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리즈[2-3편] : 유비 (자작)

축구왕배춘배 작성일 18.05.24 15: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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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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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246&page=1

4부 - /chalkadak/view?db=160&search_field=&search_value=&no=356425&page=1

 

<유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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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관우, 장비. 코에이 일러스트>

 


<말기 - 형주점령>
마침내, 적벽대전에서 승리 후 남군을 지키던 조인마저 쫓아내자 형주 북부(남양군, 남군 일부)를 제외한

 

형주의 나머지 부분은 무주공산 상태가 됩니다.


원래 형주는 유표의 땅이었기에 적합한 승계자인 유기가 형주를 얻는게 옳았고 다들 아시다시피 유기는 유비와 같은

 

황실의 종친이었으며 또한 그는 유비에게 여러모로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손권은 다만 유비와 함께 조조의 군세를 막기 위해 군을 일으켰을 뿐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유비는 자연스럽게 유기를 내세워 형주를 접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이 남군을 지키지 못하고 퇴각하자

 

주유가 남군일대를 장악하면서 (마침 유기마저 사망) 지분 할당에 대한 문제가 불거집니다.

 

유비 또한 손권 못지 않게 병력을 이끌었고 또한 그의 군대가 이룬 공적도 상당했기에 자연스레 (유기의 뒤를 이어)

 

자신이 형주를 차지하려고 했지만 손권의 입장에선 본인도 병력을 크게 소모해 형주까지 쳐들어가 조조군을 물리쳤는데

 

그대로 군을 물릴수는 없는 노릇.

 

지분을 받아 남군 일대를 소유했으나 그 상황에서 동오 세력의 역량으론 형주를 유지할 수 없었고 전투중 부상을 입었던

 

주유마저 사망하자 노숙은 남군을 어차피 유지도 못할거 유비에게 빌려주자고 합니다.


(이 때 유비는 남군의 남서쪽을 따로 받아 공안으로 개칭한 후 점거하고 있었음.

 노숙이 빌려주자고 한건 주유가 차지했던 남군의 나머지 부분. -노숙전-)

 

(이 부분에 대해서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도 많고 동오의 기록인 오서에는 동오에게 유리하게,
 헌제춘추와 같은 다른 역사서에는 유비에게 유리하게 적혀 있어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각종 커뮤니티 키보드 배틀의 주요 떡밥중 하나)

 

어찌됐건 유비는 형주 남부 4군 (무릉, 영릉, 계양, 장사)을 모두 차지했고 기존의 하구(강하군 일부) 에 더해

 

남군마저 얻게 되자 명실상부한 형주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들고 있던 붓을 떨어뜨릴 정도로 크게 놀랍니다.
(북부 지역은 여전히 조조의 세력. 손권이 차지한건 강하군 일부, 장사군 일부)

 

그리고 본격적으로 각자의 대의가 형주에서 충돌하게 되는데, 주유는 살아 생전 감녕이 제안한 천하이분지계를 주장해

 

형주를 중심으로 익주를 취하려고 했고, 제갈량의 융중대(천하삼분지계) 역시 형주를 취해야만 하는 것 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분란은 필연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으니..
(이 모든 대전략에 형주가 중심이었음)


주유는 죽었지만 손권은 그의 대전략에 따라 익주로 출병하려고 했으나 유비가 갖은 핑계를 대며 그의 군세를 막아서자

 

손권은 할 수 없이 이 계획을 철회합니다.

 

(동오세력은 형주조차 취하지 못했는데 익주까지 친다는건 매우 무리수였고 이에 대한 피해를 손권 혼자서 오롯이

 짊어진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것도 아니었으니 당시 동맹이었던 유비로선 아직 점령지를 완전히 복속시키지도 못했는데

 이러한 피해를 함께 감당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음. 그러나 종친을 치게 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댄 건 패착이라고 봄.

 이것이 결국 익주를 취할 때 유비에게 오명을 안겨주었으니..)

 

이렇게 손권과 유비가 형주를 나눠먹고 점령지를 안정화 시키고 힘을 기르고 있을 때, 북쪽의 조조는 종요를 시켜

 

한중을 병탄하게끔 합니다.

 

그러나 이를 의심한 관서군 (마초 등)에 의해 막히고 이에 조조는 직접 관중으로 출병하여 마초와 전투를 벌입니다.

-조조편 참고-

 

 

<말기 - 익주침공전>
익주의 주인 유장의 부하 중 장송이란 사람이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치고 한중을 얻자는 계책을 올립니다.

 

이에 유장은 계책을 받아들여 유비를 익주로 불러들입니다.
(실은 평소 유장의 부족함을 한탄하던 장송과 법정의 유비에게 촉을 넘기기 위한 계책이었음.)

 

이 때의 유비는 익주에 들어가기까지 상당히 고심을 했는데 아래는 방통과 유비가 나눈 대화의 기록입니다.

 

" "형주는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吳)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曹氏)가
   있어 정족지계(鼎足之計)의 뜻을 펼치기에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益州)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 병마(四部兵馬)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보화(寶貨)를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만 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急)하면 나는 관(寬-너그러움)하고 조조가 포(暴-사나움)하면 나는 인(仁)하고
   조조가 휼(譎-속임)하면 나는 충(忠)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小故)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방통이 말했다,

  "권변(權變-형편에 맞추어 대응함)할 때는 오직 한 가지 길로 평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겸약공매(兼弱攻昧-약한 자를 아울러 강한 자를 공격함)는 오백(五伯-춘추오패)이 했던 일입니다.
   역취순수(逆取順守-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킴)하여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유비가 마침내 이를 행했다. "


<정사 삼국지 방통전 주석 구주춘추>

 

(유비가 평소 어떤 사상으로 난세를 헤쳐왔는지 알 수 있음.

 장송이 유비를 찾아와 내통할 뜻을 밝혔고 그들이 짠 계책을 알려주자 방통이 이 호기를 놓칠 수 없다며 설득하는 내용.

 이 때에 익주를 취하고자 생각했음을 알 수 있음)

 

유비가 익주에 도착하자 유장은 병사를 더하여 늘려주었고 유비는 장로를 치는 시늉만 하며 주변을 위로해

 

익주의 인심을 차츰 얻어나갑니다.


이 때에 유장이 유비를 만나고 유비군을 위로하러 직접 찾아 오는데 방통이 연의에도 나오는 3가지의 계책을 올립니다.


유비는 상책(유장을 기습), 중책(철수하는척 하며 관문을 지키는 양회, 고패를 참수하고 성도로 진격),


하책(영안 지방까지 물러나 형주와 연결해서 천천히 진격) 중 중책을 택했고,

 

때마침, 손권이 조조에게 공격받아 구원을 요청하자 이를 핑계로 형주로 되돌아가며 군사(1만명)와 물자를

 

유장에게 요청합니다. (명분은 충분했음)


유장은 이 요청의 반만 들어주었고, 이 철수가 진짜인줄 알았던 장송이 당황하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그의 형 장숙이

 

유장에게 장송이 유비군과 내통했다고 꼰지르고 맙니다.


이에 빡친 유장은 장송을 참수해버리고 유비군을 의심해 관문을 걸어 잠궈버리자 이에 열받은 유비군이 유장군을 침공,

 

익주 침공전이 발발합니다.


이 와중에 낙성 점령전에서 방통이 36세의 젊은 나이로 유시에 맞아 사망.

 

유비는 낙성을 점령하긴 했으나 방통을 잃은 것을 매우 비통해하며 결국 형주에 지원을 요청,

 

제갈량이 형주를 관우에게 맡기고 장비와 조운을 대동한 채 익주 점령전에 나섭니다.

 

(사실상 올스타급 멤버. 유비는 황충과 위연을 데리고 있었고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를 데리고 왔으니 관우를 제외한

 유비군의 올타임 레전드 멤버가 모두 출격함)

 

유장군은 각지에서 따로 밀고 들어오는 유비군에게 무너졌고 유비군은 성도까지 진격,

 

때마침 마초까지 유비군에 귀부하자 유장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항복하고 맙니다.


이에 유비는 익주목을 받아들이며 기존 익주계 인사뿐 아니고, 유장의 친인척, 평소 자신을 안좋게 보던 자

 

모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골고루 관직을 분배해 익주를 다스리게 하니 익주지방은 순식간에 유비의 다스림에 순응해

 

자연스레 그의 세력에 편입이 됩니다.
(자타공인 정평이 난 유비의 용인술 ㄷㄷ..)


215년, 유비는 '익주를 얻었으니 형주를 내놓으라' 는 손권의 서신을 받습니다.


이 때, 사자로 온 사람은 제갈량의 형 제갈근이었으니 손권은 일부러 그를 보냈을 겁니다.


유비는 그에게 량주(관서지방. 즉, 서량) 를 차지하면 돌려줄테니 유난떨지 말고 가만있으라는 식의 답변을 줬고

 

이에 빡친 손권이 여몽을 보내 형주 남부지방(장사, 계양, 영릉)을 강탈하자 유비 또한 격분, 직접 군을 이끌고

 

관우와 함께 익양 지방에서 대치합니다. (익양대치)


이 때, 북쪽에서 조조가 장로군을 격파하고 잇따라 한중을 접수하자 위기감을 느낀 손권과 유비는 직접 만나 합의하여

 

강하, 장사, 계양은 손권의 소유로, 남군, 무릉, 영릉은 유비의 소유로 하며 형주 문제는 이대로 일단락 시킵니다.

 

 

<말기 - 한중왕>
218년, 유비는 익주를 안정화 시키고 힘을 길러 드디어 한중으로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합니다.


그리고 한중을 지키던 하후연과 부딪혀 이를 크게 격파해 하후연을 죽이고 한중을 점거합니다.


이에 조조가 유비를 격퇴하러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하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조조군이 패배하고 물러나니

 

유비는 마침내 한중을 완전히 복속시킵니다.


그리고 위연을 한중태수로 임명하고 본인은 위왕에 오른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등극,


이것으로 (불완전하지만) 제갈량이 융중에서 유비에게 주창했던 융중대(천하삼분지계) 가 꼭 10년만에 완성이 됩니다.


(당시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유표에게 빌붙어 있던 유랑군벌에 불과했는데 제갈량을 만나 그의 대전략에 따라

 모든 계획을 이뤄냈으니 이 순간 정말 감개무량 했을 것. 이 때야 말로 유비가 가장 빛나던 때가 아닐까..)

 

그러나 219년, 한중을 점령하고 관우의 북진까지 이어져 천하를 위진시키던
(실제 위나라 곳곳에서 유비, 관우에 호응해 반란이 일어남)


유비군은 뜻하지 않게 손권군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명백한 통수) 관우가 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유비는 이 소식에 크게 격노, 동오에 복수를 준비하는데 그 다음해에 조조가 죽고 뒤를 이은 조비에게 헌제가 제위를

 

찬탈당했단 소식까지 들립니다.


유비는 이 소식에 상복을 입고 통곡하는 등 중차대한 일을 연속적으로 맞습니다.


그리고 221년, 드디어 후한을 이어 촉한이 건국되고 유비는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촉한 대신 계한이라고도 불림. 말 그대로 마지막 한이란 뜻. 전한-후한-계한으로 부르는건 촉한 정통론에 입각한 시각)


다시 유비는 동오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장비와 강주에서 만나기로 정했으나 막 출발하던 때에 범강과 장달에게

 

장비마저 살해당하자 유비는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 합니다.

 

게다가 범강과 장달은 그대로 오로 도망갔으니 유비의 동오에 대한 분노는 하늘 끝까지 닿을 정도..
(관우사망-헌제폐위-장비사망. 유비의 입장에선 영혼의 동반자 관우와 장비의 사망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불러왔을 듯...)

 

<말기 - 이릉대전>
222년, 유비는 관우의 복수와 형주의 수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본대 4만군사 (황권의 분대+무릉 남만족 3~4만.

도합 7~8만 정도의 대규모) 를 직접 이끌고 형주를 침공하며 삼국지 내 3대 대전중 마지막 대전인 이릉대전이 발발합니다.


촉한 내의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심지어 제갈량마저) 유비의 입장으로선 관우의 복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며 게다가 형주의 수복은 위를 압박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니 이곳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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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촉과 오의 영역과 이릉의 위치. 유비는 왼쪽의 경계선부터 이릉까지 밀고 들어갔으며 이 때 까지 동오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림>

 


대전 초기, 유비는 역전의 용사답게 초반에 강하게 동오를 몰아붙이며 이릉까지 동오군을 몰아냅니다.


심지어 이에 호응해 형주의 각 군현들이 동오에 반란을 일으키자 동오군은 동요해 크게 사기가 꺾였는데 (손권도..)

 

여몽의 뒤를 이어 오군 총사령관이 된 육손은 이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유비군을 주시하다가 이릉에 친

 

유비의 진을 보고 적당한 날을 잡아 화공(기책)을 써 유비군을 크게 격파합니다.

(정면 싸움에선 번번히 패배함)


이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항복한 촉의 장수들은 기록된 것만 무려 318명으로 이중에 열후에 오른자가 42명,

 

장군이나 낭장으로 임명된자가 100명이니 실질적으로 이 전쟁에서 촉의 2세대 인재풀이 전부 날라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대패를 당합니다. 심지어 분대를 이끌던 황권마저 고립되 위에 투항할 정도였으니...

 

(촉의 1세대 장군들에 비해 2세대 인재들이 그 명성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결코 능력이 부족한 인물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길게 살아있었으면 촉을 융성하게 할만한 일화를 보이는 실력자들이 굉장히 많았음.

 이 전쟁 한방으로 인해 그 인재풀이 전부 날아갔으니 제갈량이 느꼈을 암담함은..)

 

유비는 대패하고 후퇴하며 남은 군을 수습해 백제성(영안)으로 들어갑니다.
(대패한 것에 비해 살아남은 병사들이 꽤 됨)


유비가 이곳에 머물러 있자 손권은 크게 승리하긴 했지만 다시 불안해져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고

 

이에 유비가 수락하며 다시 촉오 동맹이 성립됩니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사망, 이릉에서의 대패, 수많은 장수들의 사망 & 투항 소식까지 연달아 겪자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223년 백제성에서 사망합니다.

 

 

- 후기 -

 

# 호표기의 대장 조순은 장판파의 전투에서 유비의 두 딸을 잡았고 그녀들은 결국 조씨문중에 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장비는 하후씨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들이니 어찌보면 조조와 유비 진영은 서로간에 혈연으로 얽혀있던 셈입니다.

 

# 유비의 군략은 분명 최고의 사령관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예 핫바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유비가 평생 상대하며 정면으로 맞붙어 패했던 자는 조조, 조인, 육손 이 셋 뿐이었고

 

  (여포, 원술은 후방교란이나 군량 부족 등의 이유가 있었음) 이들은 자타공인 동시대 최고급 사령관이었습니다.

 

  그 외에 어지간한 군재를 가진 인물들은 유비에게 상대가 안되었을 정도.

  (ex. 하후돈, 하후연, 차주, 왕충, 유대, 우금, 장임, 유괴 기타 등등)


  유비의 군략에 대해 대차게 까는 주된 떡밥중 하나인 이릉대전 마저도 살펴보면 유비는 그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진세를 구축했고 육손이 이 빈틈을 제대로 노려 일격을 먹인 것일 뿐이지 유비에게 어떤 큰 실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틈을 보인게 실책이라면 실책. 숲 근처에다가 진을 구축한 것)


  조비는 유비의 진세를 보고 패배를 예상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군재가 그닥 뛰어나지 않은 인물이었으므로

 

  새겨들을 것이 못되고 제갈량이 진을 그린 그림을 보고 패배를 예상했다는 것은 연의의 창작입니다.

 

  당시엔 아무도 유비에게 진세에 대한 조언을 올리지 않았단 것이 팩트입니다.


  요약하자면, 유비는 최고급은 아니지만 군략에 대한 재능이 수준급으로 있었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 유비의 인망은 대단해서 가는 곳마다 그곳의 명사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 군웅들에게까지 모두 극진히

 

  대접을 받았습니다.

 

  서주에선 도겸이 두 아들을 제치고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주고 형주에선 유표에게 굉장한 신임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유기도 그에게 의지한 사실, 조조가 내려왔을 때 수많은 형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따라갔던 점,

 

  그리고 후에 형주가 동오에 복속된 후에도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유비에 호응한 점, 익주 점령전 당시

 

  길지 않은 시간동안 점령지를 안정시킨 점 등을 살펴보면 그가 머물렀던 곳에서 그의 인망이 백성들과 지방 호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100%라는건 없기에 그 와중에 유비에 반대하는 자, 유비가 패배하자 반란을 일으킨 자
   등도 있긴 했음. 그러나 이는 위나 오에 비하면 조족지혈 수준)


  그의 인망과 이미지와는 별개로 유비는 분명히 어려서부터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비와 제갈량 이하 촉의 최고위급 간부들은 유비가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 유수의 예를 따라 새로운 한을 건국하길


  원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헌제폐위 당시 발빠르게 촉한을 건국하고 멀쩡히 살아있는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발표하는 부분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찌됐든 유장을 배신했던 전과 (명분은 분명히 있었음) 가 있기에 유비가 음흉한 인물로 자주 곡해되곤 하지만

 

  이것은 연의에서의 그의 이미지를 실제 역사의 인물에 덧씌워놓은 것으로 당시 상황과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유비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의 선택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그의 인재보는 눈은 정평이 나있었는데, 그가 한 인재에 대한 평가가 거의 다 들어맞은 점을 보면 사람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능했다고 판단됩니다. (ex.관우, 장비, 마속 등)


  본인을 싫어하는 인물이더라도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면 직접 만나 설득을 하기도 했고(ex.유파)


  그가 높게 평가했던 인물들은 모두 굵직굵직한 업적들을 쌓은 것을 보면 그의 사람보는 눈이 특출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장합, 진등, 전예 등)


  물론 이것이 난세를 헤쳐가는 데 매우 큰 힘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 동시대 누구보다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유비.


  그와 방통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비는 평생 인의를 내세워 그것을 대의명분으로 삼아왔고 급박하고 위태로운

 

  지경에도 이러한 신념을 쉽게 굽히지 않았습니다.(장판파)


  조조와 유비는 조조가 평가한 당대의 두 영웅 답게 서로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둘은 뚜렷하게 대비되는 노선을 가진 채 난세를 굵직하게 헤쳐왔기에 서로를 더욱 돋보이게 하며

 

  역사의 많은 드라마틱한 연출을 이끌어냈는지도 모릅니다.


이상으로 유비편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편은 "동오에 위업을 세운 손가 3부자"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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