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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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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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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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을 제패해 패업의 기반을 마련한 실질적인 초대군주 <손책>. 실제 그의 역사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손책, 코에이 일러스트>
<손책>
175년 생으로 자는 백부이며 손견의 장남입니다.
손견이 하비승 시절 주준에게 발탁되어 좌군사마가 되었을때, 그의 가족들은 모두 수춘으로 옮겨살게 했으므로
손책도 어린 시절을 수춘에서 보냅니다.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꽤 유명했는지 강표전에 따르면 10세때부터 교우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손책의 소문을 들은 어떤 아이가 그를 찾아와 만나길 원해 손책이 맞이하니 이 아이가 바로 영재로 소문난
주유입니다.
(삼국지 내 서열 1, 2위를 다투는 공식 미남들의 만남)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 통했는지 그 자리에서 친분을 맺었고 한동안 교재 했는데 손견이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며
군을 일으키자 주유는 손책에게 자기 동네에 와서 살 것을 권유합니다. (양주 여강군 서현)
주유의 집안은 굉장한 명문가였으므로 집도 꽤나 부자였는데 손책이 주유의 권유에 따라 이주해 오자
큰 저택 하나를 통째로 손책에게 주어 그곳에서 그와 가족들이 살게 합니다.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다가 사망하자 곡아현(양주 오군 곡아현) 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손견을 장사지냈고
장례가 끝난 후 장강을 넘어 강도현(서주 광릉군 강도현) 으로 이사갔으나 서주목 도겸이 손책을 매우 꺼려해
다시 곡아로 돌아가게 됩니다. (강도에서 장굉과 첫만남)
(손견이 유표를 공격할 당시 손책과 주유도 참전했다는 식으로 그린 창작물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님.
이때 손책은 주유와 함께 서현에 머물고 있었음)
곡아에 어머니 오국태를 모셔다두고 여범, 손하와 함께 외숙부인 단양태수 오경에게 가며 이 것을 기회로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194년, 20살이 되자 원술에게 찾아가 종군할 뜻을 밝히니 원술은 그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해 기존 손견의 병사들을
모두 돌려주었는데 이 때, 태부 마일제가 원술에게 와있다가 손책을 보고 그를 추천해 회의교위에 제수케 하니
원술 휘하 장군들이 그를 매우 공경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게된 원술이 "내게 손책과 같은 아들이 있다면 죽어서도 여한이 없겠다" 고 말했다고 하니
그가 손책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손책의 병사 하나가 죄를 짓고 원술 군영의 마구간으로 숨어들자 손책이 일단 이 병사를 잡아
참수하고 후에 원술에게 사과하러 갑니다. 그러자 원술이
"그런놈이 있으면 같이 미워해야지 우리 사이에 사과할게 뭐있냐" 라고 쿨하게 넘어갑니다.
원술이 이 정도로 손책을 격하게 아끼자 원술군 내부에서는 손책을 더더욱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원술이 서주를 차지한 유비와 전쟁을 준비하며 여강태수 육강에게 병량을 달라고 요청하나 육강은 이를 거절했고
이에 분노한 그는 손책을 보내 육강을 치게 합니다.
원래 손책은 육강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술이 육강을 쳐서 성을 함락시키면 여강 태수 직을 주겠다고
하자 신나서 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성을 함락시킵니다.
그러나 원술은 이전에도 손책에게 구강 태수직을 주기로 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긴 적이 있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태수로 임명하자 이로 인해 손책은 원술을 원망,
독립할 것을 결심합니다.
(육강은 육손의 숙조부)
이 일이 있기 전, 유요는 정식으로 양주자사에 제수되어 양주로 갔으나 양주의 치소가 있는 회남 지방 일대는
이미 원술의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요는 두려워 수춘으로 가지 못하고 장강을 넘어 오군 곡아현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이 정식 자사였으므로 양주에 관한 공무를 수행하려고 하는데 원술이 제멋대로 양주의 각 군현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여강마저 공격해 점령하자 이에 대항하고자 병사들을 보냅니다.
먼저 원술에게 벼슬을 받은 단양태수 오경, 손분을 파면시켜 쫓아내고 번능과 장영을 보내 원술에게 대항하게 하자
원술은 이에 대응해 오경과 손분에게 병사를 주어 공격하게 하나 이들은 1년이 다되도록 공방만 하며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5년, 손책이 원술에게 자신과 혈연관계에 있는 오경(외숙부), 손분(사촌)을 돕고 싶다고 요청합니다.
원술은 손책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 원한을 품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유요의 세력이 꽤나 강성했고
회계에는 왕랑마저 있어 성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 경험이나 쌓게 할 요량으로 그에게 병사 천여명을 주며
이를 허락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으니...)
손책이 병사를 이끌고 역양까지 진군하며 중간에 따르고자 하는 무리들을 계속 받아들였고
역양에서 일말의 병사를 이끌고 온 주유까지 합류하게 되자 병사들은 5천여명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유요가 곡아를 점거하자 손책의 어머니 오국태는 곡아에서 역양으로 이사를 와있었음. 그래서 역양으로 진군한듯)
이 곳에서 잠시 머물며 어머니 오국태를 다시 부릉현으로 옮기게 하고 본인은 주유와 함께 장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장강 이남을 공략하는데 착융, 설례, 유요를 차례로 크게 격파하자 유요는 군대를 버리고 예장군으로 도망칩니다.
(이 과정에서 삼국지 내에 몇 없는 일기토를 손책과 태사자가 벌이는데 약간 과장되긴 했지만 내용과 결과는 비슷.
실제로 서로의 무기와 투구를 빼앗을 정도로 격하게 몸싸움을 했으며 이는 정사에도 기록된 리얼 일기토임.
유요가 도망칠 때 태사자는 저항하다가 결국 손책에게 잡혀 투항)
이로써 단양군과 오군을 제압한 손책은 주유와 주치에게 뒤를 맡기고 자신은 기세를 몰아 회계군을 지키던 왕랑을 칩니다.
왕랑은 우번의 조언을 무시한 채 대항하다가 손책에게 완전히 박살나버리고 손책은 순식간에 회계군까지 제압했으며
오군의 남은 큰 세력이었던 엄백호 (동오의 덕왕 니뮤ㅠ) 마저 개박살내버리니 강동 전체가 순식간에 손책에게 완전히
무력에 의해 제압됩니다.
이 때 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2년여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질풍같은 행보였던 셈.
(왕랑은 이때 바다에 표류하는 지경까지 이르러 거의 아사 직전까지 갈 정도로 굶주리다가
후에 조조에게 겨우 살아 돌아갑니다)
이 때의 손책은 감히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폭풍같은 진격을 보여주었는데 정사에는 그의 행보를 아래와 같이
표현했습니다.
"향하는 곳마다 모두 격파되어 감히 그 예봉을 당해내는 자가 없으며, 군령은 엄숙하니, 백성들은 그를 따랐다."
<정사 삼국지 손책전>
단 한번의 패배없이 양주의 모든 군을 제압하고 남은 세력이었던 도망간 유요가 병사하고 허소마저 사망하자
그들의 세력도 흡수, 명실상부한 강동의 주인이 됩니다. 손책은 강동을 제압하면서 민심을 얻으려 상당히 노력을 해
백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으며 뜻이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인기가 굉장했는데 이 때 당시 그에 대한 정사의 표현을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손책의 사람됨은 용모와 얼굴이 빼어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남의 의견을 잘 들어주고,
사람을 기용하는데 뛰어나니, 이 때문에 사민(士民)들 중 그를 만나는 자는 진심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고,
그를 위해서 기꺼이 죽었다."
<정사 삼국지 손책전>
(한마디로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 쾌남아였다.. 예나 지금이나 잘생긴 놈은 뭘해도 됨...크흡...ㅠ)
197년, 한창 강동을 안정화 시키던 중 원술이 참칭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손견은 그를 꾸짖는 서한을 보내며
관계를 완전히 끊고 대립각을 세웁니다.
(옥새는 이미 손견이 발견한 뒤 바로 원술에게 주었으므로 연의에서 나오는 옥새 이야기는 창작임)
협천자를 하고 있던 조조를 통해 헌제의 조서가 내려와 조조, 진우, 여포와 함께 원술 토벌전에 참여했으나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이진 않고 후방을 맡아 구원병 위주로 활동을 합니다.
이 때, 진우가 손책의 빈집을 털려고 했으나 이를 눈치챈 손책에게 되려 역공당하며 크게 박살나 처자식마저 모두
사로잡힌 채 혼자 살아남아 원소에게로 달아납니다.
이 후, 원술이 꿀물타령하다가 사망하자 그의 휘하 일부 장군들과 병사들은 평소 손책을 흠모했으므로 손책에게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에 여강태수 유훈이 이들을 습격해 이들이 가지고 있던 군수품과 병사들을 모두 취해버립니다.
병사가 늘어나자 병량이 부족해진 유훈은 예장태수 화흠에게 병량을 요청했는데 화흠은 원래 자기자신부터 이미 병량이
부족해 병량 일부만을 주고 다른 지역을 돌며 병량을 얻으라고 합니다.
유훈이 보낸 사자(사촌동생 유해)가 얻어오는 병량이 매우 적은걸 알게된 유훈은 직접 이들을 쳐 병량을 강탈하기 위해
병사들을 직접 이끌고 기습을 할 요량으로 빠르게 출정을 하는데
이 때, 강하의 황조를 치기 위해 행군하고 있던 손책은 이 소식을 듣고 주유와 함께 경보병 2만을 이끌고
군을 돌려 여강군의 치소 환성을 급습해 함락시켜 버립니다.
유훈은 군을 이끌고 지역유지들에게 병량을 강탈하려 했으나 이미 다들 어디로 튀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이에 유훈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귀환하게 됩니다.
손책은 별동대로 손분과 손정을 보내 유훈을 치게 했는데 귀환하던 유훈은 이들에게 격파당하고
환성마저 함락당했단 소식을 듣자 황조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황조는 요청에 응해 구원군을 보내지만
황조가 보낸 이 구원군도 손책과 주유에게 박살이 나며 유훈은 하는수 없이 조조에게 투항하게 됩니다.
유훈의 세력과 여강을 접수한 손책은 기세를 몰아 강하에 있던 황조를 다시 공격해 유표의 조카 유호와 한희를 참수,
돌아오는 길에 예장태수 화흠도 종속케하며 도저히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기세를 보여줍니다.
(이 때, 여강을 접수하며 주유와 함께 삼국시대 미녀의 대명사 이교 -대교, 소교- 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손책과 주유의 정실이 아니었으며 그냥 첩이었을뿐 여타 창작물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그들의 가문에서
비중이 있는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명성이 알려졌음을 봤을 때 대단한 미인들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손책이 이렇게 강동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빠르게 양주 일대를 접수하자 조조는
"미친 개와는 예봉을 다툴 수 없다" 고 탄식하며 말했다고 하니.. 그의 활약이 미친개처럼 날뛰는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양주지방 지도, 구강군이 양주의 중심이었으며 회계군과 예장군은 사실상 미개발 지역이 상당했음>
그리고는 원소와의 일을 대비해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손책의 집안과 사돈 지간을 맺게 됩니다.
강동을 평정한 후 안정을 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던 어느 날, 손책은 고대란 사람이 춘추좌씨전의 명인이란 소문을 들어
그와 담론하고자 그를 불렀는데 중간에 이간질 하는 놈이 손책과 고대에게 서로 다르게 얘기하여 둘 사이를 이간질시켜
손책으로 하여금 고대를 투옥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고대가 투옥되자 그의 명성을 사모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그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심지어 길에 엎드려 있는 자가 수 리에 이어져 있었음) 손책이 이를 보고 그가 민심을 동요시킨다 생각해
결국 죽이고 맙니다.
(이 고대와의 일화는 <오록>에 기록된 내용인데 <강표전>과 <수신기>에는 이 일화랑 비슷한 일화가
우길의 일화로 기록되어 있음.
어떤 쪽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고대와의 내용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으므로 아마도 이 일화가 우길의 이야기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 추측됨. 삼국지연의에서는 우길의 이야기로 채택)
조조는 손책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손책은 허도를 습격하려 했는지 몰래 병사들을 조련하다가
광릉태수 진등이 불순한 의도 (손책에게 당한 진우의 인척) 를 보이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합니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 군량수송을 기다리고 있던 손책은 평소에도 사냥을 즐겨했으므로 그 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사냥을 나섰다가 그가 탔던 말이 준마라 빠른 관계로 호위하는 기병들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 훨씬 이 전에 오군태수였던 허공이란 자가 헌제에게
"손책은 용맹하고 웅걸하여 항우와 같으니 수도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불러들이지 않으면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
라는 내용의 표를 올린 적이 있는데 이게 그만 손책의 척후들에게 붙잡혀 이 내용이 밝혀지게 되니 손책이 분노하여
허공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허공의 식객으로 있었던 무사 3명이 이에 대한 원한을 품고 숨어서 돌아다니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마침 손책이 사냥을 하며 호위 기병들과 멀어지게 되자 습격하여 활을 쏴 뺨을 맞춥니다.
곧 기병이 도착해 이들을 모두 도륙내었지만 손책은 이 상처가 덧나 죽을 지경에 이르자 (파상풍으로 추정)
장소 등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손권에게 뒤를 물려주며 아래와 같이 유명한 유언을 남깁니다.
"강동의 병사를 일으켜서 양 진영 사이에서 기회를 보아, 천하를 다투는 것은 경이 나만 못하다.
그러나 현인을 등용하고 능력 있는 자에게 맡겨 각자가 제 마음을 다하게 하고, 강동을 보전하는 것은 내가 경만 못하다"
그리고는 그날 밤, 손책은 향년 26세의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맙니다.
(위 내용은 강표전에 실린 내용으로 허도를 치려 했다는 부분은 진위를 알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이동잡어>를 지은 손성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허도를 노렸느냐의 진위를 의심했으나
배송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평가합니다. 현재는 대부분 배송지의 의견을 따르는 편입니다)
# 진수는 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손책은 기개가 호방하고 실행력이 뛰어났으며, 용맹함과 예리함은 세상을 덮었고, 비범한 인물을 살펴 취했으며,
뜻은 중국을 통일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경솔하고 함부로 결정을 내려 몸을 잃고 실패하는 데 이르렀다"
# 아버지 손견을 닮아 상당한 무재가 있었으며 용인술마저 뛰어나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맞아들였으니 손권은 손책이
유언을 남긴대로 손책이 이룬 기반의 토대를 지켰을 뿐. 손책이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격변의 시기에 조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를 정도로 난세의 군주로는 훌륭한 기량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소패왕이란 별명은 작은 패왕이란 뜻으로 허공이 헌제에게 올린 표에 "항우와 같다" 는 구절을 들어 후대에
지어준 것이지 당대에는 이런 별명이 아니었고 '손랑'이라 불리었습니다.
# 손책은 삼국지 정사에 기록된 몇 안되는 공식 미남으로 백성들에게 '손랑'이라 불리며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하 공식미남 : 손책, 주유, 원소, 제갈량, 하안, 비공식적으로 관녕도 있음)
# 손책의 딸 손씨는 손책 사후 육손에게 시집가는데 육가는 그 지방에서 굉장히 유력한 호족가문이었으므로 손권으로서는
손책이 육강을 죽인 일을 덮어두고 이들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기에 정략결혼으로 이들 가문과 연대합니다.
다음편은 손가 3부자 마지막 <손권>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