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 老兵들의 외침
[신동아]
● 6·25전쟁 때 38선 以北에서 첩보 수집
● 1965년 황해도 연백 침투 납치 공작
● 월남 파병 때 北 사리원비행장 감시
● 실미도 사건 거치면서 자료 소각·인멸돼
동아일보는 이튿날(11월 1일자)'잔인한 붉은 만행…분노의 개펄 100리' 제하 상보를 실으면서 "어부 232명이 공격을 받아 112명이 납북됐다"고 앞선 조선일보 보도 내용을 정정했다.
"이번 사건은 북괴의 만행이 가장 큰 원인인 것은 물론이지만 섬 주민의 가난한 약점을 이용해 돈벌이에 눈이 어둔 선주가 어로 금지 구역에 출어시킨 무모한 처사를 꼽지 않을 수 없다."(동아일보 11월 1일자)
납북 어부들은 그해 11월 21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감시의 눈총 속에 낮에는 교양강좌를 듣고 밤에는 억지구경"을 했다고 한다. 1965년 늦가을, 어부 납북 사건의'기록된 역사'는 여기까지다.
정영훈(87·예비역 대위) 공군정보전우회 간사는 안개가 자욱하던 그날 영락호에서 북한군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다. 영락호, 영미호를 그가 지켰다. 1965년 10월 29일 NLL 이북 수역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정부 공식 보고에 따르면 6·25전쟁 때부터 1만3000명을 양성했고 그중 7726명이 임무 수행, 훈련 과정에서 죽었다. 군사기밀이란 네 글자에 숨어 오랫동안 잊혔으되 베트남전쟁 때 국군 전사자(5066명)보다 많은 이가 북파공작에 동원돼 사망한 것이다.
2014년 11월 현재 육군 6030명, 해군 1243명, 공군 398명이'특수임무 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국가 보상을 요구했다. 육군·해군은 신청자 대부분이 보상받았으나 공군은 신청자도 적고 인정받은 이도 소수다. 1971년 실미도 사건 때 기록이 소각·인멸된 탓이다. 정영훈 간사가 국가유공자증서를 받은 것은 2008년 9월 29일이다. 78세가 돼서야 조국을 위한 헌신을 인정받은 셈이다.'이명박 대통령' 직인이 찍힌 국가유공자증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해 이 증서를 드립니다."
북파 공작은 1945년 분단 직후 시작됐다. 미군 극동군사령부 소속 첩보부대 KLO(Korea Liaison Office)와 민간 유격대가 38선 이북으로 넘어가 공작을 벌였다. 1·4후퇴 이후 본격화한 북파 공작에서 북한에 침투해 활약한 이들은 대부분 비(非)군인이다.정영훈 간사는 6·25전쟁 때 북파 공작을 벌인 공군 정보국에서 활약했다. 1965년에는 어부로 위장해 북한에 침투해 사리원비행장 감시 및 북한 기관원 납치 공작을 벌였다. 말도에 근거지를 두고 이뤄진 이 활동은 공군의 마지막 북파 공작이다.
"6·25전쟁 개전 초기부터 해군력에서 유엔군이 북한을 압도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을 때까지 국군과 미군이 서해5도부터 북한 신의주 앞바다를 잇는 서해를 완전히 장악합니다<지도 참조>. 북한 해군은 사실상 궤멸했고요. 90특무대는 서해 14곳, 동해 4곳에 파견대를 운용하면서 북한 침투 공작을 벌였습니다. 38선 이북의 섬에서 미군 6006부대와 협조해 북파 공작에 나섰습니다."
그는 1930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세(勢)가 강하던 곳이다. 북한이 공산화한 후 월남해 서북청년단 활동을 했다.
"우파 월남 지식인의 대표 격인 장준하 씨가 고향 선배예요. 월남한 반공주의자와 기독교 신자, 피난민이 6·25전쟁 때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 공작을 벌여 공을 세웠습니다."
1·4후퇴 이후 90특무대는 유엔군이 장악한 서해, 동해의 섬에서 활동하면서 공작원 교육을 실시하고 대원을 내륙에 침투시켰다.
"북파공작원은 서북청년단 계열이 많았습니다. 유엔군이 후퇴할 때 반공 사상을 가진 이들이 섬으로 피난 왔는데, 그중 건장한 이들을 선발해 내륙으로 투입시켰습니다. 각자의 고향으로 가 정보 수집을 한 거죠. 북한에 침투할 때 공작원들이 손에 쥔 건 자폭용 수류탄뿐이었고요."
북파공작원들은 북한군·중공군 집결지, 군사시설, 보급창고, 교량 등 포격 대상 정보를 수집했다. 이들이 획득한 정보는 미군 6006부대 통신 장비를 이용해 미군 5공군사령부와 강릉비행장 작전상황실에 통보돼 각 전선에서 목표물을 폭격하는 데 활용됐다.
"이북 출신 공작원들이 북한 내 연고지로 10~15회씩 침투했습니다. 귀환할 때마다 값어치 높은 군사 정보를 가져왔고요. 공작원들 덕분에 미군이 군사 목표를 정확하게 타격했습니다. 중공군, 북한군이 폭격에 시달리면서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정전협정이 체결된 것입니다."
1971년 8월 23일 공군 첩보대 인천파견대 소속 실미도 부대원들이 섬을 빠져나와 청와대로 향하던 중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서 자폭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와 각 군 수뇌부는 북파 부대를 해체했다. 북파 공작원 일부가 보안 유지를 위해 살해당한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공무원 시켜준다, 집 몇 채 살 돈 준다, 군대 계급장 달아준다면서 북파공작원을 모집했죠. 공군 북파공작원은 대부분 민간인입니다. 그게 원칙이었거든요. 현역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해요(1·21 사태). 인천파견대가 비밀리에 3년 넘게 김일성궁 폭파 훈련을 합니다. 형무소 수감자와 막일하던 이들을 모아 복수에 나선 거죠. 영화'실미도'에서 안 씨가 맡은 역할(최재현 준위)의 실제 인물은 김?? 상사예요. 내가 공군 정보교육대 교관실장할 때 내 밑에 있던 친구죠. 실미도 부대원들이 버스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후 정보장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는데 그때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네들 살겠다고 공작계획서 철(綴), 6·25전쟁 전사(戰史) 자료 일체를 소각해버려요. 90특무대원들은 자료가 인멸돼 국가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증빙 자료가 부족한 데다 동지들도 사망하거나 연락이 두절돼 입증이 어렵죠."
1965년 9월 20일~10월 29일 정영훈 간사 등 공작원들이 NLL 이북에서 수행한 작전이 공군의 마지막 북파 공작이다. 그는 1965년 8월 31일 군복을 벗은 후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 공작에 참여했다.'어부 112명 납북 사건'은 이때 벌어진 일이다.그는 특명을 받고 영미호, 영락호 2척을 빌려 사리원비행장 감시와 북한 기관원 납치 공작에 나섰다. 당시 공군 2325부대 말도파견대장(중위)이던 유인수(77) 씨의 증언은 이렇다.
"정영훈 씨 등은 인민위원장을 납치할 목적으로 북한 연백군 해성면 용적리에 침투해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사리원비행장 정보를 입수하라는 상부 특명에 따라 정영훈 지휘하에 하길수 외 2명이 북한 청산리 해안에 침투해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정영국과 접선한 후 본대로 귀환했다. 또한 숭어잡이 하는 북한 어민을 납치하고자 시도했으나 5~6명씩 모여 작업해 실패했다."
정영훈 간사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말도는 1·4 후퇴 때부터 북파 공작의 요지였습니다. 말도 이장에게 독립가옥을 거점으로 알선받은 후 영미호, 영락호를 공작선으로 삼아 NLL을 넘었죠. NLL 이북으로 넘어가면 항상 만선이었습니다. 대합은 너희가 차지하는 대신 우리를 도우라고 어민들을 회유했죠. 조개잡이 어민으로 위장해 북한 기관원 납치 활동을 벌였습니다. 북한 해주 인근에 무인도가 있습니다. 정영국이 그 섬에서 망원경으로 사리원비행장을 감시했고요."
그러던 중 1965년 10월 29일 오후 4시경 북한군 20여 명이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기습해왔다.
"5회 북파 공작 후 6회 때 눈치챈 것 같아요. 영미호, 영락호에서 김진선, 윤충광과 말도파견대 대원 김대중 병장이 나와 함께 M1 소총으로 대응 사격에 나서 북한군 접근을 막았습니다. M1 소총의 사거리가 250m인 반면 북한군 기관단총은 50m여서 어부 120명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어선 1척은 북한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요. 어부들과 함께 말도 해병대 경비초소로 귀환했습니다."
그와 공작원들은 AN-2기의 주·야간 비행훈련 상황과 연안 주변 동태를 감시했으나 특이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 이??가 허위 첩보를 제공한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우리의 공작 활동이 베트남 참전과 한일국교정상화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데 기여했다고 봐요."
그의 병적 기록은 1954년 9월 소위로 임관해 정보학교를 마친 뒤 특무전대 정보운영과원(1956년), 공군본부 정보국원(1957년), 미국 공군 정보학교 연수(1957년), 정보교육대 교관실장(1963년), 제23정보대 232파견대장(1963년) 등으로 복무한 후 공군본부 정보국 항공목표과원(1965년 8월)을 끝으로 전역한 것으로 돼 있다. 90특무대 경력과 북한 침투 공작은 물론 적혀 있지 않다.
90특무대 공작원들이 각 파견대 명단을 복원한 문건(왼쪽). [지호영 기자]
90특무대원 모두가 국가 보상을 받지 못한 건 아니다. 교동도파견대에서 첩보공작 교육을 받고 북한에 침투한 김?호, 김??, 김??, 이??, 박??(여) 씨 등은 2005년 특수임무 수행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미군 6006부대 소속으로 공작 활동을 벌인 것으로 판단돼 특수임무 수행자 인정이 취소됐으며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보상금을 토해내라고 했다. 김?호 씨 등은 소송을 제기해 대법원까지 간 후 보상금을 반납하지 않게 됐다. 대법원은 2014년 10월 11일 "6·25전쟁 당시 외국군 소속 부대에서 근무했더라도 실제 지휘는 국군으로부터 받았고 본인이 국군 소속으로 믿고 일했다면 한국 정부가 보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 취지로 김?호 씨 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 결과가 흥미로운 게 김?호 씨는 실제로는 미군 6006부대가 아니라 90특무대 소속이었다는 겁니다. 함흥교화소에 수감돼 있다가 국군에 의해 석방된 후 평양에 침투해 공작 활동을 벌인 대단한 분입니다. 미군 6006부대와 90특무대가 함께 공작 활동을 벌인 터라 공작원 중엔 자신이 미군 소속이었던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많아요."
실미도 대원 유족에게도 국가 배상 판결이 나온 적이 있다. 2008년 10월 20일 서울중앙지법은 실미도에 끌려가 북파 공작 훈련을 받다 동료들로부터 구타를 당해 사망한 이모 씨의 동생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씨에 대한 위자료 1억 원 등 1억86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유족이 국가로부터 이씨의 사망 사실을 통보받은 것은 2006년이다.
90특무대 제부도파견대 6명도 특수임무 수행자로 인정받았다. "제부도 교육대가 형식적으로는 미군 소속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 공군에 소속돼 공작 업무를 담당한 만큼 국군 소속으로 봐야 한다"고 2014년 11월 21일 대법원이 판시했다.
공군 기록에 90특무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료는 다 불탔다. 근거는 이것밖에 없다"면서 서류를 내밀었다. 공작원들이 90특무대의 각 파견대 명단을 복원한 것이다. 그는 최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변호사 없이 직접 소송을 진행한다.
"제부도 동지들은 법무법인을 통해 소송에 나서 승소했습니다. 공작원 대부분이 죽었고, 유가족들은 다들 형편이 어려워요. 변호사를 찾아갔더니 착수금만 500만 원이라더군요.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어요. 조국을 위한 무명의 헌신을 대한민국이 인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