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국정원 대통령 주연 영화에 30억 대주겠다

심의 허준 작성일 17.09.10 22: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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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면 한 30억원 정도는 대줄 수 있다.”

‘실력파’로 알려진 중견 감독 ㄱ씨는 2013년말~2014년초 서울 강남의 한 횟집에서 국가정보원 직원을 만났다. 국정원 요원은 ㄱ감독에게 미국 대통령이 직접 테러범들을 무찌르는 할리우드 영화 <에어포스 원>을 예로 들며 이런 “애국영화, 국뽕영화를 만들면 제작비를 지원할 수 있다”는 계획을 밝혔다.

ㄱ감독의 기억에 따르면, 국정원 요원은 “할리우드에는 대통령이 주인공인 안보 의식을 고취하는 영화가 많고 흥행도 한다. 대통령이 직접 액션도 하는 히어로물을 만들면 영화로도 안보를 할 수 있다. 국내 영화인들은 그런 인식이 없다”며 한국 영화계 풍토를 성토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이 주인공인 영화 제작에 구체적인 금액까지 제시하며 지원 의사를 밝혔다. ㄱ감독은 대구·경북(TK) 출신으로 과거 간첩이 등장하는 영화 연출에 관여한 적이 있다. ㄱ감독은 “진짜 연출을 할 생각이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어서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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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엔터팀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된 키워드에 특히 민감해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최근 유명 감독이 연출을 맡아 나름대로 흥행을 거둔 한 영화의 투자 관계자는 “(국정원 엔터팀 소속 요원 배○○이) 서초동의 한 커피숍에서 우리 쪽 영화 관계자와 만났다.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영화에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받아갔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사찰 범위는 국내 영화사는 물론 외국 직배사까지 포함했다. 한 직배사 관계자는 “국정원 요원이 수시로 투자배급사 직원들을 만나며 영화계에서 어떤 영화가 투자·제작되고 있는지 물으러 다녔다”고 증언했다.

이런 국정원의 활동은 박근혜 정권 시기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됐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로 해석된다. <한겨레21> 취재 결과,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는 대형 투자배급사부터 일선 감독에게까지 촉수를 뻗친 국정원 엔터팀의 활동은 박근혜 정부가 사활을 걸었던 ‘문화계 좌파 척결’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현실화하기 위한 손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한국 문화예술계의 이른바 ‘좌파 성향’을 바로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지난해 말 블랙리스트 사태 때 낱낱이 공개된 바 있다.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수첩 2014년 12월28일치를 보면, “<국제시장> 제작 과정 투자자 구득난, 문제 있어, 장악, 관장 기관이 있어야”라는 대목이 나온다. 청와대가 영화를 정치적으로 바라보고 정권 유지에 유리한 영화에 투자가 잘 이뤄지도록 개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반면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영화 제작에는 압력을 넣을 방안을 고민했다. 2015년 1월2일치 김영한 업무수첩에는 “영화계 좌파 성향 인물 네트워크 파악 필요”라는 대목이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된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 7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특검이 “박 전 대통령이 ‘영화 제작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이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데, 편향적인 영화에 지원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국정원 엔터팀은 이처럼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 작성에 필요한 영화계 밑바닥 정보를 수집하고, 명단이 완성된 뒤엔 집행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국정원 직원이 ‘애국영화, 국뽕영화를 만든다면 30억원 정도는 대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오랫동안 영화 투자 업무를 담당해온 한 관계자는 “보수정부 들어 이른바 현장에서 멀리 떠나 있던 ‘휴면 영화인’들이 건전 애국영화, 전쟁영화를 만들겠다며 수차례 투자를 요구해온 바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제시한 영화 주제는 육영수, 이승만 전 대통령 등을 노골적으로 내세운 작품들이었다. 이 관계자는 “영화에 대한 투자 결정은 ‘이념 문제’보다 ‘투자금 회수’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함량 미달이라면 우선 ‘메인 투자’를 잡아오라 말하고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규모의 영화를 만들려면 씨제이(CJ)나 롯데 같은 대형 투자사들이 전체 제작비의 절반 정도를 책임져야 한다. 국정원의 제안은 (메인 투자자를 확보하는 데) 역할을 해주겠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국정원의 투자 지원을 받아 실제 제작된 영화가 있는지는 앞으로 수사 등을 통해 밝혀져야 한다.

영화진흥위원회 한 고위 관계자는 “이들(국정원 엔터팀)의 활동으로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 영화판의 투자 등 중요한 의사결정이 크게 뒤틀렸다. 2013년 이후 박정희, 노무현, 친일 관련 영화에 대한 지원은 금기가 됐다”고 밝혔다. 또다른 영화계 관계자는 “이 문제는 보수와 진보로 나눌 일이 아니다. 자신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어떤 곳은 지원하고 다른 곳은 팽개치는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이런 반복을 막으려면 그동안 영화계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명백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 엔터팀의 활동에 대한 수사가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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