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1950년 7월 미군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300여 명을 사살한 사건- 입니다.
허나 이사건은 1999년이 되서야 밝혀졌습니다. 어째서 49년이 지난 후에서야 진상이 규명되었을까요?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였는데요, 당시 미군측은 소청을 기각하였고, 이 사건은 그대로 역사의 미궁 속에 묻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94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미국 AP에서 전세계적으로 조사를 나서 정확한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었습니다.
사전의 전개는 이렇습니다.
1950년 7월 25일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이 근처 산속으로 피란을 갔습니다. 그때 미군이 피란을 시켜준다며 산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당시 미군은 일본인 통역사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인 주민들은 7백여명의 피란민이 었습니다. 계속된 교전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어 계속해서 나아가다 노근리 근처에 다다랐습니다. 미군들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정지명령을 내린다음 도로와 인접한 철로로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후 피란민들의 짐들을 검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피란민들의 짐보따리에는 이불이나 보리쌀 따위밖에 없었습니다. 검사를 끝낸 미군들은 무전기로 연락을 하더니 사라졌고 이내,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피란민들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미군 폭격기는 20여분 동안 폭격과 함께 기총소사를 했습니다. 최소 1백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수로용 굴로 숨었습니다. 다시 미군 3~4명이 나타나서 "이제 진짜 안전한 곳으로 피란을 시켜주겠으니 모두 나오라"라고 말합니다. 허나 미군은 400여명의 피란민들을 1백여 미터 떨어진 쌍굴다리로 몰아넣었습니다. 수굴다리에서 한발자국만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을 발포하였습니다.
난 그때 목마름을 못 이겨, 시체가 둥둥 떠 있는 핏물을 쭉쭉 빨아 먹었습니다."
김학중 당시 19세
"엄마한테 물을 떠 드리려고 가 보니까 웅덩이 물 위에 피인지 기름인지 두꺼운 막이 생겨 있었어요. 그걸 밀치자 핏덩이가 마치 마른 진흙덩이처럼 갈라졌고 그 밑으로 흐르는 핏물을 뜰 수 있었어요."
양해찬 당시 10세
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
현재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근대 문화 유산(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으로 지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