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장문] 치열했던 그때 그시간

히히힛히히히 작성일 18.06.22 21: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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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입니다만 장문의 글입니다!

 

*3줄요약 없어요

 

 

 

 

 

 

 

 

 

전설의 시작

짜빈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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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기만 공격
운명의 날인 1966년 2월14일 밤이 되었다. 3일만 더 버티면 한국 해병대가 선제공격을 감행하게 되는 상태였다. 적들의 움직임이 수상했지만 기껏해야 2개 대대급 공격쯤으로 예상했을 뿐 설마 월맹 정규군 연대급을 초과하는 병력이 중대전술기지에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당시 서북쪽 기지 밖에는 11중대 3소대 소속 청음초가 배치되어 있었다. 밤에 기지 밖에 매복하여 적의 접근을 조기 경보하는 경계병을 청음초라고 한다. 2월14일 밤 11시20분 거센 비바람 속에서 3소대 박기창 일병은 수풀을 헤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적이 철조망 파괴통으로 외곽 단선 철조망의 일부를 파괴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청음초는 즉각 중대로 적 발견을 보고했고, 중대는 박격포로 조명탄을 발사하여 30여명의 적을 확인했다. 기지 서북쪽을 담당하고 있던 11중대 3소대는 맹렬한 사격을 가했으나, 적은 1명의 시체를 남긴 체 금방 후퇴해 버렸다. 그런데 적은 그냥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떠들썩하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후퇴했다. 이와 동시에 기지 남쪽의 짜빈동 마을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11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적의 이상한 행동으로 보아 완전 철수한 것이 아니고 다시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전 병력에게 군화를 벗지 못하게 지시하고, 1/2병력을 진지에 배치한 상태로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적은 다음날 새벽이 다되도록 공격해 오지 않았다. 초긴장 상태로 참호 속에 대기하던 병사들도 하나둘 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2월15일 새벽 4시10분, 3소대 청음초였던 도성룡 일병과 조정남 일병은 베트남 사람 특유의 고약한 체취를 느꼈다. 거의 동시에 잠에서 갑자기 깬 이중석 일병은 적을 보고 놀라서 소총을 발사해버렸다.


총성 1발이 비상신호가 된 셈이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월맹정규군은 총소리를 신호로 중화기로 무지막지한 반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60밀리,81밀리,4.2인치,120밀리 등 각종 박격포에서 발사하는 월맹 정규군의 포탄이 중대기지로 집중되었다. 그 외에도 적은 75밀리 무반동총, 화염방시기등 월남전의 소규모 전투에선 흔히 볼 수 없었던 각종 공용화기를 총집중했다. 적은 한밤중에 기만공격을 실시하여 한국군이 잠못들게 만든 후 피로에 지칠 무렵인 새벽녘에 재차 공격을 해온 것이다.


당시 해병 청룡부대에는 아직 M-16 소총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적들은 대부분 AK-47 자동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각개 병사의 화력에서 아군이 조금 밀리는 상황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미국과 한국군은 M-1 소총으로 AK-47을 상대하는게 무리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한국군에게 M-16을 대량 보급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게 되었다.

 

 

 


* 11중대 3소대의 방어망이 뚫리다.
해병대는 포병관측장교 김세창 중위의 유도아래 즉각 105밀리 포대에서 조명탄을 발사하고, 기지 외곽의 적 부대 후속지점으로 차단사격을 실시했다. 적들은 4시20분부터 이곳저곳에서 철조망 파괴통을 이용하여 3소대 외곽의 철조망을 파괴했다.이윽고 적의 박격포 지원사격이 끝났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적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면서 3소대 진지로 돌격해 왔다. 11중대 병사들은 소총으로 최후 저지사격을 펼쳤다. 그러나 3소대 전방으로 돌격하던 적은 무려 2개 대대 병력이었다. 결국 4시40분 무렵 11중대 3소대 1분대와 3소대 화기분대가 방어하던 기지 외곽이 적 2개 대대 병력에 의해 돌파를 당했다. 애당초 3소대 1분대 지역은 방어정면이 너무 넓어 3소대장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11중대장에게 방어정면을 좁혀주도록 요청했으나 중대장이 묵살한 바 있었다. 결국 3소대 1분대의 방어망이 뚫려 중대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1중대 3소대 1분대장 배장춘 하사는 총과 무전기를 버리고 곡괭이를 집어 들고 백병전에 뛰어들었다. 1분대 이학현 상병은 적병 5명이 참호로 돌입한 후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중대 대변수집통으로 빠져 버리자 대변수집통에 수류탄을 던져 적 5명을 대변통 속에서 폭사시켰다. 이학현 상병은 배장춘 하사에게 달려드는 적을 죽인 후 오른쪽 발목과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개인호에 뛰어든 적병과 싸우던 조정남 일병은 중과부적으로 밀리자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부상 속에서도 계속 사격하던 이학현 상병도 개인호 속으로 적이 뛰어들자 수류탄을 터뜨려 적들과 함께 자폭해 버렸다. 김명덕 일병은 전신에 파편상을 입은 상태에서 수류탄을 모아 적들에게 계속 투척했다. 이영복 일병은 부상당한 배장춘 하사를 부축하여 2소대 진지로 후퇴했다. 이영복 일병을 제외하면 나머지 1분대원 전원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전사 5명, 부상 5명)


같은 시간은 3소대 화기분대도 돌파를 당했다. 사수 김낙성(김남석) 상병이 전사한 후에는 부사수 이내수 일병이, 그 다음에는 1번 탄약수 오태준 일병, 마지막으로 송영섭 일병이 경기관총을 넘겨받아 최후까지 사격했으나 결국 화기분대도 돌파당하고 말았다. 송영섭 일병은 마지막 순간 기관총 총열을 뽑아 물구덩이로 집어던지고 전사했다.


11중대에 배속된 1중대 3소대 소속 병력들도 철조망용 철주를 뽑아들고 백병전으로 적을 상대했다. 11중대 3소대 외곽 방어망을 돌파한 적들은 화염방사기 3문을 앞세우고 내곽방어망으로 안쪽으로 돌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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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방어망 돌파 
11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3소대에게 기지 외곽방어망을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어차피 방어가 뚫린 상태에서 현 위치에서 무리하게 방어를 펴기보다는 병력을 집결한 후 집중 반격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모험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결단이 기지 방어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적들은 해병 청룡부대와 유사한 철모와 위장복을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진지 안에서 병력이 뒤섞이자 피아를 구별할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적은 평소 한국군이 기지 밖에서 매복작전을 할 때 수풀로 위장한 것을 보고 한국군을 흉내 내기 위해 수풀로 위장을 하고 있었다. 피아를 구별하기 위해 고심하던 정경진 대위는 적이 수풀로 위장한 것을 인식하고 풀이나 나뭇가지를 꽂은 병사는 적이니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한국군은 기지 내에서는 수풀 위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중대 3소대 지역을 통과한 적들은 내곽방어망을 돌파하여 화염방사기와 척탄발사기를 휴대하고 중대 지휘소 부근까지 육박해 왔다. 마침 적의 4.2인치 박격포탄이 아군 4.2인치 박격포탄 탄약고에 떨어졌으며, 관측소에도 적의 직격탄이 명중하여 11중대 부중대장은 75밀리 무반동총의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결국 중대 지휘소는 관측소에서 중대 상황실로 옮겨야 했다. 이런 위기 속에 1중대 3소대 소속 향도하사관 정봉구 하사는 개머리판을 휘둘러 적병 2명을 타살했다.


중대전술기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4.2인치 박격포 진지와 105밀리 무반동총 진지에까지 적병들이 밀려 들어왔다. 4.2인치 박격포소대 소속 병사들은 4.2인치 박격포를 포기하고 소총수로 전환하여 중대 상황실 정면을 방어했다. 81밀리 박격포반 포반장 심재정 하사와 이지용, 박형구 일병은 4.2인치 박격포 진지로 달려들던 적병들에게 수류탄을 던져 적을 폭사시켰다. 105밀리 무반동총 분대의 김광정 하사는 적이 무반동총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폐쇄기를 분리해서 땅에 묻어버렸다. 포병사격을 유도하던 포병관측장교 김세창 중위는 철모가 적탄에 관통당한 상태에서도 계속 사격을 유도하다가 끝내 출혈과다로 기절해 버렸다. 포병관측장교가 쓰러지자 포병관측하사관인 김현철 하사가 임무를 대행하여 기지 밖의 적 병력 접근 예상로와 돌파구에 포병 사격을 계속 유도했다.


상황이 위급하자 청룡부대 3대대에서는 미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룡부대 3대대장은 11중대장에게 항공폭격과 포병사격 중에 하나를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포병사격 중에는 폭격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11중대장은 포병사격을 선택했다. 미국은 결국 항공폭격을 하지 못하고 기지 인근 상공에 미군 AC-47을 날려보내 기지 부근에 조명탄을 투하했다. 각종 곡사화기가 발사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기지 가까이로 AC-47이 날아올 수 없었다. 더구나 비가 심하게 내리는 상태였으므로 조명의 효과는 좋지 않았다.


11중대의 중대전술기지 외곽방어망이 돌파되고 진지 중앙까지 적병이 침입한 사실이 청룡부대 여단본부로 알려졌다. 애당초 여단에서는 11중대로 적이 공격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예상 밖의 적 대병력이 출동하여 중대 외곽방어망이 돌파 당하자 긴장하게 되었다. 여단장 김연상 준장은 지원병력 1개 중대를 헬기에 탑승시켜 출동시키겠다고 11중대장에게 통보했다. 하지만 11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만약 지원 병력이 탑승한 헬기가 출동한다면 일시적으로 포병이나 박격포 사격을 중지해야 하는데, 그 순간에 적 병력이 대규모로 진지 내부로 들어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지 중앙의 잔존병력들은 중대지휘소 부근의 참호에서 기지 내부로 침투한 적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야 했다.


* 방어선을 지켜낸 11중대 1소대
11중대 1소대가 위치한 지역에는 적 1개 대대가 공격해 왔다. 이곳의 적 1개 대대는 직접 방어망을 돌파하는 것이 임무라기보다는 11중대 3소대 지역으로 1소대가 지원을 못하게 견제공격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대대 vs 소대 간의 병력 차이가 컸으므로 1소대의 외곽방어망 중의 한곳도 결국 뚫리게 되었다. 적은 철조망 파괴통을 이용하여 1소대의 철조망을 7m 정도 파괴하였다. 3소대가 외곽방어망을 포기하고 후퇴할 무렵 1소대도 진지 안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3소대의 외곽방어망이 완전 뚫린 상태였기 때문에 1소대 방어망도 돌파당하면 중대는 전멸할 위험이 있었다. 11중대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11중대 1소대 2분대장 이준재 하사와 함께 화염방사기를 든 적병을 직접 공격하여 화염방사기 3문(혹은 2문)을 노획하였다.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적이 1소대 진지 중에 한곳만 돌파했음을 알고 조명탄이 터지는 순간에는 1발식 정조준 사격을 하도록 하고, 조명이 끊기는 순간에는 일제 사격을 돌파구에 집중시켰다.


적이 11중대 1소대 방어망을 완전 돌파하지 못하고 공세가 주춤해진 새벽 6시 무렵, 1소대 병사들은 전방 100m 지점의 바위 뒤에 적병들이 대전차포와 척탄통으로 사격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1소대는 적의 대전차포를 공격하기 위해 수류탄으로 무장한 임시 특공조를 편성했다. 1소대 선임하사관 김용길 중사와 이진 병장, 통신병 조용구 상병은 수류탄 2발식을 들고 진지 밖으로 나가 포복으로 바위에 접근하였다. 김용길 중사 등 3명은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들을 폭사시키고 대전차포 3문을 노획하였다. 결국 적은 공용화기를 많이 상실하여 11중대 1소대 지역을 완전히 돌파하지는 못했다.


* 반격-2중 압축포위
마침 11중대 2소대가 위치한 지역으로는 적이 공용화기로 위협사격만 했을 뿐 직접 공격해 오지 않았다. 11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2월15일 6시30분 임시 특공대를 편성하여 반격하기로 결심하였다.


특공대는 피해가 적은 2소대의 1개 분대와 1소대의 1개 분대로 편성했다. 2소대 소속 분대는 오른쪽으로, 1소대 소속 분대는 왼쪽방향으로 3소대 외곽방어망 지역으로 공격하였다. 동시에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의 지휘아래 중앙특공대를 편성하여 중대본부 요원과 화기소대, 내곽 방어망으로 후퇴한 3소대 일부 병력을 총동원하여 내곽방어망 안으로 진출한 적병들을 정면공격하게 했다. 기지 내부로 들어온 적을 거꾸로 2중으로 압축포위하려는 것이다.


수세에 몰려 방어전을 펼치던 한국군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육탄돌격을 감행하자 진지 내부로 침투한 월맹 정규군들은 돌파구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7시20분 무렵 1,2 소대 혼성 병력이 3소대의 돌파구를 완전 차단하자 기지 내부에 침투한 적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11중대 병사들은 로켓발사기와 수류탄을 동원하여 잔존한 적들을 완전히 폭사시켜버렸다. 날이 밝아오자 미 해병대 소속 AC-47 4대가 출격하여 기지 밖의 적들을 맹폭하였다. 전투가 끝날 무렵 청룡부대 소속 O-1 관측기가 중대기지 상공에 나타나 날개를 흔들며 11중대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이윽고 청룡부대 2대대 6중대 소속 지원 병력이 헬기에 탑승하여 기지로 이동해 왔다. 마침내 혈전이 끝난 것이다. 이날 새벽 6시25분에 해가 떴으므로 이때 2대대 6중대가 일찍 출동했다면 기지 밖에 대기하고 있던 적대부대를 완전히 포위 섬멸할수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헬기가 제때에 이륙하지 못했으므로 6중대가 11중대 기지에 도착할 8시30분 무렵에는 전투가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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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는 적 시체 확인 246명, 추정 사살 60명, 포로가 2명이었다. 노획품은 대전차포 6문(혹은 3문), 기관총 2정, 기관단총 6정, AK-47 자동소총 17정, 소총 12정이었다. 아군 전사자는 전사 15명, 부상 33명이었고 전사자의 대부분은 3소대 소속 병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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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끝에 쏟아진 찬사
짜빈동전투시의 적은 전투력이 약한 베트콩이 아니라 월맹 정규군이었다. 당시 직접 전투에 참가한 적은 월맹 정규군 제2사단 소속의 1연대 연대본부(430명)와 예하 60대대(500명), 70대대(500명), 80대대(430명), 90대대(400명) 등 4개 대대였다. 월맹 정규군 제1연대는 별칭이 “강철연대”였을 정도로 월맹이 자랑하는 정예부대였다. 직접 공격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공격이 성공했을 때 전과확대와 차단작전을 위해 월맹 제2사단 21연대 소속 2100명과 베트콩 지방대대 제40대대(혹은 베트콩 38대대와 48대대)도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월맹 정규군 2개 연대와 베트콩 1개 대대가 동원된 공격작전을 11중대가 방어해낸 것이다. 당연히 짜빈동 전투에 대한 격려와 찬사가 쏟아졌다.


이 전공으로 11중대 병사 전원을 1967년 3월1일부로 일계급 특진시켰다. 부대 전원 일계급 특진은 한국전 당시에도 육군, 해병대를 포함해서 서너 차례 밖에 전례가 없는 영광스런 특전이다. 또한 11중대는 미국으로부터 1968년도 부대표창을 받기도 했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훈장, 1소대 선임하사 김용길 중사와 3소대 1분대장 배장춘 하사에겐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 포병관측장교 김세창 중위, 김성부 소위, 김준관 하사, 오중환 하사, 이영환 하사, 이진 병장 등에겐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한마디로 훈장이 쏟아진 것이다.


사건후 11중대 중대전술기지를 방문한 미 제3해병상륙군(MAF) 사령관 웰트 중장은 정경진 중대장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중대단위 방어전으로서는 베트남전에서 처음 보는 대단한 전과라고 찬탄했다. 월남군 제1군단장도 무수한 시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베트남 키우 대통령과 키 수상까지 추라이의 청룡부대 여단본부로 날아와 브리핑을 받고 갔다.


해병 청룡부대는 2월17일부터 여단급 작전인 거룡작전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부대로 기자들을 초청할 계획이었다. 거룡작전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여단 정훈참모실 소속 공보장교였던 정인기 중위는 기자들이 탑승할 C-47 수송기까지 어렵게 마련하여 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기자들은 비교적 안전한 사이공에 머물려고 했을 뿐 작전지역인 추라이로 취재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공보장교였던 정인기 중위는 한국 기자들을 붙들고 사정을 했으나 용산고등학교 선배인 조선일보 목사균 기자 1명만 마지못해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추라이로 가지 않았다. 바로 그 날이 2월14일이었다. 결국 당시 사건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기자는 조선일보 기자였다.


조선일보 목사균 기자는 바로 그날 밤 청룡부대 여단본부에서 머무르면서 밤새도록 전투상황을 청취하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짜빈동으로 달려갔다. 결국 후배의 부탁에 마지못해 짜빈동으로 달려갔던 목사균 기자는 특종을 터트리게 된 것이다. 미 제3해병상륙군 사령관 웰트 중장이 산더미처럼 쌓인 월맹군 시체를 보고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원더풀”을 연발하고 있을 때, 조선일보 목사균 기자는 바로 옆에서 시체를 보고 꺽꺽거리면서 구토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 국방장관 왈 “불알을 뽑아낸들 무슨 상관이야!”
떠들썩한 와중에 쇼가 벌어지기도 했다. 키우 대통령과 키 수상이 짜빈동 전투후 격려차 청룡부대를 방문했을 때 “한국 해병대는 태권도를 잘하여 상대방 갈빗대를 부러뜨려 버린다는데 사실이냐”라고 물었다. 청룡부대 여단 작전참모 오윤진 중령은 “사실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한 후 인지와 중지를 내밀어 굽히면서 “이 손가락으로 눈알도 쑤셔 뽑는다”고 대답했다. 대통령과 수상은 오윤진 중령의 대답에 경악했다. 이것으로 마쳤으면 탈이 없었는데 비슷한 발언이 주월한국군사령부 공식 기자회견장에서도 나왔다. 한 외신기자가 “한국군은 총검술이 아닌 태권도로 육박전을 한다는데 사실이냐”라고 물었다. 이 자리에서 정경진 11중대장과 동행했던 청룡부대 여단 상황장교 이 모 대위가 오윤진 중령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면서 “우리는 육박전때 이 두 손가락으로 눈알을 빼버린다”고 대답했다. 외신기자들이 경악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이 잘 싸우지만 적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소문을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육군 출신인 채명신 중장은 해병대 장교들에게 “잔인하다는 소문이 도는 마당에 그런 식의 답변은 조금 지나친 것 같다”고 주의를 줬다. 나중에 11중대장 정경진 대위가 국내에 돌아왔을 때 국방부 장관이 정경진 대위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도 “눈알을 빼버린다”는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해병대 출신 국방장관이었던 김성은 장관은 “아무 문제없어. 죽기 아니면 살긴데 까짓것 눈알이 아니고 불알을 빼버리면 어때!” 라면서 해병대 후배들을 칭찬했다고 한다.


* 다른 전투도 마찬가지지만 짜빈동 전투의 경우에도 각종 책자들 사이에 기록이 일치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서적을 보면 짜빈동 전투 최후 순간, 진내 포병사격으로 적을 격멸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글에는 관련 내용을 반영시키지 않았습니다. 
2003년에 출간된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제3권’을 보면 당시 청룡부대 여단 정보참모는 진내 포병 사격이 검토됐으나 실시되지는 않았다고 '진내 포병사격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1중대 3소대장 정정상 소위도 ‘진내 사격이 실시된 것 같으나, 잘 모르겠다’고 불확실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민간 서적 외에 기타 공식 서적에 진내 포병 사격을 분명하게 명시한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시 청룡부대 여단 정보참모의 2002년 3월자 증언을 보면 당시 적이 월맹 정규군이란 기존의 통설을 부인하면서, 베트콩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실제 참전자들을 충분히 인터뷰하지 못하고 문헌 자료 조사만으로 취사선택하여 서술한 내용이므로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참고자료-짜빈박전투와 동일
*파월한국군전사 (22권본, 국방부 전편위)
*증언을 통해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군사편찬연구소)
*해병실록-덕산에서 월남까지 (정채호)
*해병대의 전통과 비화 (정채호

* 디펜스타임즈에 연재했던 글임 

 

출처:오유

 

 

 

 

 

 

저때 해병대는 진짜 "잘싸웠다" 라고 말할수밖에.....

우연히 돌아다니다 보고 퍼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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