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0년대 일제강점기에 존재한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교주의 지시에 따라 300여건이 넘는 살인사건이 자행되었다.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이며, 전신은 백도교이다. 정확히 말하면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운이 죽고 나서 교주 자리를 놓고 세 아들 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 아들은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를 만들어 독립한다. 그러다가 1930년,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을 살인하고 암매장한 것을 비롯한 여러 범죄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 사이비 종교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난다.
그러던 것을 무사히 도망쳤던 차남 전용해가 비밀리에 백백교를 재건한다.
백백교에서는 성별에 따라 외우는 주문이 달랐는데, 남자가 외우는 주문은 아래와 같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이런 정신병자나 할만한 충격과 공포의 백괴스러운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종말의 날에 서양은 불, 동양은 물의 심판을 받아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避水宮)으로 옮겨가면, 대원님(백백교 교주)이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자는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 영주로 보내주고, 부귀영화를 원하는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설파했다. 그러나 시대가 혼란한 탓인지 그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금광 드립은 홍경래의 난 당시에도 나왔던 고전적 수법. 이는 조선시대 후기 각종 예언서들이 횡행할 때 유행한 주장 중 하나인 해도진인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다며, 이제 '백백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하여 백백교의 통치를 받게 된다는 흠좀무한 주장까지 했다.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말 그대로 혹세무민했다.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또한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지로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폭행했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성들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더군다나 교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함께 살해했다. 나중에는 너무 많이 몰려서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도 하였고, 경찰에게 들킬까봐 죽이기도 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든 신도가 학교의 문턱을 밟아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교주인 전용해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를 '신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에 철저하게 복종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살인을 저질렀다. 또한 가족 신도들을 지역 별 지부에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도망치면 다른 가족들이 죽임을 당할까봐 복종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백교의 범죄사건은 '사소한' 일로 희대의 사교 교주의 죄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조부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빼앗긴 유곤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흑막이 폭로되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적힌 신동아 기사.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346구의 시체를 발굴했다. 전용해는 몇달 후 솔밭에서 동쪽을 향해 누운 채 칼로 목을 찌른 사체로 발견되었으나, 얼굴쪽을 산짐승이 먹어치운 탓에 그게 정말 전용해인가 논란이 있었다.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전용해의 자식이 직접 보고 아버지라고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어 자살한 것으로 판정.
1937년에 사건이 드러나면서 일본은 당황했는데, 사람을 하나둘 죽인게 아닌 게 차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영어권 기사로도 보도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잡힌 사람만 해도 100여 명이 넘은데다가 확인된 살인만 해도 300여건이 넘는 지라, 수사와 예심을 준비하는데만 3년이 걸려 1940년에 첫 공판이 열렸다.
재개된 공판에는 무수히 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연일 언론에서 백백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인 행각보다는 교주 전용해의 무수히 많았던 첩들과 음란한 행위와 관련된 가십기사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첩이 60여 명이었으니...)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사건의 선고 공판은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수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 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 이후 한국 사이비 종교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건이 되었다.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이 나오면 매우 자주 백백교가 언급되며 다시 조명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