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속어로 '고문관'이란 단어가 있다. 고문관이란 아무리 설명해도 지시사항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각종 사고를 치는 병사를 가리키는 군대 은어로 쓰인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고문한다고 해서 고문관으로 알려져있으며, 군대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됐다.
오늘날 사용하는 고문관의 의미는 이 미군 군사고문관들에게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군 고문단들은 한국이란 나라 자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다 보니 말도 잘 안 통하고, 현지실정을 잘 몰랐다고 한다. 또한 주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거나, 만주와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한국군 장교들과도 전술교리나 훈련방식 등을 놓고 의견차이가 발생해 충돌하는 경우도 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고문관'은 말이 잘 안 통하는 답답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굳어졌다고 한다.
주중 독일 군사고문관으로 파견됐던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장군 모습
하지만 아시아 지역에 파견된 군사고문관들이 모두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 주중 군사고문관으로 파견됐던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Alexander von Falkenhausen) 장군의 경우에는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의 토대를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있다. 팔켄하우젠 장군은 1897년 소위로 임관한 이후 1930년 퇴역했다가 1935년부터 1938년까지 3년간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장을 지냈다. 그는 중국군의 현대화에 앞장서며 특히 일본의 상하이 침공 당시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1897년 당시 러시아 군사교관들에게 훈련받았던 대한제국 친위대 모습
이에 일본은 독일 측에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청했고, 독일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송환을 결정했다. 팔켄하우젠 장군은 더 남을 것을 희망했으나, 본국의 송환령에 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1938년, 고국으로 돌아가 2차대전의 서부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그는 전후 나치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12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곧 석방됐으며, 1958년에는 대만 정부가 그에게 감사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19세기말에는 중국 청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이 근대식 무기체계를 받아들이면서 많은 군사고문단들이 초청돼왔고, 군사교관들도 많이 파견되곤 했다. 우리나라는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정부에서 1896년부터 1897년까지 두차례 군사교관단이 파견된 바 있다. 러시아 군사교관은 당시 고종이 창설한 대한제국군 친위대를 훈련시켰고, 수비와 사격훈련 등 기본훈련과정 등을 수행했다. 이들이 남긴 당시의 물가, 생활상, 사진 등은 구한말의 민중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