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리즈[2-2편] : 유비 (자작)

축구왕배춘배 작성일 18.05.21 17: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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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편>

1부 -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5555&page=1

2부 -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045&page=1

3부 -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246&page=1

4부 -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425&page=1

 

<유비편>

1부 - http://fun.jjang0u.com/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749&page=1

 

 

1부에 이어서 2부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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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소열황제의 초상화>

 

 

<중기 - 방랑>
유비가 서주를 잃고 조조에게 망명하자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여포를 공격합니다. <조조편 참고>


결국 여포는 격파되고 하비성에서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이때 여포를 보고 조조는 고민을 합니다.
(여포가 전투에서 어느 정도 능력을 보여준건 사실)

 

그러자 유비는 '정원과 동탁의 사례를 보지 않았느냐' 라고 한마디 해주었고 조조는 그 말을 따라 여포를 처형하라

 

이릅니다.  이에 여포는 유비를 노려보며 "귀 큰 놈이 가장 못믿을 놈이구나"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중원을 풍미했던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마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본인 인성은 생각못하고 남 탓 시전..)

 

그리고 이때즈음, 연의에도 나왔던 유명한 '논영회' (일명 영웅논담) 일화가 생기는데 아래는 정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연의에 나와서 창작인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실화임)

 

"이 무렵 조공이 선주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과 이 조조뿐이오.
  본초(本初)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이다."

 선주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비저(匕箸-수저)를 떨어뜨렸다."

<정사 선주전>

 

그리고 뒤이어 벼락이 내려치자 유비는 화들짝 놀란척 하며 놀라서 수저를 떨어뜨린냥 연기합니다.

 

"이때 곧바로 천둥 벼락이 치자 유비가 조조에게 말했다.

 "성인(聖人)이 말하길,'빠른 천둥과 거센 바람에는 필시 낯빛을 고친다.' 하셨으니 실로 그러합니다.
  한바탕 벼락의 위세가 가히 이정도군요!" "

<정사 선주전 주석 화양국지>

 

 

당시는 198년, 원소는 공손찬을 멸하기 직전으로 공손찬은 역경에 틀어박혀 오늘 내일 하는 와중이었고

 

원소의 위세는 당대에 맞설 자가 없을 정도로 천하 제일이었습니다.


이런 원소보다도 객장에 불과한 자기 자신을 더 높이는 조조의 평가에 유비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겠죠.


잘못하면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조조에게 붙잡혀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을 겁니다.

 

이에 연기로 태연하게 넘겼지만 이 후에 유비는 어떻게든 조조에게 벗어나기 위해 노력합니다.

 

199년, 유비가 여전히 조조 휘하에 있을 때 동승은 헌제에게서 밀지를 받아 조조 암살모의를 꾸밉니다.

 

이 모의에 그는 유비도 역시 끌어들였는데 관우는 조조와 함께 사냥을 나갔을 때 무리가 흩어지자 이 기회에

 

조조를 죽이자고 유비에게 권하지만 유비는 후일을 생각했을 때 그때 죽이는건 무모한 짓이라 판단, 이를 말립니다.


동승 일당이 거사하기 전, 마침 원술이 세력이 쇠퇴해 더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원소에게로 귀부하기 위해

 

북상을 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이에 조조는 유비에게 병력을 주어 이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리는데 이에 유비가 (내심 옳다쿠나 싶었음) 명을 받고


서주로 향하자 정욱과 곽가가 서둘러 달려와 그를 왜보내주느냐며 따집니다. <조조편 참고>


이에 아차싶은 조조가 추격하는 병력을 보내지만 이미 유비는 원술의 잔당을 격파하고 서주로 들이쳐 서주자사 차주까지

 

죽이며 서주를 점거한 뒤였습니다.

 

유비가 서주에 입성하자 서주의 대다수 군현이 이에 호응하였고 유비는 원소와 연수를 맺습니다.
(조조에 대한 반감 + 유비가 서주에서 얻은 인망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얼마 안있어 조조가 보낸 왕충과 유대가 군대를 이끌고 오지만 유비는 가볍게 이를 격파,

 

이에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하자 다시 요격하지만 대패하고 맙니다.


(유비도 어지간한 장수들은 찜쪄먹을 정도의 무재를 갖고 있었지만 조조에게는 역부족이었음.
 병력수나 병력의 정예함, 그리고 본인의 군략에 관한 기량면에서도. 그러나 이게 무재가 부족하다는 말은 아님.

 상대가 단지 굇수였을뿐...)

 

얼마나 대패였는지 서로간의 생사조차 모를 정도로 군이 무너져 관우는 하비성을 지키다가 조조에게 투항,

 

처자식마저 사로잡히고 유비 본인은 장비와 함께 원소에게로 달아납니다.
(장비가 망탕산으로 들어갔다는 건 연의의 창작. 이 시기에 유비를 따라간 것으로 판단됨)


그러자 원담이 직접 마중나와 유비를 맞아들이고 원소 또한 업에서 200리를 몸소 나와 맞이할  정도로 유비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유비는 평원상 시절에 공손찬의 휘하였는데 공손찬과 원소가 잠깐 휴전한적이 있었음.
 이때 원소의 아들 원담을 보고 무재가 있다고 판단해 그를 천거한 경력이 있어 원담은 유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음)

 

이 때는 동승의 조조 암살모의사건이 천하에 알려졌고 그의 배후인 동승과 헌제의 첩(동귀비)까지 모두 처형당했는데

 

오직 유비만이 살아남아 원소에게 명분을 줍니다.

 

이에 원소는 대군을 이끌고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 조조' 를 토벌하기 위해 남하합니다.
(이 무렵에 유비는 조운을 얻습니다)

 

마침내 관도대전 -<조조편 참고>- 이 일어나자 유비는 여남(원소에게 호응한 예주 일대)으로 보내져


유벽과 공조해 조조의 후방을 교란, 이 때 관우도 조조에게서 벗어나 유비에게 합류합니다.


그러나 조인이 유비가 이끈 병력은 유비의 병력이 아니라 원소의 병력인 것을 간파,


이 틈을 노려 유비를 치자 유비는 패배했고 다시 원소에게로 돌아가 유표와 연수해야 된다고 원소를 설득합니다.

 

이에 원소는 다시 유비를 여남으로 파견하고 과거 유비가 데려왔던 군세까지 모두 돌려줍니다.

 

유비는 또 다시 여남에서 공도와 공조해 후방을 교란, 조조는 채양을 보내 이를 격퇴하라 하지만 채양은 되려

 

유비에게 당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연의에서 나오는 관우의 오관돌파 희생양 채양은 실제로 이렇게 죽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원소를 격퇴하고 또 직접 군을 이끌고 오는데 이를 보고 당해내기가 어렵다 판단하여


유비는 군을 이끌고 유표에게로 향합니다.

 

(이 때, 유비가 원소의 군대마저 이끌고 하북과 예주를 두번씩이나 자유롭게 왕래한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토론을 벌였는데 현재로서는 당시 시대상 거점과 거점사이에 공간이 있었기에? -기둥뒤에 공간 있어요.. -

 무사히 통과했다거나 혹은 낙양 맹진항을 거쳐 갔다는 기록을 통해 강을 이용해 이동 후 산 사이로 이동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정확히 기록된 바가 없어 현재까지도 그냥 추측만 하는 실정임.

 이로 인해 유비패왕설 -일명 유패왕. 막는 애들 뚝배기 다 깨부시고 이동-  까지 나도는 등 현재까지 미스테리로 남아있음)

 

<중기 - 형주>
유표는 유비를 극진히 맞아들이고 신야현을 주어 그곳에 머무르게 합니다.

 

(조조, 도겸, 공손찬, 원소, 여포, 유표, 그리고 후에 유장, 손권까지 가는 곳마다 모두 유비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그에게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엄청났을 거라 여겨지는 대목.

 -기록에 한고조의 풍모가 있었다고 하는걸 보면...-
 원소와 유표에게는 조조에게 대항할 명분을 주었다는 점에서 플러스 요인까지 있었음)

 

이 곳에서 몇 년간 (조조가 하북을 토벌하는 사이) 유비 인생에서 몇 안되는 평화로운 기간을 보내지만

 

유비는 이러한 시기가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어느 날, 유표와 함께 있다가 화장실을 다녀온 후 눈물을 흘리자

 

유표가 연유를 물으니 말을 한동안 안타 넓적다리에 살이 붙었다고 한탄을 합니다. (비육지탄의 고사성어)

 

이 일이 있은 후, 조조가 업성을 공격하러 가자 유표는 유비를 보내 조조의 뒤를 치게 했는데 놀란 조조가

 

하후돈과 이전을 급파, 이를 격퇴하게 하지만 유비는 되려 이들을 끌어들여 박망파에서 복병을 이용해 크게 격파하고

 

다시 신야로 물러납니다.
(박망파 전투. 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첫 공적이지만 실제론 유비의 작품)

 

그 후 조조가 오환족의 근거지 유성까지 올라가자 이 틈에 허도를 노리자고 유표에게 권하나 유표는 이를 거절,

 

조조가 유성에서 돌아오자 그제서야 후회했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유비는 서서의 추천으로 드디어 제갈량을 얻게 되고 다시 한 번 비상할 준비를 합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너무 아껴 구신들 사이에서 불평이 일자 '물과 물고기' 의 관계를 들며 제갈량을 옹호하는데

 이 것이 바로 '수어지교' 고사성어)

 

208년, 드디어 원가를 멸망시키고 업으로 귀환한 조조는 수군을 조련하고 마침내 형주를 침공합니다.


때마침, 유표가 죽자 유종이 뒤를 잇고 유기는 하구로 내쫓겼는데 채씨 일족을 포함한 모든 형주의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권합니다. 유종은 처음에 거부하나 부손이 설득을 해 결국 조조에게 항복을 하고 맙니다.

 

부손과 유종이 나눈 대화를 보면 '유비가 형주군을 이끌고 조조와 싸워도 힘든데 유종이 유비보다 낫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설령 유비가 조조와 싸워 이긴다고 하더라도 형주는 유비에게 빼앗길 것이다' 라는 논리를 펼치는데

 

이는 유비가 형주 전체에 얼마나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는 유종과 그 측근들간에 깊은 논의가 아니라 순식간에 이루어진 결정이었기에

 

유비는 이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는데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되자 크게 격분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할 지 서둘러 대책회의를 하지만 사실상 답이 없는 상황.
(조조의 본대는 앞에 있고 뒤는 조조에게 항복한 형주군. 사실상 고립되었음)


게다가 그 조조가 온다고 하자 공포에 질린 백성들마저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상황이었으니 

 

유비 입장에선 암담했을 것입니다.
(조조와 유비의 이미지가 당시 백성들에게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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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형주지도. 남군(양양성, 강릉성)과 남양군(완성, 신야 등)은 형주의 중심지였음> 

 

 

제갈량은 유종을 공격해 양양성을 빼앗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조조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계책을 올리지만

 

유비는 유종을 공격하면 죽어서 유표의 얼굴을 어찌 보겠느냐며 이를 거절하고 결국 강릉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하는데

 

무려 10만의 백성이 유비를 따라 나섭니다.


조조는 왜인지 모르게 한달여간이나 형주 초입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유비가 한참 전에 남하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자

 

호표기(조조군 최정예 특수기병) 5천기를 보내 그들을 추격합니다.


따르는 백성들이 너무 많고 그들의 짐까지 모두 수레에 싣자 치중대만 수천대에 이르게 되니 겨우 하루에 4km정도를

 

행군하는게 고작.. 이에 유비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관우와 무리 일부를 떼어 배 수백척에 나누어 싣게 하고 물길로

 

강릉으로 향하게 했고 본인은 다른 일행들과 여전히 육로로 향하다가 장판파에서 호표기에게 후미를 공격당하게 됩니다.

 

이에 부하들은 백성들을 버리고 가자 하지만 유비는 이를 거부, 결국 호표기에게 군대가 와해당하고

 

민간인들은 사방팔방 흩어지게 되었으며 이 와중에 서서는 모친이 조조군에 붙잡히자 유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조에게로 갑니다.
(조조가 서서를 얻기 위해 모친의 편지를 이용했다는 내용은 연의의 창작. 이 때 헤어짐)

 

유비는 가족들까지 모두 잃고 겨우 측근 몇 명과 도망치는 일생일대의 위기 상황을 맞지만 장비가 장판파에서

 

기병 20기와 함께 다리 앞에 선 채,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

 

고 외치자 아무도 감히 덤벼들지 못해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 부분이 무려 실제 정사에 기록된 내용. 21 vs 5000 상황에서 패기 ㄷㄷㄷ...)


또한 조운이 단기필마로 유선과 감부인을 구해오고 (유비군은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굇수들이..)


때마침 관우마저 수군을 이끌고 당도해 마침내 그에게 구원받아 배를 타고 하구로 향하게 됩니다.

 

 

비록 대패하긴 했지만 유비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인의의 유비' 라는 타이틀을 전국의 백성들에게


알릴 수 있었고 반조조의 기치에 구심점 역할을 하며 주가를 크게 올립니다.

 

 

이 때, 동오에서 노숙이 유비를 찾아옵니다. 노숙은 유비와 하구까지 함께하며 손권과 동맹을 맺을 것을 청합니다.

(노숙은 이전에 이미 유비를 당대의 영웅으로 평가)


이에 유비가 그 말을 들어보니 옳다고 생각이 들어 제갈량을 노숙과 함께 손권에게 보냅니다.


제갈량은 손권을 만나 대담하게도 유비를 높이고 손권을 도발하는데 이에 손권이 분노하며 조조와 싸울 것을 결심합니다.


(이 내용은 제갈량전과 노숙전의 기록이 약간 어긋나는데 제갈량전에서는 장판파에서 유비가 공격당해 위급해지자

 제갈량이 나서 손권에게로 가 동맹을 요청하는 것으로, 노숙전에서는 노숙이 유비를 찾아와 동맹을 요청하고

 이에 응한 유비가 제갈량을 보낸 것으로 나옵니다.
 선후관계, 그리고 당시 상황, 노숙의 위치와 발언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 했을 때 노숙이 먼저 유비를 찾아와

 동맹을 제의하고 유비가 이에 응해 제갈량을 보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적벽대전이 발발. 주유군과 유비군은 적벽에서 조조군을 완전히 박살내고 조조는 쫓겨서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길도 아닌 곳(화용도) 을 개척해가며 도망쳤고 주유와 유비는 뒤를 끊기 위해

 

남군(강릉)을 지키던 조인마저 1년여간 대치 끝에 격파, 마침내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끕니다. <적벽대전 조조편 참고>
(유비 인생에 있어서 조조와 정면으로 맞붙어 처음으로 이긴 전쟁. 유비는 조조와 조인 - 자타공인 조조군 최고사령관-

 을 제외한 조조군 누구에게도 진적이 없음)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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