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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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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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 코에이 일러스트>
이번 편은 '강동에 위업을 세운 손가 3부자' 편입니다.
조조와 유비에 가려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아왔던 손가의 실제 역사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손견>
자는 문대이며 156년 생입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오군에서 벼슬살이를 해왔으므로 아마 오군의 유력한 호족가문 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수는 정사를 편찬하며 '아마도' 손무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자) 의 후손일 것이다 라고 추측을 했는데
이것이 '손견은 실제로 손자의 후손이다' 라고 와전되어 현재까지 잘못 알고 있는 분이 많으나
진수가 저렇게 적어 놓은 것은 추측이고 당시에도 그의 족보 기록에서 손무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기에
저런 식으로 적어놓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손무가 춘추시대에 오에서 벼슬을 했던 점을 들어 그의 후손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의 말년을 오에서 마감했는지 아니면 오를 떠나 다른 곳으로 망명했는지 기록된
바가 없음. 다른 곳으로 떠났을 가능성도 굉장히 높으므로 손견은 손무의 후손이 아닐수도 있음)
손견의 아버지 손종 역시 오군의 관리였으므로 손견은 이른 나이에 현의 관리가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대담하고
무예에 재능이 있었는지 17세의 나이에 수적을 잡아 죽이는 등 동네에서 유명세를 떨칩니다.
같은 해에 회계군에서 허창과 허소란 사람이 난을 일으키자 손견은 오군에서 병사 1천명을 모집하여
관군과 함께 이들을 토벌합니다.
(조조는 고향에서 3천명을 모집했고 손견은 1천명을 모집. 조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군세 역시 일개 가문에서 감당하기에는 굉장히 큰 규모였으므로 가산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음)
이 공으로 염독현 (서주 광릉군) 의 승이 되었고 이후에 우이현 (서주 하비국), 하비현 (서주 하비국) 에서 역시 승으로
벼슬을 지냅니다.
강표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관리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왕래하며 따르는 자가 수백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상당한 명성을 쌓음. 이 나이의 유비는 건달생활 하고 있었고 조조는 여자 겁탈하러 다님)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대장군 하진 이하 북중랑장 노식, 좌중랑장 황보숭, 우중랑장 주준,
동중랑장 동탁 외 기타 등등 을 임명해 난을 진압하라 이릅니다.
이에 주준은 당시 눈여겨보던 하비승 손견을 좌군사마로 삼았고 향리의 장정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서자
손견은 추가로 천여명의 장병을 모아 출격해 곳곳에서 승리합니다.
여남과 영천의 황건적들은 계속된 패배에 완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했는데 손견이 앞장서서 성에 올라가자
뒤따르는 병사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성에 올라 결국 완성을 함락, 그 공으로 별부사마에 임명됩니다.
(이미 젊은 나이에 상당한 용맹을 지녔고 군을 이끄는 능력 또한 굉장히 뛰어났음.
그리고 이 승이라는 직책은 문관 직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명성을 떨쳤으니 비록 공부는 싫어했다지만
머리 자체는 꽤 좋았음을 추측할 수 있음)
이 해 겨울에 서량에서 변장이란 사람과 한수가 반란을 일으키자 동탁으로 하여금 이들을 토벌하라 했으나
동탁은 내내 전투를 하는둥 마는둥 하며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공이 없자 조정에선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이들을 진압하게 합니다.
장온은 동탁을 파로장군으로 삼고 손견을 군사로 삼아 출정하며 동탁을 불렀는데 동탁은 기일이 지나 도착한 주제에
이걸 가지고 뭐라하는 총대장 장온에게 싸가지없이 굽니다.
이것을 본 손견은 세가지 이유를 들어 동탁을 죽여 군의 위엄을 세우자하지만 동탁은 서량출신으로
강족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서량으로 출정나가야 되는 장온은 이를 거절했고 동탁과 손견은 이후부터 서로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이 전쟁에서 동탁만이 공을 세우고 군을 보전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패.
손견은 적절한 계책을 올렸으나 이 전쟁의 총대장인 장온부터 이미 군재가 모자란 인물이었음)
이 후에 또 구성이란 자가 1만여명을 이끌고 장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성읍을 공격하자 조정은 손견을 장사태수로
임명해 이를 토벌하게 합니다.
역시 손견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달만에 이들을 모조리 격파해 버렸고 영릉과 계양에서 주조와 곽석이 구성과
연계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내친김에 이들마저 토벌, 이 공으로 오정후(烏亭侯)에 제수됩니다.
189년, 동탁이 조정을 접수하고 횡포를 부리자 여러 군웅들이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
손견 또한 군을 이끌고 여기에 참여하며 "지난날에 장공(장온)이 내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것 아니냐" 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군을 이끌고 북상을 하는 도중 가는 길에 지난날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형주자사 왕예를 죽게 만듭니다.
이 후 계속 북상해서 남양에 이르자 그를 따르는 병사만 수만에 이르렀고 당연히 군량은 부족,
남양태수 장자에게 군량을 요청했으나 장자는 군량은 주지 않은채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약소한 물품만 줍니다.
그러자 손견은 그 답례를 하겠다며 장자를 초대했고 그가 참석하자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장자마저 끌고가 군문에서 대놓고 참수합니다.
그리고는 남양성을 털어 군량을 보충,
이 소식을 들은 남양군 사람들은 이런 손견의 포악성에 모두 두려워 떨었다고 하니...
(다른 썰도 있으나 어쨌든 장자를 죽였다는 내용임)
(왕예는 무릉태수 조인 -조조부하 아님- 을 거병하기 전 먼저 죽이려고 했는데 이에 조인이 두려워서 가짜 격문을 만들어
손견에게 주었고 손견은 군수품 얻으러 가는척 하며 왕예를 습격해 죽게함.
- 평소 손견은 언행이 가벼워 왕예가 자주 무시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있었음 -
문제는 손견=장사태수, 왕예=형주자사 였으므로 손견은 왕예의 부하가 되는건데 상관을 멋대로 습격해 죽게했으니
형주는 향후 유표가 부임할 때까지 무정부 상태로 완전히 막장이 됨.
당연히 장사는 형주 남쪽이었으므로 장사에서 보급품 지원받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따라서 남양에서 장자에게
군량을 얻으려 했으나 장자가 주지 않자 이마저 죽여버림 ㄷㄷ..)
이러한 보급의 문제가 불거지자 손견은 노양에서 원술을 만나 남양을 원술에게 바치며 그의 휘하에 들어갔고
원술은 그 보답으로 표를 올려 손견을 파로장군, 예주자사로 추천, 본격적으로 원술의 지원을 받으며 낙양으로 진격합니다.
손견이 양인에 이르자 서영에게 기습을 당해 대패하고 마는데 이 때, 연의에도 나온 조무에게 붉은 두건을 주어
자신은 살아남고 조무가 대신 죽었다는 일화가 생깁니다.
(실제로 조무는 망부석에 붉은 두건을 걸어놓고 자신은 숨어서 살아남음. 그러나 이 이후에는 조무가 등장하지 않으므로
이때 입은 상처로 인해 죽었는지 알 수 없음)
연의에도 묘사되었듯이 손견은 완전히 대패해 겨우 기병 몇 십기만 데리고 겨우 살아나올 정도였는데
이 후에 군을 다시 수습해 다시 동탁군을 공격, 도독 화웅을 붙잡아 죽입니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당시 관직에 있던 인물들과 대조해 보았을 때 도독 화웅이 아니라 도위 엽웅이라고 함.
화(華)와 엽(葉)자가 비슷하기에 생긴 오류로 보이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냥 화웅이라고 적겠음)
이에 동탁은 보기 5천을 주어 호진을 총대장으로 삼고, 여포에게 기병을 이끌게 했는데 이들은 손견의 군영이
매우 단단해 보이자 공격하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맙니다.
(호진은 평소 인망이 매우 없었는지 호진을 총대장으로 삼자 같이 출정나간 장수들이 모두 싫어해 심지어 아군이
지길 바랄 정도였음. 호진이 군대를 이끌어 서둘러 행군하자 이들이 모두 지쳤는데 원래 작전에는 광성이란 지역에서
머물러 쉬었다가 새벽에 기습하는 것이 작전이었으나 여포가 지금 양인성 -손견이 주둔한 성- 에는 적들이 없으니
당장 쳐야한다는 개소리를 시전.
이에 장수들과 병사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밤에 행군해 성을 치려했으나 이게 왠걸, 이미 손견은 단단히 방비하고 있었음.
이미 한밤중이라 말과 사람이 모두 지쳐있어 진영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한 채 쉬고 있는데 여포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적들이 나왔다며 또 한번 개소리 시전.
이에 다들 놀라 병기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서둘러 도망가는데 한참 도망간 뒤에야 적들이 없었다는걸 알고
새벽이나 되서 다시 돌아와 병기를 챙긴 채 손견의 방비를 보고 군대를 물림.
이 때 손견이 들이쳤다면 ㄷㄷ.. 여포의 개소리 단 두번으로 보기 5천이 전멸할뻔한 희대의 사건임)
(위 전투가 양인전투인데 삼국지 정사 손견전에서의 기록은 앞뒤 관계가 바뀌어 기록되어 있어 선후를 파악하기가 난해함.
타임라인을 그려보면,
노양에서 손견과 원술 만남 -> 남양 헌납 -> 군을 조련한 뒤 양인으로 이동 ->
이동 중 서영에게 기습당해 패배 -> 이후 군을 수습해 역격(화웅참수) -> 동탁이 호진과 여포를 보냄 ->
방비가 되있자 철수 이 순서로 보이지만 나무위키 등 다른 곳에서는
양인으로 이동-> 동탁이 호진과 서영, 화웅, 여포등을 보냄-> 이동 중 서영에게 기습당해 패배 ->
이후 군을 수습해 역격(화웅참수) -> 호진과 여포가 철수
이런 순서로 타임라인을 그림. 하지만 손견전, 삼국지집해, 여포전, 동탁전 등을 아무리 참고해 보아도
호진과 서영, 화웅, 여포등을 함께 보냈다는 기록은 없으며 서영과 화웅이 근방에서 노략질을 하다가
손견군과 조우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들은 별동대였고 이들이 격파되자 동탁이 호진을 총대장으로 삼아
여포와 함께 보냈다는 것이 자연스러움. 나무위키는 나중에 직접 편집을 해볼 예정)
이 때, 원술과 손견 사이를 누가 이간질해 원술이 손견을 의심하며 군량을 안보낸 적이 있었는데 손견이 직접 양인에서
말을 타고 달려와 원술에게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전술을 설명하고 악의와 오기의 예를 들며 이간질을 물리치라
간언합니다.
이에 다시 손견에게 군량과 군수품을 보급해주니 다시 손견군은 힘을 얻어 낙양으로 진격,
동탁은 손견이 무서워 갖은 방법으로 회유를 시도하지만 손견은 단칼에 이를 거절하고 계속 진격합니다.
낙양 근방까지 진격하자 동탁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와 요격하지만 패배하고 손견은 낙양까지 진격해 낙양을 지키던
여포를 격파, 결국 낙양을 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한 뒤였고 낙양은 폐허나 다름없는 지경이 되어있자 손견은 군을 동원해
이를 수습하다가 우연히 전국옥새를 손에 넣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원술에게 바칩니다. (산양공재기에는 원술이 협박했다고 기록)
(반동탁 연합군에 수많은 제후들이 함께 했으나 공을 세운 것은 오로지 손견뿐이었음.
동탁도 손견 단 한명이 무서워 천도까지 감행할 정도였으니 그의 용병과 용맹이 엄청났음을 추측할 수 있음)
<전국옥새, 코에이 일러스트>
손견은 다시 노양으로 군을 이끌고 돌아갔는데 이 일로 인해 원술의 위상이 더없이 높아지자
원소는 이를 경계, 주우와 주앙을 예주로 보내 원술을 경계하게 합니다.
그러자 손견은 이에 "서로 사직을 지키고자 군을 일으켜 역적을 거의 격파했는데 서로 제멋대로 군을 움직이니
누구와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가" 라고 말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이후 손견은 이들과 여러차례 싸웠고 결국 막아냅니다.
192년, 원술은 손견에게 유표 토벌을 명하고 손견은 이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합니다.
유표는 황조를 보내 이를 막게 하지만 손견은 이들을 격파해버리고, 패주하는 군을 추격해서 양양까지 이르자
양양을 포위합니다. 그리고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단기로 양양성 남쪽의 현산 (현수산)을 오르다가 황조군의 군사에게
화살을 맞아 결국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합니다
(전략에서는 유표가 황조를 성밖으로 내보내 호응하게 했으나 손견에게 패해 현산으로 도망치다가 쫓아오는
무방비 상태의 손견을 활로 쏴죽였다고 나와있고 영웅기에서는 여공이란 자가 산을 따라 손견에게 진격하자
손견이 경기병을 이끌고 이들을 격퇴하러 나갔다가 여공군이 떠미는 낙석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음.
각자 기록이 모두 다르고 죽은 연도마저 모두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나 192년에 죽었고 양양성 남쪽의 현산에서
죽은 것은 확실해 보임)
# 손견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손책, 손권, 손익, 손광 등이었고 지림(志林)에 따르면, 막내아들 서자 손랑 (손인) 도
있었다고 합니다.
# 매우 용맹했고 용병 또한 상당히 능했으며 직접 앞장서는 선봉장 스타일의 군웅이었습니다.
게다가 지모 또한 꽤나 있어 장온은 그를 군사로 삼을 정도였으며 그가 낸 계책 또한 훌륭했으니
그 동탁이 두려워 할 만한 장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평소 학업을 쌓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하나 서량에서의 반란, 원술에게 전술을 설명했던 일 등의 기록을 보면
일자무식은 아니었고 지방의 유력한 호족답게 충분한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자기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을 뿐... 학문을 배우며 덕을 쌓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여러 상황에서
난폭한 행보를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왕예나 장자사건..)
# 삼국시대 초반에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주었던 손견. 사실상 초반부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짧고 굵게 살다갔습니다.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폭풍같은 사나이'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편은 그의 아들 <소패왕 손책>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