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리즈[2-1편] : 유비 (자작)

축구왕배춘배 작성일 18.05.18 16: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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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맨주먹으로 일어난 일세의 영걸 유비' 편입니다.

 

유비는 당시 수 많은 군웅들 중에서 그 조조가 인정했던 유일한 군웅으로 조조와 함께 당대의 영웅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조보다 더욱 치열하고 극적으로 살아왔던 유비..


그의 실제 역사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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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 코에이 일러스트>

 


<초기 - 소년시절>
유비는 161년 생으로 자는 현덕이라 했고 유주 탁군 출신입니다.


비록 황족이지만 그의 조상은 전한 시절 경제의 후손이었으므로 그가 살던 후한에서는 전혀 대우받지 못하는

 

방계중의 아주 상방계인 그저 성만 유씨인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황족을 사칭했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비록 대우받지 못하긴 했지만

 여러 정황상 그리고 족보상 그는 황족이 분명합니다. 족보를 위조한게 아니냐 하는 주장은 당시의 인쇄술이나

 시대 정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주장이고 더군다나 당대에 아무도 이런 주장은 펼치지 않았는데

 후대에 와서야 이런 주장이 나온다는게 어이가 없을 정도..)

 

연의에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키는 172정도에 귀가 크고 팔이 길어 무릎까지 닿을 정도였다고 하며

 

이는 실제 정사에도 기록된 내용입니다. (매우 특이한 외모)

 

부친인 유홍을 일찍 잃어 생계가 곤란했기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나 신발을 짜서 팔아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다행히 그가 살았던 곳은 유씨 방계들이 모여 살았던 집성촌이었기에 친척들에게 이래저래 도움을 받아

 

15세때 유주의 명사 노식에게 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이 때 공손찬과 친분을 맺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학문에는 그다지 뜻이 없었는지 금새 실증을 내고 몇 년 뒤 고향으로 내려와 동네 유협 집단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이 때 당시의 유협 집단을 현재의 조폭과 비교하는 글들이 많은데 이는 과거의 시대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현재에 대입하려다 보니 생기는 오류로 이 시절의 유협은 말 그대로 협을 행하는 사람, 즉 협객이란 의미였습니다.

 사마천은 저서 <사기> 에도 협객열전 을 따로 두었을 정도로 그들을 매우 의미있게 평가했으며

 이는 당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지방에 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해서 생기는 부조리를

'자신들을 대신해 나서서 해결해주는' 유협들에 대한 인식이 당시 대중들에게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 당연히 이는 현재의 인식과는 큰 괴리가 있습니다. -
 한을 건국한 유방도 유협출신이었고 그 마을의 관리였던 소하와도 평소 친분이 있었던걸 보면 유협집단을

 단순한 범죄집단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행한 일은 범죄에 가깝거나 범죄 행위였지만 그런 행위를 통해 대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명성이 높아지는

 여러 경우들 (ex. 하후돈, 서서 등) 을 보면 이 시대에 범죄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게만 매도할 수 만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상인 소쌍과 장세평이란 사람이 이 유주 탁군을 지나다 우연히 유비를 보았는데

 

그 생김새가 범상치 않아 불러다 얘기를 해보니 과연 외모만큼이나 그 뜻도 범상치 않아 많은 재물을 주자

 

이에 유비는 이 재물을 바탕으로 집단을 크게 불릴 수 있게 됩니다.
(여불위 이래로 가장 남는 장사는 사람을 남기는 장사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일종의 투자였던 셈)

 

<초기 - 황건적의 난>

황건적의 난이 발발할 때 즈음, 유비는 평생을 함께할 그의 동반자들인 '관우와 장비' 를 만납니다.

 

(연의에서는 이 때 도원결의를 맺지만 이러한 장면은 창작으로 실제 의형제를 맺었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관우의 "죽기로 함께 맹세했다" 는 발언,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는 기록 등을 살펴볼때

 실제 의형제를 맺었다고도 볼수 있는 여러 정황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런 장면이 있었다는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창작이었다는 얘기일 뿐이지 유비와 관우, 장비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관계 그 이상이었고 그들의 신뢰관계는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을 만큼 매우 굳건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따르는 집단을 이끌고 유자평이란 사람의 부대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황건적과의 싸움에 뛰어들어

 

여러 차례 공적을 쌓았으며 난을 평정한 이후 그 댓가로 현위라는 벼슬을 받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평소 안면이 있던 독우가 유비가 관리하던 현으로 파견을 나오자 파직될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를 묶어서 끌고가 뚝배기를 깨버리려다가 그가 울며불며 애원하자 그냥 두들겨 패기만 하고 그대로 달아납니다.

(연의에서는 장비가 패지만 실제론 유비가 팸)

 

그 뒤 낙양에서 하진이 모병을 실시했는데 모병에 응한자는 지은죄를 모두 사하여 주겠다는 포고를 내립니다.

 

유비는 독우를 팼던 전과를 씻기 위해 이 모병에 응했고 그 댓가로 전과도 세탁하고

 

현위, 현령 등 낮은 벼슬들을 받아 전전하게 됩니다.

 

<초기 - 조조, 그리고 외인구단>

이 시기에 낙양에서 그는 평생의 라이벌 조조를 만나 조조와 함께 그의 고향인 패국으로 가 병사들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조조의 휘하로 종군하게 됩니다.

 

(연의에서는 공손찬의 부장으로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는 연의의 창작이며 실제 공손찬은 이 연합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반동탁 연합군에서의 교전 내용은 조조편 참고-)

 

이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쳤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조조는 이 전투 이후부터 항상 유비와 관우, 장비를 매우 높게

 

평가했고 그들을 휘하로 들이고 싶어합니다.

 

이후 반동탁 연합군이 해산하고 유비는 본래의 직이었던 현령으로 돌아가지만 황건적들에게 당해 그대로 부하들을

 

이끌고 평소 안면이 있던 공손찬에게로 갑니다.

 

공손찬 휘하에서 원소와의 전투에 동원되 최전방에서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평원군을 관리하는 평원상까지 오릅니다.


(이 평원군은 청주에 속하는 곳으로 공손찬의 세력이 유주, 병주를 넘어 청주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도를 보면 평원군의 위치는 원소가 있던 기주 발해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전략적으로 봤을 때,

 공손찬 자신은 유주에서 원소와 남북으로 맞서고 그 배후에 유비라는 송곳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원소의 입장에선

 매우 껄끄러운 위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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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요도시. 원소가 있던 곳은 기주 발해군 남피현(성). 그 남쪽에 평원이 있음>

 

 

 

이 시기에 공손찬의 휘하였던 조운과 처음 안면을 텄으며 조운은 후에 형의 상을 이유로 공손찬에게서 물러날 때

 

유비와 손을 맞잡고 후일을 기약합니다.


이 당시엔 유비도 어느 정도 명성이 생겼는지 황건적의 침입을 받은 북해 태수 공융에게 구원 요청을 받자

 

당대 유명인사가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기뻐하며 사자로 온 태사자에게 병력을 주어 구원하게 하기도 합니다.

(태사자와 함께 간건 연의의 창작)

 

(공융은 공자의 후손으로 유가가 널리 퍼져있던 이 시기에 유가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으며 사대부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학문 수준도 대단했음. -건안 칠자의 일원-)

 

어쨌든 원소는 공손찬과 관계가 점점 험악해지자 유표, 조조와 연수를 맺고 공손찬은 원술, 도겸과 연수를 맺으며

 

서로가 서로의 배후를 노리는 대규모의 국지전이 산발적으로 이곳저곳 에서 벌어집니다.


이 국지전의 와중에 조조의 부친 조숭이 도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조조는 이에 격분, 서주를 2차례에 걸쳐

 

침공해 대학살을 벌입니다. (서주 대학살)

 

<초기 - 서주 구원>

도겸은 이에 동맹이었던 공손찬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공손찬은 전해와 유비를 파견합니다.


이후 전해는 돌아갔으나 유비는 그대로 남아 조조와 싸웠는데 병력이 크게 열세라 패배했고

 

이 와중에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조는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연주로 서둘러 회군합니다.


도겸은 유비에게 고마움을 느꼈는지 인간적으로 매료되었는지는 모르지만(어쩌면 둘다?), 어쨌든 그를 꽤 마음에 들어해

 

병력을 주고 표를 올려 예주자사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해에(194년) 도겸은 서주를 유비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습니다.


서주의 백성들과 호족들은 이를 매우 환영하며 서주를 받아들이길 원하지만 유비는 겸양을 하고,

 

여러 사람(미축, 진등 등)이 설득하자 이를 받아들입니다.

 

(유비는 이때 소패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도겸이 죽고 그를 후임으로 임명하자 서주 사람들이 크게
 환영, 이에 유비는 바로 서주로 가려고 했음. 이 때 진군이 서주는 지키기 어려우니 받지 말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진군전- 정말로 서주를 받기 싫었으면 진군의 충고를 따랐어야 했고
 후에 실제로 진군의 예측대로 일이 흘러감. 사실 유비 입장에선 남의 밑에서 전쟁터를 전전하던 유랑군벌

 같은 입장이었는데 처음으로 후한 13주 중의 한 주를 맡게 됐으니 이를 거절하긴 매우 어려웠을 것임.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금싸라기 땅 서주였으니..)

 

그리고 주변 군웅인 원소와 공융도 이를 반겼는데 공융은 그에게 도움을 받아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원소는 유비가 서주를 받는다는게 공손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거라 판단했기에 굉장히 반겼으며

 

조조 또한 (원소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이..) 그를 진동장군, 의성정후로 높이며 일단은 서주의 주인으로

 

인정받습니다.

 

(공손찬은 인격적으로 큰 결함이 있었기에 이를 파악한 유비가 그에게서 벗어났다고 봐야함.
 특히나 당시 명망이 높던 유우를 살해한 사건이 유비가 이러한 판단을 하는데 큰 몫을 했다고 봄)

 

195년, 여름. 유비는 연주에서 조조에게 패해 떠돌아 다니던 여포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소패성을 내주어

 

그곳에서 머무르게 합니다.
(순전히 호의 때문은 아니었을 것. 인을 내세워 곤궁한 자를 내쫓지 않는 그의 평소 철학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서주를 지키기 위해 여포의 군세나 명성을 이용하려 했을 수도 있음)

 

이때 원술은 조조에게 영혼까지 털린 후 남양을 떠나 양주에 자리잡았는데 이 곳 역시 원가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라

 

다시 세력을 얻어 금새 강성해졌고 공손찬의 그늘에서 벗어나 원소 라인을 탄 유비를 공격합니다.(196년)

 

(원가는 본가가 있던 예주 뿐 아니라 형주, 양주, 사예 등에까지 영향력이 엄청났었음.
 유비는 서주를 얻은지 얼마 안됐고 서주 대학살로 인해 군을 많이 모집하지 못한 관계로 병력이 얼마 안됐기에

 이 틈을 노리고 쳐들어 갔다고 봄. 게다가 서주는 원래부터 금싸라기 땅이었고 유비는 원술 입장에선 듣보잡이었으니

 만만하게 본 것도 사실)

 

이에 유비는 하비성을 장비에게 맡겨 두고 본인은 관우와 함께 원술군을 요격합니다.


일진일퇴가 이어지며 원술은 점점 유비군을 이기기 힘들어지자 여포에게


"듣보놈이 서주를 차지하고 있는데 뒤를 쳐주면 쌀이랑 병기 보내줄테니 말만 해라"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냅니다. (여포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함..인성 쓰레기)

 

유비는 하비의 유력 호족인 조표와 사이가 평소 안좋았는데 이때 장비와도 다툼이 일어나 서로 군을 이끌고 대치하자

 

하비성은 혼란에 빠집니다.

 

조표는 여포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여포가 응해 하비로 진격해서 장비를 격파하고 하비성을 접수합니다.

(반란병들이 성문열어줌)


대치하던 조표는 장비에게 그 자리에서 죽고 장비는 유비의 군영으로 달아납니다.

 

(술먹고 조표를 때린 내용은 연의의 창작. 장비가 술먹었단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유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조표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려고 하다 대치한 것으로 봐야함)

 

하비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유비는 군을 물려 광릉에 들어가 계속 원술과 대치했으나 군량 사정이 매우 안좋아져

 

결국 패하게 됩니다.
(얼마나 사정이 안좋았는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곤 군을 수습해 해서로 군을 돌려 그곳에 머물렀는데 이 때 대부호 미축의 도움으로 겨우 기사회생 합니다.

 (미부인도 이때 얻음. 재산이 얼마나 많았던지 군대 하나를 먹여 살릴 정도..ㄷㄷ)


그러나 계속해서 미축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여포와 화해하고 이번엔 입장이 반대가 되어 유비가

 

소패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서주에서 유비의 명성을 여포가 간과한 것인지 순식간에 소패에 1만의 군사가 모이자 처음에 도움을 어느 정도

 

주던 여포는 덜컥 불안해져 유비를 공격하고, 결국 유비는 소패에서도 쫓겨나 조조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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