다 소위가 78명이라는 접전이었다.

 

 

 

<1937년 12월 13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4보>

 

(제목) 백인베기 "초기록" 무카이 106-105 노다 / 양 소위들은 연장전

 

남경에 들어서기까지 백인참수경쟁이라는 진기한 경쟁을 시작한 이례적인 카타키류 부대의 용사, 무카이 도시아키, 노다 츠요시.

양 소위는 10일간 자금산 공략전 등에서 106대 105라는 레코드를 작성하여 십일 정오에 양 소위는 대단한 서로의 칼날을 지닌

일본도를 한 손에 쥐고 대면했다. 노다 왈 <이봐, 나는 105명인데 너는?> 무카이 왈<나는 106이다!>....양 소위는 아하하하 하고

웃으며 결국 어디까지 누가먼저 백명을 벳는가를 불문에 하기로 하고 <이건 비겼다. 하지만 150명은 어떤가>하여 일치단결해

십일 이내에 150명 베기에 들어갔다. 십일일 낮에 중산릉이 내려다보이는 자금산에서 패전병 사냥에 한창이던 무카이 소위가

백인베기 무승부의 결말을 위해(중략)..양 쪽은 백명을 넘기면 원래 서로의 칼을 내기로 하였다더라...(사진 상 게재)

 

 

 

태평양 전쟁당시 소좌계급까지 올랐던 무카이는 일본의 패전 후인 1946년에 극동군사재판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무카이는

100인 참수경쟁은 신문기자들이 멋대로 지어낸 것이라고 밝혔지만 1947년 9월 2일에 다시 체포되어 난징의 국민당 정권으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무카이는 전쟁포로의 학살혐의와 주민들의 살해죄로 사형을 선고받고는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의 우화대(雨花臺)에서

노다와 함께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무카이의 딸과 노다의 아내, 손녀는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해 우익단체들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대법원에까지 상고했지만 패소했다.

 

현재 이들은 <백인베기 소송을 지원하는 회>란 단체를 만들고는 재판의 부당성과 중국의 항일기념관에 전시된

부당한 사진의 철거(학살사진)를 요구해 말썽을 빚고 있다.

 

 

출처 : 아사히 신문 <백인 참수경쟁의 보도>, 사진은 상업적 사용이 제한된 공개용.

 

후손이라는 것들이 역시나 극우놈들...반성할 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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