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이 임박했단 소식은 서대문형무소 안에도 빠르게 퍼졌다.
굶주림 속에서 계속된 형무소 생활. 마침내 1945년 8월 15일이 밝았다.
그날 정오에 라디오에서 일왕의 항복방송이 흘러나왔다. 일본의 패전은 곧 조선의 해방을 의미했다.
8월 16일 강당에는 형무소장 대신 여운형 선생이 서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과 함께 비로소 서대문 형무소에도 자유가 찾아들었다.
1945년 8월 16일 가장 먼저 정치범들이 형무소를 나서자 시민들은 이들을 열열히 환영했다.
그런데 제작진은 그에게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해방 당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일제는 왜 그들을 처형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날 있었던 사형집행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된 이들은 약 400 여 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사형기록이 발견된 이들은 165명에 불과하다.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희생된 많은 이들이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목전에 두고 사형 당한 수감자들처럼
일제강점기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이곳에서 해방된 조국의 하늘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천장에 달린 굵은 동아줄과 사형장 안의 개폐식 마루판 이 모두가 항일투사들의 한을 품은채 옛모습 그대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