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의 일본음식을 좋아하던 황교익
뭐 개인적으로 일본음식을 좋아할 순 있으나.
국뽕을 제외 하고서라도 역사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설을
정설로 하고 방송에 나와서 그 설이 진짜인거처럼 얘기하시는 것을 보니
점점 이상하네요.
동국세시기, 열왕세시기, 경도잡지, 등 여름철 보양식으로 지금의 삼계탕이나 육개장 등과 함께 등장하며
양반들이 임자수탕이나 깨국을 먹으면서 피서를 즐겼고.
일반 평민들은 여름보양식으로 장어를 이용한 장어국이나 백숙을 많이 먹었다
남도 일부지방에서도 여름 보신탕으로 장어국을 끓여 먹었고 식료찬요라는 고서에서도 연산군이 장어요리를
즐겨벅었고 고종도 장어백숙을 즐겨 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황교익씨는 여름에 보양식으로 먹었던 일본의 풍습이 우리나라로 왔다라고 하고..
한정식은 일제 강점기때 만들어진 요릿집이라고 하였는데.
근데 정식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 나중에 생긴게 맞긴하지만
황교익은 한정식에 나온 음식들이 조선시대에는 없던 음식이라고 말했는데.
(위에 사진은 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한복려 씨가 구현한 궁중음식.)
경국대전,조선왕조실록,각종 진연의궤, 진작의궤, 궁중음식발기 등등에
그릇, 조리기구, 상차림 구성법, 음식이름과 음식의 재료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그중에서 조선시대 왕가의 일상식을 유일하게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가 있습니다.
황교익이 말하는 한정식은 일제시대 기생집에서 유래되었다. 라고 했지만 바로 그 기생집에서 나온 음식들 중 대부분이
조선왕조가 해체 되면서 궁중음식이 외부로 전해지면서 조선왕조 궁중음식이 기생집에서 나왔을 뿐이지
기생집이라고 폄하하면서 음식까지 폄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멸치육수는 일본이 원조?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의 멸치 항목을 살펴보면 이 물고기로는 국도 만들고(或羹), 젓갈도 만들고, 포도 만들고
살피건대 요즘 멸치는 젖갈도 담고, 말리기도 해서 각종 음식으로 충당하는데 식품으로는 천한 물고기라고 했고.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에서는 멸치에 대해 모래사장에서 말려 육지에 파는데 값이 한 웅큼에 1전이며,
비가 내려 부패할 때에는 비료로 쓰며 나라 안에 흘러 넘쳐 시골 사람도 먹는 식품이 된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멸치의 유통이 북어가 전국에 두루 넘치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전했습니다.
과거 일본은 1872년까지 육류 섭취를 금지했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 들어온 서양인이 자국민들보다 체격이 월등히 크자
일본 왕실은 육류 섭취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 전격적으로 육식 해금령을 내렸습니다.
일본의 요리나 음식관련 고서나 고대 기록물에 전혀 소고기나 돼지고기에 대한 기록인 전무한 상태입니다.
고서에 전해지는 불고기의 기록
김홍도의 <설후야연> (雪後夜宴)에서는 양반가 집안에서 불고기를 먹는 모습이 나오고
4세기 진대(晉代)의 수신기(搜神記). 최남선‘조선상식문답’, 음식디미방’기록‘설야멱(불고기)’, 필원잡기 (筆苑雜記)(1487년),
산림경제 (山林經濟)(1715년)는 설야멱 , 시의전서(是議全書), 추재집 (秋齋集)(1839년) 소고기를 먹는 법과 조리법 ,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1842년), 해동죽지 (海東竹枝)(1925년)에는 설야적,
조선요리제법(1939년)에서는 우육구이(너비아니) 만드는 법에 대하여 ,
고사통 (故事通)(1943년) 맥적(불고기)의 기록이 있습니다.
일식에서는 한식의 과거와 미래가 보이면서
중식은 후려처버리고..ㅋㅋ
황교익씨가 물론 개인적으로 많은 음식을 먹고 탐구하면서
칼럼을 쓰며 맛집 블로거의 시초인 것은 인정하지만
요리관련 어떠한 전공도 없으며. 논문을 쓴것도 없읍니다. 물론 한국요리 역사에 대해서 인정 받는 것도 없다고 하네요.
-고향이 어디인가
-마산이다
일본 교토에서 반찬가게를 했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중대신문 인터뷰>
대학원에서 관광경영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유학.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처럼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