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리즈[1-2편] : 조조 (자작)

축구왕배춘배 작성일 18.05.14 16: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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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 이어갑니다. 1부 링크는 아래에....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5555&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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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초상화,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씨춘추]에 이르길 : 무왕(조조)은 체구는 왜소하지만 의기양양하였다>

 

 

 

이 경악할만한 소식을 들은 동탁은 소제 복위라는 명분을 없애기 위해 소제를 살해하고 연합군 맹주인

 

원소에게 복수하기 위해 낙양에 머물던 그의 가문인 원가의 일원 60여명을 전부 도륙해버립니다.

 

이 사건은 되려 원소에게 동정론을 불러 일으켜 원소의 명성만 높여주고 명분을 쥐어주는 꼴이 되고 마는데..

 

그러나 이러한 과정들이 각 군벌들을 불편하게 했는지 한복은 하내에 모인 원소군에 군량을 대지 않았고

 

산조에 모인 장막 등도 직접 진격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아마 먼저 나서다가 군사적으로 손해를 본다면 이후의 일에서 주도권을 빼앗길 거라고 생각했겠죠.

(한 마디로 서로간에 신의가 없었음)

(연의에서는 연합군이 모두 한 곳에 모여서 진격한 것으로 서술했지만 이는 허구. 각지에서 따로 모여 진격함.
 ex. 원소는 하내, 조조는 산조, 원술은 남양 등)

 

이 연합군들이 어영부영 하는 동안 실질적으로 교전을 한 제후들도 단 4명뿐(포신, 조조, 손견, 왕광) 으로

 

이는 그 많던 제후들이 얼마나 몸을 사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연의에선 연합군 결성 후 동탁이 관을 지키며 나오지 않은 것으로 서술되지만 실제론 영천과 진류 지방으로
 먼저 영격했음. 왕광이 이에 맞서다 전사했으나 이 때 예주에서 병사들을 모아 대적한건 손견)

 

비록 대의를 위해 모였다지만 그 속내는 모두 달랐던거죠.

 

이 중에서 단연 손견의 공이 가장 컸고 가장 먼저 낙양으로 진격한 것도 손견이며 사실상 동탁은 손견에게

 

밀려 낙양을 초토화 시키고 장안으로 후퇴합니다. (손견 편에서 다시..)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조조는 동탁이 낙양까지 불태우며 장안으로 도망가 버리자

 

몸만 사리고 출격하지 않는 제후들을 답답해하며 설득해보나 듣지 않자 결국 휘하 장수들과 병사들만을 이끌고

 

동탁을 추격합니다. 추격하던 중 반격해온 동탁군 장수 서영군과 마주쳐 격돌하나 대패하고 심지어 조조 본인마저

 

화살에 맞는등 거의 죽기 일보 직전에 겨우겨우 장막 등이 머물러 있는 산조까지 도망가게 됩니다.

 

서영은 와해된 조조군의 뚝배기를 신나게 깨고 다녔으나 결국 완전히 궤멸시키는데는 실패했고

 

그대로 산조를 공략하는건 무리라고 판단해 군을 물리게 되는데 1부에서도 기술했듯이

 

이때는 조조 휘하에 유비, 관우, 장비도 함께 행동했었고 이들의 활약에 의해 서영의 조조군 완전 궤멸이

 

실패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실제 조조는 유비, 관우, 장비가 떠돌이였어도 그들을 매우 높게 평가함)

 

어쨌건 병력을 잃은 조조는 하후돈, 조홍과 함께 양주로 가서 4천여 병력을 모집해오나 중간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500여명만 남고 다시 병력을 잃게 되는데 이 때 반란을 겪는 혼란한 와중에 직접 반란군 병사 수십명을

 

도륙하는 등 (조조 무쌍..?) 그 와중에 무재를 뽐냅니다.

 

이후, 다시 병력을 모아 원소가 있는 하내에 합류했으나 역시 그쪽 상황도 막장이긴 마찬가지..

 

결국 반동탁 연합군은 해산되고 사실상 이 때를 기점으로 중앙 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며

 

드디어 군웅할거의 시대가 시작이 됩니다.

 

191년 7월, 원소가 한복을 협박해 기주를 접수하고 조조를 보내 동군의 흑산적을 치게 하는데 기존 동군태수였던

 

왕굉조차 막지 못했던 흑산적을 조조는 훌륭히 격퇴하고 이에 원소는 조조를 동군태수로 임명합니다.
(실제 이 시기에 조조는 변변한 근거지 조차 없는..원소의 부하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 대규모의 황건적이 연주를 침략해 연주자사였던 유대를 격파, 전사시키자 조조는 제북상 포신과 유대 부하들의

 

지지(진궁의 설득 덕분) 를 받아 유대의 세력을 흡수하고 그대로 황건적을 박살냅니다.

 

이후 항복해온 엄청나게 많은 황건적 유민들과 병사들 (청주병) 을 받아들여 명실상부 연주 제일의 세력이 되는데

 

이 활약상을 들은 원소는 조조를 연주목으로 임명하고 그 와중에 조조는 평소 있던 작은 원한조차 잊지 않고

 

모조리 복수하는 치졸한 짓을 합니다. -_-;;

(황제마냥 지 멋대로 지방관을 임명하는거부터 원소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
(조조의 속좁은 복수, 평소 업신여겼단 이유만으로 모조리 죽이고 멸족까지 시킴)

 

이후 원소가 공손찬과 대립하는 동안 조조는 공손찬과 연합전선이던 서주목 도겸을 견제하며 세력을 안정시켜 나갔고 

 

193년, 남양에서의 학정과 수탈 때문에 민심을 잃고 유표에게 압박을 당하던 원술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연주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뭐 나름의 명분은 있었지만 어쨌든 이 전투에서 원술은 조조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근거지(남양) 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양주 구강군 일대까지 쫓겨나게 됩니다.

 

조조가 원술과 싸우는 틈을 타 서주목 도겸은 도적 궐선이란 자와 연합해 연주와 서주의 경계 부근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이 와중에 도겸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에 조조는 격분해 원술을 격파하고 돌아와 도겸에게 반격을 시작하는데.. 이 때 바로 '서주 대학살' 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학살이 얼마나 지독했냐면 원래 서주 지방은 인구가 100만을 헤아리며 물산이 매우 풍부하고 인재가 많았던 곳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학살 이후에 사람이 씨가 말랐다고 할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가 될 정도....

 

사람 뿐만 아니고 개, 닭 등 가축까지 모조리 도륙해 강의 물줄기를 막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참상은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동탁의 난을 만나서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다가 동쪽으로 빠져나가 많은 사람이 서주 땅에 의지하였는데,
조조가 부임하여 남녀 수십만 명을 사수에서 파묻어 죽이니 물이 흐르지 않았다.
조조가 담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가 없자 마침내 떠났으며, 여, 수능, 하구를 공격하여 빼앗고 모두 도륙하였는데,
닭과 개 역시 다 없애니 텅 빈 읍에는 다니는 사람이 다시 없게 되었다."

<자치통감>


"조조는 지나는 길에 있던 취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시키고, 모조리 도륙(屠戮)하였다.
무릇 남녀 수십 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섯 현의 성읍에는 사람의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

<후한서>

 


물론 이 시기의 인권에 대한 개념이 현대와 같지 않고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긴 했으나

 

학살이란 행위는 당대에나 후대에나 모두 지탄받는 행위였고 학살을 행했던 주체 모두(백기, 항우 등) 끝이 좋지 않았음을

 

상기해보면 그 이전에도 인식이 매우 안좋았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이렇게 학살을 자행한 뒤 연주의 많은 명사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장막의 반란에 힘을 실어준 것을 보았을 때

 

당시 사람들에게도 무척 충격적인 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학살에 의해 서주 출신 인재들이 대거 남하해
(실제 오나라 대신의 주축들은 서주 출신들이 많음. ex. 장소, 장굉, 제갈근 등)

 

촉이나 오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므로 결국 천하통일을 자기 스스로 막는 결과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때 당시 어린 제갈량도 제갈근을 따라 남하했다고 함. 즉, 제갈량도 서주 출신)

 

어찌됐든 2차례에 걸쳐 파죽지세로 서주를 초토화 시키던 조조에게 연주에서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결국 도겸에게 복수를 행하지 못하고 연주로 회군하게 됩니다. (장막, 진궁, 여포의 반란)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연주에서의 상황은 매우 녹록치 않았는데

 

연주의 많은 명사들이 조조의 대학살극을 보며 그에게 등을 돌렸고 장막에게 힘을 실어주자

 

삽시간에 동아현, 범현 2개현을 제외한 연주의 대부분이 호응해 장막에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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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8개군, 도겸이 약탈을 자행했던 곳은 태산군이며 복양성(복양현), 범현, 동아현은 모두 동군에 속함>

 

 

연주는 8개군 80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물론 연주 전체가 조조의 완벽한 세력권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단 2개 현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대부분 장막에게 호응했으니 실질적으로 조조는 연주에서 영향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이에 조조는 황급히 회군해 여포가 주둔하던 복양성을 공략하는데 여포의 소극적인 태도와 전략적 안목을 비웃던

 

조조는 되려 여포에게 요격당해 대패하고 맙니다.

 

겨우 군을 수습한 조조는 다시 복양성을 포위해 100여일동안 대치를 이어가다 다시 한번 여포에게 패해

 

심각한 위기를 맞지만 원소에게 구걸하다 시피해서 병력 5천을 얻어와 겨우겨우 연명하며 계속해서 대치를 이어가다

 

황충(메뚜기떼)으로 인한 피해를 입자 서로 대치를 풀고 군을 물립니다.

(두번째 패배와 원소에게의 병력 구걸은 집해 후한서 기록. 정사에는 기록 안되어있음)

 

그리고 이듬해 벌어진 전투에서 드디어 조조는 여포군을 대파, 여포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유비가 있는 서주로 도망가고

 

장막은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가다 살해당했으며 그의 동생 장초 역시 농성하다 조조에게 함락당해 자살하는 등

 

이 반란은 195년이 되어서야 결국 진압이 됩니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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