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시작되고, 수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국가와 제국들이 나타났고 또 번성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국가와 제국들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세계를 호령했고 역사의 한축을 장식했다.
하지만 세월 앞에 그들의 찬란했던 영광은 모두 사라져있다.
그들 대부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공간이라고는 박물관 한구석에 위치한 1평 남짓의 유리 전시장 뿐이다.
무관심한 눈빛으로 팔짱을 낀채 느그적 느그적 관람객들은 전시장 앞을 지나치고, 유물이 되어버린 그들은 먼지만 쌓여간채 잊혀져간다.
언젠가는 자신에게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떨어지길, 찬란했던 자신의 순간이 다시 기억되기를 꿈꾸며 그들은 모두 잊혀졌다.
그렇게 그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수천년의 세월동안 바람이 불어다온 모래와 먼지에 파묻혀서.
제국들의 빛나는 영광도 세월 앞에선 무력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국가가 있다.
수많은 제국들이 잊혀진 가운데에도, 그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분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가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것도 아니다.
그가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를 쌓아 부귀를 누린 것도 아니다.
그가 자신의 문화를 널리 퍼트려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다.
스파르타.
펠레폰네소스 반도, 그것도 그것의 반절정도에 불과했다.
부강했던 적도 없다. 금은보화가 넘쳐난 적도 없다. 다른 폴리스인 테베나 아테네와 비교하면 지지리도 못사는 국가였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로마의 판테온 같이 입이 떡 벌어지는 건축물을 세운 적도 없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후대까지 이어졌고, 다른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순수학문의 기반을 닦는 위업을 달성했다. 스파르타는 그러한 문화적 성취를 달성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아직까지도 기억된다. 사람들은 스파르타라는 단어를 들으면 경외심을 느낀다.
스파르타라는 단어는 하나의 상징이자, 그 자체로 의미를 내포한다.
사람의들 머릿속에 각인된 스파르타에 대한 그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가 수천년이 넘는 세월의 장벽을 뜷고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스파르타의 이야기들은 아직도 회고된다. 그들이 어떻게 전사로 컸으며,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믿기 힘든
그 이야기들은 2천년의 세월을 넘어서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전사로서 스파르타인의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산모의 몸에서 아기가 나오면, 양수가 채 마르지 않은 아기를 검사관들이 손으로 들고는 면밀히 쳐다본다.
'스파르타의 명예에 걸맞는 아기인가?'를 판단하고, 기형아거나 약골이라 판단되면 애원하는 산모의 손을 거칠게 떼어낸 뒤 아기를 굶겨죽였다.
남자아이가 7살이 되면 병영에 입소시켰고, 무자비하게 훈련시켰으며 생지옥같은 병영 안에서 생존투쟁을 시켰다.
독약에 대한 면역력을 얻기 위해 주기적으로 독초를 먹었고, 맷집을 키우기 위해 일부러 채찍질을 당했고, 매질을 견뎠다.
16세가 되면 스파르타인들은 도둑질을 통해 자신들의 끼니를 떼워야했고, 도둑질을 하다 붙잡히면 흠씬 두들겨 맞았다.
자신이 전사로 태어났으며,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예 한명을 몰래 습격해 죽인 뒤 증명해보여야했다.
여자아이는 발육이 빈약하거나, 나이를 먹고도 2차성징이 나타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건강한 산모가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는 신념 하에, 여자들도 운동을 해야했고 육체미를 닦아야했다.
스파르타 남자가 날렵한 근육질의 몸매였다면,
스파르타 여인들 또한 만만치않은 몸매의 소유자였다. 아니, 더 아름다웠다. 스파르타에 처음 온 타 폴리스 출신 남자들은 스파르타 여인들의 모습을 보고
침을 줄줄 흘리곤 하였다. 스파르타의 여인들은 그리스 전역에서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여인들이었다.
군살없이 탄탄한 몸매. 풍만한 유방과 커다란 엉덩이. 탄탄한 허벅지. 그리고, 마치 자신의 몸을 자랑이라도 하듯 음부와 젖꽂지만 간신히 가린채 스파르타 여인들은
반라의 몸을 드러내고 거리를 당당히 활보하곤 했다. 스파르타의 여인들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전사였다.
기초 군사교육을 받고, 전투 수행 능력을 길렀던 그들은 남자들이 먼 곳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적이 오면, 용감히 적에 맞서 싸웠다.
명장으로 칭송받던 에피로스의 피로스 대왕마저 스파르타의 여성들 앞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스파르타의 여인이 다 자라면, 여인은 이제 건강한 아이를 낳을 의무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 여인은 동 연령대의 다른 여인들과 함께 홀딱 벗겨져 어두운 방안으로 쳐넣어지는 것이다.
촛불 몇개만 켜져 얼굴만 간신히 빨갛게 비추는 방안에서, 흥분감에 휩싸인 여인들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방 안을 음란한 페로몬으로 가득 채운다.
그러면, 혈기 왕성한 스파르타 남자들이 여자의 냄새로 가득한 그 방안에 들어와 여인 하나를 골라 팔목을 잡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여인은 저항하면서 싸울 것이다. 팔목을 뿌리치려고 노력하고,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도 할 것이다.
여인은 자신을 고른 남자가 스파르타인으로서의 강인함을 가졌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는 더 거칠게 여자의 팔목을 잡고는 잘 단련된 근육질 몸으로 여자의 몸을 구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짐승같은 교미가 시작된다.
첫경험은 후배위로 시작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스파르타 남자는 이 순간 전까지 평생을 병영에서 다른 남자들과 보내왔다.
또래 남자아이들이나 자신의 멘토 역할을 해주는 성인 남자와 동성애를 하며 지내온 스파르타 남자들의 눈에, 색기가 넘치는 여인의 몸은 전혀 흥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여인들은 통상 짝짓기가 이뤄지는 날이면 긴 머리칼을 짧게 잘라내 군인머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여인의 짧은 머리를 후배위 자세에서 보는 스파르타 남자는 여인을 남자로 상상하며 흥분감을 느끼고, 자신의 물건을 발기시키곤 했다.
1년의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나면, 이 모든 것이 다시 반복된다. 그리고, 아이가 이 모든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그 아이는 드디어 스파르타의 시민이 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파르타 시민의 자격을 얻은 아이는 스파르타의 영광을 위해 전투에서 싸운다.
하지만, 스파르타인들은 육체만 강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화술은 그리스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것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의 말은 그들의 강인한 이미지에 걸맞게 매우 간결하면서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뼈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그들의 화술을 동경하였고, 간혹 스파르타인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방문하는 일이 생기면 화술을 듣고자 일부러 말을 걸었을 정도였다.
그리스인들은 스파르타인들의 답변중에서도 기억될만한 것들은 글로 남겼는데, 아래 기술할 내용들이 바로 그것이다.
1. 타 폴리스에서 스파르타로 온 사절이 스파르타의 왕을 영접하였다.
사절이 물었다. "스파르타의 영토는 어디까지입니까?"
왕이 대답하였다. "이 창이 닿는 곳까지."
2. 사절은 이어서 물었다.
"왕이시여, 스파르타의 성벽은 어디있습니까?"
왕이 자신의 병사들을 가리키며 대답하였다.
"이것이 스파르타의 성벽이요."
-스파르타인들은 성벽을 쌓지 않았다.
스파르타인들은 벽돌 따위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맡기는 것보다는 용맹한 전사들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맡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이웃한 폴리스에서 스파르타 왕을 불러 자신들이 새로 쌓은 성벽을 자랑해보였다.
스파르타 왕은 성벽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괜찮은 요새다. 여자들이 숨기에는."
4. 페르시아의 사절이 스파르타에 도착하였다.
사절이 말하였다.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로부터 흙(영토)과 물(영해)을 요구한다."
사절의 말이 끝나자, 스파르타인들은 사절을 깊은 우물에 집어던졌다.
스파르타인들이 답하였다. "너의 손으로 직접 파가라."
-영화 300에 나왔던 장면은 이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5. 4번의 사건이 일어난지로부터 10년 뒤. 페르시아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스파르타인들과 그리스 동맹군은 테르모필레에 진을 친 뒤, 페르시아의 공격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페르시아의 사절이 그리스 진영에 도착하였다.
사절이 기고만장하게 말하였다. "대왕의 대군은 그 숫자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아서, 대왕의 군대가 물을 마시면 강물이 마르고 화살을 쏘면 태양이 가려진다."
스파르타 병사가 답하였다. "잘됐군. 그늘 속에서 싸우게 되었으니."
이후 고고학자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을 발굴하자, 엄청난 숫자의 청동 화살촉이 발굴되었다.
실제로 역사속에서도 스파르타인들은 화살비 속에서 싸웠던 것이다.
6. 페르시아의 대왕은 진영을 갖추고 군대를 전진시켰다.
테르모필레 협곡 안에 페르시아의 대군이 빼곡히 들어섰다. 대왕이 군대를 정지시켰다.
페르시아 대왕은 그리스 군에게 서신을 보냈다. 서신은 이러하였다.
"나는 너희 그리스 군을 어여삐 여긴다. 너희는 일전에 나의 도시들을 불태우고, 내 사신들을 죽였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항복하여라. 항복하면 너희를 용서하고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겠다. 무기를 내려놓고, 나의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반겨라.
나에게 맞서 싸운다면 나의 군대를 보내 창칼로 너희 모두를 처절히 죽일 것이다."
스파르타군이 대표로 대답하였다. 페르시아 대왕이 받은 서신에는 단 두마디만이 써있었다.
"와서 죽여봐."
-영화 300에 나왔던 비슷한 장면은 이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7.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전쟁으로 향할때, 어머니들은 그들을 배웅해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방패를 들고 돌아오거나, 방패에 들려 돌아오거라."
-스파르타인들에게 패배의 치욕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었다.
테르모필레(영화 300 전투)에서 살아돌아온 유일한 두명의 생존자 중 한명이었던 전령은 고향에 돌아와서 겁쟁이라는 모욕을 듣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눈을 다쳐서 싸우지 못하고 돌아와야했던 나머지 한명, '아리스토데무스'는 1년간 겁쟁이라는 비난 속에 살다가 이후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가장 먼저 적 대형에 뛰어들어 미치광이처럼 적을 베고는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 부르지 않았다.
8.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달리 스파르타의 여인들은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많은 의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안에 갇혀있을 필요도, 남자의 말에 수긍만하며 기죽어 있을 필요도 없었다.
남자들이 잘못된 의견을 내면 여인들이 팔벗고 나서서 남자들에게 쏘아붙이기도 하였다.
스파르타 남자들 또한 스파르타 여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말을 따랐다.
이런 스파르타 여인들의 모습을 본 아테네 여인은 의아함을 느꼈다.
아테네 여인이 스파르타 여왕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스파르타에서만은 여자들이 남자들을 다스리는 겁니까?"
여왕이 답하였다. "스파르탄 여자만이 진정한 남자를 낳으니까요."
-실제로 스파르타 여자들은 타 폴리스 출신의 남자들을 나약하게 느끼곤 하였다.
-스파르타의 군대가 원정을 떠나고 스파르타가 비어있을때, 고대 역사에 손꼽히는 명장이었던 피로스가 대군을 이끌고 스파르타를 침공했다.
노인과 청소년들만이 남아있던 스파르타는 항복까지도 고려했지만, 여자들이 칼과 무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와 남자들을 꾸짖으며 전선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전선에서 여자들 또한 남자들 옆에 나란히 서서 피로스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스파르타는 전투에서 승리했다.
9. 마케도니아의 왕이 스파르타의 사절을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스파르타의 사절이 궁궐에 도착하자, 마케도니아 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사절이 단 한명뿐이었던 것이다.
마케도니아 왕이 말하였다.
"다른 폴리스에서는 사절단을 꾸려 정중하게 오거늘, 스파르타에서는 단 한명의 사절만을 보냈단 말인가? "
스파르타의 사절이 말하였다.
"네. 한명의 왕에게 한명의 사절이 왔습니다."
10. 9번으로부터 100여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마케도니아의 왕은 필립 대왕이었다.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대왕은 아테네와 테베라는 두 강대한 폴리스를 상대로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명실상부한 그리스 최강국으로 발돋움한다.
(마케도니아의 군대)
필립 대왕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막강했다.
5m가 넘는 긴창을 꼬나쥔채 밀집대형을 이루고 상대를 압박하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당대 최강의 중장보병이었고,
그 유명한 페르시아의 기병대를 상대로도 승리를 거둔 헤타이로이는 세계 역사에 꼽힐만한 정예기병이였다.
아테네와 테베가 마케도니아에게 대패하였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리스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4만에 가까운 정예병력을 이끌고 필립 대왕은 과시하듯 그리스 남부로 천천히 남하하였고,
아테네, 테베, 코린트, 아르고스 등 당대 주요 폴리스 모두가 앞다투어 필립 대왕에게 사절을 보냈고 그의 패권을 인정하였다.
단 한곳만을 제외하고.
필립 대왕은 대노하였다. 그는 백년 전에 스파르타 사절이 마케도니아의 왕에게 모욕을 준 역사를 잊지 않았다.
그는 더이상 스파르타 사절을 기다리지 않았다. 군대를 계속 남진하며, 그는 스파르타에게 서신을 보냈다. 협박에 가까운 서신이었다.
"일전에 너희는 나의 선왕을 모욕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우리를 모욕하려 드는구나.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가 나의 패권을 인정하고,
심지어 북방의 야만족들까지도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금, 너희는 너희의 콧대높은 자존심만을 세우며 나를 무시하는구나. 나의 군대가 4만명이다.
중장보병만 2만명이 넘고, 기병대만 2천명이 넘는다. 너희의 나라는 쇠락해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너희의 국경을 간신히 지킬 정도가 되었으며
너희의 굶주리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남자들이 이국에서 용병으로 싸우는 상황이다. 그런데 감히 또다시 나의 나라를 모욕하는가?
테베와 아테네의 동맹군을 나는 카이로네이아에서 무찔렀다. 적들은 우리의 창날에 꿰뜷렸고, 그들의 신성대는 나의 군대에 포위되어 몰살당하였다.
내가 지금 군대를 이끌고 남진을 하고 있으니, 곧 코린트를 지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설 것이다. 더이상의 지체없이 항복하여라.
내가 나의 군대를 이끌고 너희의 땅에 들어가면, 모든 거주민들은 도륙당하고 농토는 황폐화될 것이며, 너희의 도시는 지도에서 지워져버릴 것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스파르타 또한 서신을 보냈다.
아주 짧은 서신이었다.
필립 대왕이 받은 서신에는 단 한마디만이 적혀있었다.
"들어가면."
이후 이어진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원정 중에도 스파르타는 그리스 폴리스들 중 유일하게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병사들을 보낼 의무 또한 수행하지 않아도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