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군 당국이 광주 시민을 향해 총을 쏘도록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군 내부 기록이 처음 공개되면서 최세창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관련 네티즌들은 “sun0**** 겨우 징역 5년도 웃긴데 거기다 1년 만에 사면이라니” “hyun**** 그런데 발포 명령을 한 사람이 합창의장에 국방장관까지 지냈어??”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최세창에 대해 저도 궁금해서 나무위키에서 찾아봤습니다.
1934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나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3기로 입학하여 군에 임관하였다. 생도 시절에는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임관 후에는 철저한 명령복종과 임무수행 자세로 높이 평가받아 진압 작전 등 특수 작전에 동원되곤 했다. 1950년대 말 전두환, 장기오, 차지철 등과 함께 미국에서 특수전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77년,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준장)에 임명되었고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 때도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되었다. 훗날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도 진압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1979년 12.12 군사반란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와 더불어 휘하 병력인 3공수특전여단을 동원하여 반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면서 신군부의 일원이 된다.
최세창은 전두환으로부터 직속 상관인 정병주 특수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정병주 장군에게 항복하라고 비선 실세의 지시를 받고 직속 상관에게 항복하라고 총부리를 들이대는 것을 설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하였으나 정병주의 거부로 실패하자 휘하 장교 박종규 중령에게 체포를 지시한다.[1]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한 박희도, 최전방 9사단 병력을 중앙청 앞으로 출동시킨 노태우와 더불어 불법적인 병력 동원으로 무력 행사를 한 반란 가담자로,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 직속상관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점에서 가장 악질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듬해인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3공수특전여단에 실탄 배부와 실탄 사용을 지시하는 등 신군부 정권 탄생을 위한 유혈 진압에도 일조했다.[2]
12.12 군사반란에서 공을 세운 것과 더불어 전두환의 직계 하나회 멤버[3]로서 5공화국에서 13기 선두주자로 승승장구했다. 20사단장[4], 수도방위사령관, 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대장 1차 보직 중 최고 요직인 제3야전군사령관으로 진급해 참모총장 영전을 눈 앞에 두었다. 그런데, 전두환이 정권 이임을 앞두고 충복인 하나회 12기 박희도 참모총장의 임기를 1년 연장함으로써 최세창은 어쩔 수 없이 합동참모의장[5]으로 가게 되었다.
이후 노태우 정권에서 전두환의 직계 군맥이었기 때문에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광업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한다. 예편 후 2년 반이 지나 노태우에게 다시 등용되어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가담, 상관 살해 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8월 15일 사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