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케이블 tv에서 몇년전 영화였던 "나쁜 남자" 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조제현 씨가 출연했고 꽤 재미 있게 보았던 영화
사창가를 배경으로 다소 충격적 이였던 그 영화
하지만 나에게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영화 이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그저 돈 몇만원으로 욕정을 해소하는 ,,,
가장 밑바닥 천한 여자들이 모여드는 사창가
나에게는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가장 잊을수 없었던 내 기억속에 어느 여름
항상 머리속에 마음속에 그때의 일들이 있었지만
그저 가끔 주위 몇몇 사람들에게 술자리 안주 삼아 이야기로만 들려주었던 그때의 기억
"나쁜 남자" 영화속의 사창가 풍경을 보며 나는 영화 보다는
나의 경험담을 글로 옮겨 써보아야 겠다는 생각과 귀찮다는 생각의 갈등을 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혹시라도 그날 그때 나와 함께 였던 그녀들이
이 글을 보고 서로 안부나 전할수 있도록 연락이 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고
새삼 그때가 그리워져 이렇게 적어 놓기로 했다
힘든 군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코앞에 두고 여느 친구들처럼 이젠 뭘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때에
동네 선배로부터 미아리에서 장사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내가 살던 곳이 미아리 에서 두세 정거장 거리인 정릉 이란 곳이였기에
동네 노는 선배들중 일부는 미아리 사창가에서 돈벌이를 찿곤 했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미아리 라는곳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꽤나 두렵고 망설여 지는 일이였다
아니, 더 솔직히 쫌 찝찝하기도 하고 매우 꺼려 졌다
하지만 아무 자본도 없이 일할수 있고 돈벌이도 괞찮았으며 누구 간섭 받지 않고
혼자 일 할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제대를 몇일 앞두고 그 장사를 하기로 결정 했다
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리던 병장 전역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미아리 에서의 마차 장사를 시작 했다
장사 내용은 이렇다
미아리 사창가는 매우 좁은 골목으로 미로 처럼 연결된 꽤나 넓은 지역이다
그 골목 곳곳에 [마차] 라고 해서 커피나 꿀차를 파는 리어카들이 있다
사창가 영업집 과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곳에 일하는 여자분들이 한껏 치장을 하고 유리로 된 문 밖을 바라보고 앉아 있고
나는 그녀들을 서로 바라보고 앉아 있는 형태이다
그녀들과 나 사이에 사람 두명도 나란히 걷기 힘든 골목길이 있고
그녀들은 쉴새 없이 호객 행위를 한다
지금이야 그런 풍경을 상상 하긴 어렵겠지만
그 당시의 사창가 저녁의 풍경은 명동거리를 방불케 한다
그 좁은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메워지고 ,그 사람들을 호객하기 위해
여자들이 어우러지고 말그대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내가 하는 일은 의외로 간단 하다
예를 들어, 꿀차 라는것은 30개 1박스에 2천원에 들여온다
꿀차 는 그저 뚜껑을 따고 뜨거운 물만 부어 휘휘 저어 주면 되는 방식이라 매우 간단 하다
가격은 1잔에 2천원을 받는다
꿀차 한잔을 팔면 대략 1900 원씩이 거의 내 마진인 셈이다
내가 관리 (?) 하는 가계는 6개 였다
관리라고 해서 거창한것은 아니고 나는 그 가계에 콘돔,휴지,물수건 등을 매일 공급해 준다
그리고 그 가계들은 나의 장사를 도와준다
도와주는 방식은 이렇다
그런곳에 오는 남자들은 대부분 2~3명씩 함께 온다 ,들어 갈때는 함께 들어가지만
그중 먼저 일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먼저 나온 사람은 나머지 친구들을 기다리며 함께 했던 파트너와 대화를 한다
대화 내용은 맨날 뻔하다
아가씨가 그 남자의 정력에 대해 오바하면서 치켜 세워주면
그 손님은 의기 양양해서 허풍을 떠벌려 대는 그저그런...
그럼 그 아가씨는 목이 마르다며 저기 저 꿀차 한잔 사달라고 아양을 떤다
기고 만장해진 남자는 쉽게 응한다
그때 아가씨가 응석을 부리며 "아~이 나만 먹으라고?? 우리 언니들도 한잔씩 사줘~"
하며 아직 대기(?)중인 언니들을 가리킨다
대략 4~5명 ,남자는 흔쾌히 ok~한다
이렇게 팔리는 꿀차수가 엄청 나다
장사를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 하는데 이것 저것 다빼고
매일 아침 나에 순수익이 대략 30~50 만원 정도 됐었으니까..
물론 그녀들은 그렇게 받은 꿀차를 먹지는 않는다..
처음 일을 시작 했을때에는 일하는 내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기가
서로 내색 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민망했다
그녀들이나 나나 서로 젊은 사람들 이고
서로 무슨 직업인지 뻔히 아는데 안 민망 할수가 없다.
그것도 잠시 매일 저녁 8시 오픈 할때 그녀들 가계에서 함께 밥을 차려 먹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서로 쉽게 친해졌다
하지만 각 가계들마다 이모 라고 불리는 포주들이 무섭게 관리 하고 있어서
뭐 사적인 대화를 한다거나 그러지는 못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날수록 그녀들은 나를 삼촌 이라고 부르며
서로 보이지 않는 위안이 되어갔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가지 이야기가 있다
아침 7시 정도 되면 장사를 마무리 하기 위해 준비를 한다
나는 내 마차를 정리 하고 나서 그 골목의 일정 구간을 빗자루 로 청소를 한다
여섯 가계 수십명의 여자들이 거의 반 나체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앉아 있고
바로 코앞에서 빗자루 질을 한다는게 여간 어려운일이 아닐수 없다..(매우 민망하다,,)
그렇게 빗자루질 하고 있을때면 그녀들은 내게 짖굿은 농담을 건네며
자기들끼리 깔깔대고 웃곤 했다
그리고 나에게 응원가(?)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때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드라마가 최진실,안재욱,차인표가 출연한
"별은 내가슴에"였다
그 주제가 또한 선풍적이였다
"사랑했던~너를 잊지 못해~부디~너를 다시 볼수 있다면~" 이 노래
그 노래에 약간 개사를 해서
"사랑했던~xx삼촌~~ 잊지 못해~부디~xx삼촌 다시 볼수 있다면~" 이런식으로
그 주변 가계 수십명의 아가씨들이 짖굿게 큰소리로 청소하는 나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매우 민망하고 얼굴 빨게 지는 일이다 ㅎㅎ
그리고 또 여자들만 모여 있는곳이다 보니 못을 박거나
형광등을 갈아끼우는 등의 일도 내몫이였다
하루는 골목길을 비추어지는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작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형광등을 갈아끼우는데
또 아가씨들이 짖굿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xx삼촌~배꼽보여요~"깔깔깔~~~
멋적게 웃으며 형광등을 갈고 사다리에서 뛰어내리는순간 못에 걸렸는지
바지 옆 이 부욱 찟겨 나갔고
팔꿈치와 허벅지에서 피가 났다
지켜보던 이모들과 아가씨들이 놀라 뛰쳐나왔지만
아픔 보다는 민망함과 챙피함에...ㅠㅠ
그녀들은 진정 나를 걱정해 주었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여러명이 뛰쳐나와 나를 가계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빨리 바지 벗으라고 성화였다
너무 챙피해 하는 나를 보고 짖굿게 장난 치며 괞찮다고 벗으라고 했다
상처난곳에 약을 발라주고 자기들 츄리닝 바지를 건네어줬다
그리고 찢어진 바지를 꼬메어 주겠다고 서로 장난 스레~"내가 꼬맬꺼야~"
"웃기지마 내가 꼬매드릴꺼야~"하며 깔깔대기도 했다
그랬다 항상 인형 처럼 꾸미고 앉아 무료하게 문밖을 내다 보고 있어야 하는
그녀들에게는 그런 소소한 일들이
재미였고 현실을 잠시라고 잊게 해주는 헤프닝 이였다
또 어느날은 내가 몸살이 너무 심하게 걸려서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너무 아파서 오늘은 쉬겠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왔다
그녀들 이였다
많이 아프냐고 병원 가보라고 그리고 자기들이 어디서 주워들은 민간 처방 까지..
이렇게 하고 있어라 저렇게 하고 있어라
그녀들은 정말 나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다음날 출근해 보면 내 마차 서랍에는 몸살 감기약 몇봉지와
아프지 말라는 메모가 들어 있기도 했다
그녀들은 단 음식을 매우 좋아한다
하루종일 가게안에서 군것질도 못하고 있어서인지
간혹 나에게 초콜릿이 먹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출근 할때 초콜릿,사탕,초코가묻어있는 과자 등을 사들고 출근을 했다
가게마다 밥을 해주시는 아줌마들이 따로있는데 그분들을 통해서
몰래(?) 반입 시켜주곤했다
물론 이모들에게 걸리면 살찐다고 혼나기 일쑤였지만..
장사가 한창일때 나와 마주보고 앉아있던 그녀들은
드레스 뒤에, 치마밑에 그 초콜릿등을 숨겨놓고는
몰래 하나씩 입안으로 넣고는 나랑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곤 했다
그럴때 내 역할은 내 옆에 앉아 있는 이모들의 시선을 돌려주기 위해
쓸데없는 수다를 떨어주는 것이였다
매일 저녁 그녀들과 밥을 먹을때에는 항상 반찬이 푸짐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기본 밑반찬에 국한그릇...(그렇다고 못먹을정도의 형편없는 반찬들은 아니였다)
게중에 맛있는 반찬이라도 있으면 그녀들은 무조건 내앞에 두고 나를 챙겨먹이기에 열중했다
함께 먹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자신들은 물에 말아먹더라도 계란후라이는 항상 내 밥위에 얹어주곤 했다
그렇게 대략 몇 개월 정도를 그곳 미아리 에서 생활을 했고
그녀들과 나 사이에 미묘한 친밀감은 이제 가족 그 이상 이였다
여기서 잠시 그곳의 생리를 얘기 하자면
그녀들은 오후 5시에 이모 라는 사람의 인솔하에 목욕탕과 미용실을 간다
그리고 저녁 8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아침8시에 가계 문을 닫고 이모들은 퇴근을 하는데
퇴근 할때면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꼭꼭 걸어 잠구고 퇴근을 한다
그래 그녀들은 그렇게 갇혀서 일하고 있는것 이다
감금이라고 보는게 맞다
나중에 알게 된일이지만 그녀들 대부분은 빚에 묶여서 도망갈 생각도 못했고
또 대부분은 중 고등학교 중퇴자들이라 언어구사 라던가 생각 자체가
일반인들보다는 매우 떨어지는것을 느낀적이 매우 많다
모두 개개인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어쩔수 없이 할수 있는 일은
몸을 팔고 웃음을 파는 일뿐이였다
하지만 장담 하건데 그 수십명의 여자들 중에
내가 느끼기에 참 못됐다 라고 느낀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모두 가슴 따뜻하고 정에 굶주려 있고 따뜻한 정이 있는 여자들이였다
그 이후로 이곳 저곳에서 많은 여자들을 대해왔지만
대부분 약싹빠르고 계산적이고 자기 잘난맛에 살아가는 일반 여자들을 봤을때
매우 심리적으로 혐오감을 느낀적이 많다
그래서 내 주위에 누군가가 사창가 또는 몸을 파는 여자들을 아주 비하 하는듯한
얘기를 하면 괜히 화가나서 열변을 토했던 적이 많다
나 또한 그곳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그런식의 시선으로 보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그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모르듯이
나또한 그런 그녀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마음이 향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분들을 비하하는 생각 일절 없다
그러던 어느날
이 이야기의 핵심인 대 사건(?) 이 벌어졌다
여느때와 같이 그날도 서로 마주보고 장사를 하고 있을때쯤
내 바로앞 가계 안에서 심상치 않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뛰어 들어가려 했으나 앉아 있는 아가씨들이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말렸다
무슨 일인지 매우 궁금했다
아가씨들도 매우 곤란하고 당황 하는듯했다
잠시후 그 고함 소리가 가까워졌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 가계 이모였다
뭔가 매우 화가나서 아가씨중 한명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가씨의
머리채를 끌고나와 발로 밟고 때리고 구타를 했다
이거 안되겠다 싶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모이기에
껴안고 웃으면서 말렸다
"에~이 이모 왜그래~참아요 참아~"
하면서 무서움에 눈치만 보고 있는 아가씨들에게 눈치로 싸인을 줬다
벌거벗은채로 매맞고 있던 그녀를 몇몇 아가씨들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나와 다른 아가씨들 몇명이 괜한 아양으로 이모 화를 풀어주려고
이모를 데리고 나왔다
커피 한잔을 타주고 담배를 건네며 이모의 마음을 진정 시키려 노력했다
그렇게 때린 이유는
한쪽다리가 없는 손님이 와서 그녀를 초이스 했는데
그녀가 인상을쓰며 손님을 거부 했다는 그 이유였다..
그래서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그렇게 그녀를 두들겨 팼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리속이 매우 복잡해졌다
평소에 아가씨들에게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며 마치 그녀들의 어머니 처럼 따뜻하던
그 이모 라는사람이,,
그 속 생각은 그녀들을 사람이 아닌 장사 하는 도구쯤으로 여기고 있다는것에
정말이지 너무 화가 났고 역겨웠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아까 매를 맞았던 그녀는 다시 화장을 고치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채
자기 자리에 앉아 멍하니 문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니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꼬옥 깨물고
문밖을 바라보고있었다
나와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정말 내가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나와 눈이 마주친다면 그녀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모멸감을 느낄지...
평소에 삼촌 삼촌 하며 장난치던 사람에게 ...
자신이 발가벗은채 방바닥에서 얻어맞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는게..
매우 난감했고 또한 머리속도 복잡해졌다
그날은 평소의 그녀들이 아니였다
아까 있었던 일들에 대해 그녀들은 매우 화가 나있고 억울해 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난 그녀들 을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줄수 있을까??
한가지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에는 매우 망설여지는 위험한 일이였다
그날 장사를 하는둥 마는둥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아침이 왔고 나는 그녀들 에게 평소 보다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작별 인사를 한후
퇴근(?)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택시를 타고 집에가서 잠을 잤겠지만
그날은 미아리 근처 어딘가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아침 10시
작은 철근 쇠 막대기를 하나 구해서 품속에 넣고 다시 사창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모든 가계는 커튼이 쳐져있고 밖에서 걸어잠군 자물쇠들이 걸려져있고
인적 없이 조용했다
아까 그 가계 앞에 도착했다
이모들은 모두 퇴근을 한것 같았다
담배를 한대 피우며 주변 동태를 살핀후
철근을 꺼내어 자물쇠 사이에 끼워넣고 힘을 줘서 비트니까 쉽게 자물쇠가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내가 관리(?) 하던 가계 6개의 자물쇠를 모두 뜯어냈다
소리에 놀라 무슨일인가 내다보던 그녀들에게 얘기했다
도망갈사람은 지금 빨리 도망 가라고
그녀들은 매우 곤란하며 또한 고민하는듯하더니 이내 모두 안으로 들어가서
각자 짐을 챙겨 나왔다
가게당 5~8 명 정도의 아가씨들이 있으니
대략 30~40 명 정도의 여자들에 둘러쌓여진채로
그렇게 서있었다
그 자리에 몇명이 남아있었고 ,몇명이 도망을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 역시도 경황이 없었다
아무일도 없이 빨리 이 순간이 지나기만을 바랬다
몇명과는 포옹을 했고 ,또 몇명과는 전화번호를 주고 받으며
주위에 누가, 보고있지는 않은지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서로 짧은 인사들을 나누고 각자 흩어졌다
나도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일단 상계동 쪽으로 도망 쳤다
정말 손발이 벌벌벌 떨리고 내가 무슨일을 저질렀나 싶기도 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걷거나 서있을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완전 다리가 풀려버렸다
어딘가에서 계속 전화가 왔다
휴대폰을 받을까 말까..혹시 벌써 들켜버린걸까...
지금처럼 발신번호 표시가 되지도 않는 때였기에
내 휴대폰이 울릴때마다 다리에 힘은 점점더 빠져 갔다
사람이 극도로 두려우면 숨을 쉬기도 힘들다 ,손도 발도 왜그렇게 떨리던지...
공중 전화를 통해 내 휴대폰 음성 사서함 을 들어보았다
아까 도망갔던 그녀들이 각자 고맙다고 언제 한번 꼭 보자는 내용의 메세지들이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침에 어느 공원에서 젊은놈이 펑펑 울어대니 산책 나와있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정말 무섭고 두려웠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다가와서 나를 잡아갈것 같았다
하지만 이모들은 오후 5시쯤 출근을 하니까 아직 은 이 사실을 모를것 같았다
잠시후 다시 음성 메세지를 확인했더니
아까 도망 갔던 아가씨들중 한명이
자기들 지금 돈암동에 있으니까 만나자고 했다
나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했던 여관으로 들어가니 5명이 모여있었다
그때 잊을수 없던 기억이...
나는 매일 그녀들을 진한 화장을 한 얼굴들만 보아왔었다
하지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다시 보니 너무도 어린아이들이였다
그때 처음으로 서로에 대해 사적인 이야기 들을 나누었는데
모두 17~19살 정도 나이어린 아이들이였다
가슴이 막막해졌다 그리고 내가 잘한짓을 했다고 여겨졌다
그 아이들은 나에게 너무 고맙다고도 했고 앞으로 어떻게 도망쳐 다닐꺼냐고
걱정도 해주었다
그러던중 한 아이가 자기집이 강원도 인데 모두 함께 내려가자고 했다
어차피 갈곳도 없는 우리였고 또한 최대한 멀리 도망 가야 했기에 모두 기뻐했다
그렇게 강릉에 도착했다
그 아이에 집은 매우 허름했고 어머니라는분이 한분 계셨는데
간만에 보는 딸과 우리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녀 또한 그런 어머니에게 별반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그녀 집 에서의 도피(?)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내 휴대폰은 계속 울려댔고 받지는 않았다
혼자 밖으로 나와 음성메세지를 확인해 봤는데
이미 음성메세지에는 그곳 이모들과 무서운 남자들의 목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좋게 말할때 빨리 연락해라 너 죽여버린다 등의 내용들.."
정말 다리가 후들거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 강릉에서 우리 6명은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
함께 요리도 하고 바닷가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술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협박 메세지는 계속 쌓여만 갔다
정말 두렵고 무서워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다
괜히 이곳 강원도에 있어도 쉽게 잡힐것 같다는 두려움도 들고,,,
그때큰 결심을 했다
경찰서에 신변 보호를 요청 하기로,,
일단 미아리를 관할 하는 경찰서가 종암 경찰서 이다
사실 쫌 두렵기도 했다 경찰과 그런 업소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이란걸
어디서 많이 줏어들었기에....
그래도 그때 내가 믿을수 있는곳은 경찰 뿐이였다
어느 형사와 통화 연결이 되었을때
그간의 일을 상세히 설명을 했다
형사가 차분히 듣더니 직접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직접 만나기는 쫌 꺼려진다고 죄송하지만 사실 꺼려진다고..
그랬더니 걱정하지 말고 자기들이 강릉으로 내려올테니 강릉 경찰서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같이 내려온 5명의 여자 아이들도 함께 나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일단은 나혼자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고 여자 애들에게 그 일을 얘기하고 일단은 경찰서 근처까지 함께 갔다가
여차 하면 모두 흩어져서 도망가라고 당부를 했다
나도 아이들도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다음날 아이들과 강릉 경찰서로 갔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신호를 보내기로 하고
나혼자 경찰서로 들어섰다
방금전 아이들이 눈물흘리며 걱정하는 모습이 잊혀 지지가 않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 두명과 인사를 나눈후 그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두분 모두 친절했다
그런데 형사분들 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을수 있었다
"사실은 종암경찰서에서 미아리 텍사스에 관한 아주큰 수사가 진행 되고있는데
관련자들의 증언과 진술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극비로 진행 되는 일이기에 자기들도 매우 조심스러운 상태라고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신변보호는 자신들이 책임져 주겠다고도 했다"
또 하나 충격 적이였던건 사건이 벌어진지 대략 3~4일 정도밖에 안되어 있는데도
형사들은 나에 사건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충격이였다
하지만 다소 황당한 이야기가
"내가 청량리 588의 똘마니인데 미아리로 위장 취업해서 여자들을 꼬셔서 청량리
사창가로 빼돌렸다는 식으로 엉뚱한 소문이 퍼져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실 자기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이제 사실을 알고 보니 젊은 사람이 참 용기 있는 일을 해주었다고도 했다
나는 고민 끝에 밖에 기다리고 있는 동생 들을 모두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각자 종이 에 빽빽히 진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도 몰랐던 많은 얘기들이 있었다
각자 선불로 빚을지게 만들고 그 선불에 말도 안되는 이자들이 쌓여서 도망도 못가게
자물쇠로 걸어잠그고 일을 시켰으며 임신할경우 병원도 아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상한 약을
먹여서 애를 지우게 하고 매일 구타가 이루어졌으며 등등...
그때 마음이 찡했다 ..
자기들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내가 다치거나 아프면 나를 먼저 걱정해주고
조금은 호들갑스럽다 할정도로 나를 챙겨주던 모습들이 떠올라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형사들은 돌아갔고
나도 동네 친구들과 연락하며 미아리의 동태를 살펴보기도 했다
결과는 내가 예상했던 그 이상 이였다
이미 그곳 이모들과 건달들은 나를 찿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그들의 분노는 상상 그 이상 이였다
일단 강릉에서 그렇게 계속 지낼수만은 없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제 각자 흩어져서 자기 삶을 살아가자고 제안을 했다
아직 어리고 철없는 아이들이 울고 불고 하며 이렇게 함께 살자고 했다
자기들이 돈벌어 올테니 모두 이렇게 함께 살자고..
그날 우리는 펑펑 울었다 정말 서로 서로 불쌍 하고 가엽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다시는 그런일에 발들이지 말고 학교 중단한 아이들은 다시 학교로 가고
제대로된 직장에 취직을 해서 서로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을 했다.
그때,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꿈을 얘기해줬었다
그리 거창하지도 않은....
예쁜 테라스가 있는 작은 카페의 맘씨 좋은 여주인,사람들에게 친절한 미용실 헤어디자이너,
맘놓고 구경할수있는 예쁜 옷들이 즐비한 작은 옷가게 주인...
머리가 노랗고,화장을 떡칠한 그 어린 아이들을 문전박대한 그런곳들이였다...
그 이후 대략 1~2년 정도는 몇몇 아이들과 전화통화는 하며 지냈다
그렇게 살다보니 연락처도 바뀌고 하면서 자연스레 잊혀져가긴 했지만..
언젠가는 그중 한 아이에게 다급히 연락이 왔다
내 기억에 도봉구에 있는 어떤 여고 였는데 ,
그 아이의 담임이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 해도 무슨 일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그 아이의 삼촌 이라고 부모님 대신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한적도 있었다
그런일이 처음 이였지만 꽤나 능숙하게 잘 연기(?)해서
그 일이 잘 해결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음잡고 학교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그 모습이 참 예뻐보였다
다음날 막상 떠나왔으나 갈곳이 없었다
삼척에 혼자 살고 있던 친구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삼척에서 별달리 하는일도 없이 지내고 있을때쯤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 사건이 있은지 한달이 조금더 지난 때였다
뉴스에 믿지 못할 일이 보도 되고 있었다
종암경찰서에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 경찰 서장이 부임을 했는데
가장 먼저 선언한것이 미아리 사창가를 뿌리 뽑겠다는..
한마디로 미아리 사창가를 초토화 시키겠다는...
그것이 지금 있는 성매매 특별법의 시초였다
아~그때 그 형사분들이 비밀리에 진행중 이였다는 것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다른 그 어떤 누구보다도 더욱 관심을 갖고 그 사건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에 종암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사건 진술을 해달라고..
몇일 망설임 끝에 명동에서 형사들을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종암경찰서로 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미 경찰서 앞은 미아리 사창가 업주들과 포주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안에서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고
신변보호 와 익명성 보장을 요구한후 그간에 내가 보았던 사실들을 모두 진술했다
나머지 여자 아이들과 연락은 하고 있었지만 형사들 에게는
그녀들 의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다
그 아이들에게 다시 이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종암경찰서 여 서장의 미아리 초토화 작전은 거세어졌고
매일 뉴스에서는 미아리에 대한 보도들이 계속 흘러 나왔다
몇몇 연락하는 형 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이번 종암 경찰서 수사 자체가 내가 밀고를 해서 이렇게 된것이라고 까지
확대 되어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고
넌 이제 잡히면 인생 종치는거라고 도대체 어쩔라고 이런일을 저질렀냐고..
이젠 숨어서 살아 가라고 그런 두려운 걱정 섞인 말들을 전해 들었다
미아리 업주들 사이에 내 이름은 이미 유명해져 있다고 했다
전국구 건달들이 나를 찿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도 했고
그날 도망 갔던 몇몇 여자애들이 다시 붙들려 와서 그 사실이 맞다고
업주들에게 증언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이제는 23살 청년이 혼자 견뎌내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큰 사건이 되어버렸다
정말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두렵고 무서웠다
솔직히 제 아무리 건달들 이라도 내가 어디 있는지 날 찿아내겠나 싶겠지만
그때는 정말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길에는 나설수가 없을정도로 공포에 나날들 이였다
일단 숨을곳이 필요했기에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어느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쉬는날에는 밖에도 나가지 못했고
한곳에 오래 머무를수 있는입장이 아니였기에
숙식이 제공되고 서울만 아니면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미아리 사창가는 없어져 갔고 그 2년 사이에
그곳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나 윤락녀 몇명이 사망 하는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정신과에 가서 심리 치료도 받고 점점 안정을 되찿아 갔다
그러고 3년정도 지나서 마음에 안정도 되찿았고
내 자신이 떳떳 하기에
다시 미아리로 찿아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가 떳떳하다는것을 입증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 마음에 짐을 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활을 찿고 싶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찿아갔다 이미 많은 가계들은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고
몇몇 가계들만 불이 켜진채 손님들 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도 나를 알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가계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포주 아줌마들에게
예전 그 가계의 이모 이름을 대며 수소문하며 찿아 다녔다
모두 나를 무슨 형사쯤으로 아는지 대답을 피했다
메모지에 연락처를 적어주고 내이름을 말해줬다
그들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태도가 돌변하더니 뺨 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발길질을 해댔다
"너 때문에 미아리가 이지경이 됐다고 죽여버리겠다고" "다 너때문이라고....."
하지만 대응하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한참후에 그곳 미아리에 있는 해병대 초소 앞에서 예전의 그 이모들중 두명을 만날수 있었다
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처다보며 온갖 욕을 퍼부어 댔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다
나는 3년전 그날 내가 왜 그랬는지 ,또한 그 일이 잘못한일이 아니였다고
나름 조리있게 대꾸했다.
그러나 서로 말이 통할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뭔가 결론을 짓고 내 생활을 찿고 싶었다
이모들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나는
어떤 아저씨들에게 끌려가 얼음 창고에서 정말 죽지 않을 만큼 얻어 맞았다
나는 그 종암경찰서 여서장의 사건과 내가 저지른 사건이 관련 없음을.
그리고, 다른 이익을 위해서 저지른 일이 아님을 주장했고
그들은 주먹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 다음날 풀려나와
다시 미아리 근처에서 나를 보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만 받고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 되었다
그날 눈과 입술이 퉁퉁부었고 온몸이 쑤시고
다리를 절름 거리며 걸어나와서 피우던 그 담배 한모금이 그렇게 맛이 좋을수가 없었다
이 글의 첫 시작이였던 군 제대날 보다도
나에게는 그날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내 3년동안의 도피 생활은 끝이 났고
내 마음속의 짐도 그때서야 내려놓았다
그이후로도 가끔씩 그녀들이 생각나곤 한다
이미 10 여년이 지나서 얼굴도 이름도 전혀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예쁜 테라스가 있는 작은 카페 여주인,사람들에게 친절한 미용실 헤어디자이너,
맘놓고 구경할수있는 예쁜 옷들이 즐비한 작은 옷가게 주인...
그 꿈을 이루었을까??
그때 그날 있었던 일이 그녀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을까??
내가 옳은 일을 했던 것일까??
만약 이글을 읽게 되어 연락이 닿을수 있다면
서로에게 매우 부끄러운 과거 였지만 소주 한잔 하며 지난 일들을 추억해 보고 싶다
내가 사는곳이 미아리 근처 이기에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미아리를 지나갈 일이 있다 그럴때면 버릇처럼 그곳에 내려 그 골목길을 걷곤 한다
그곳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해서 거의 흔적이 사라지긴 했지만
별볼일 없이 살아온 내 자신에게는
가장 뿌듯하고 용기 있는 일들이였기에
그때를 추억해보기도 한다......
그곳에서 흘려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눈물과 한이 느껴 지는것같아
마음이 저려오기도 한다
남들에게 몸파는년 이라 손가락질을 받지만
각자 가슴속에 품고 있을 아픔들을 내색도 못하고
다만 몇만원에 아무 남자 품에 안길수 밖에 없었던
그 뼈저리게 아픈 기억들을 그녀들이 모두 잊고
10년이 지난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기도해 본다..
자네왔능가의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