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지마 섬 식인사건

초대완료 작성일 18.12.20 20: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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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제도>

 

일본 본토에서 약 100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1945년 2월 23일부터 25일 사이에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마 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일본군 장군과 장교 및 병사들이 포로가 된 미군 공군기 비행사들을 잔혹하게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잘라 인육을 먹는 사건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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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지마 섬>

 

이 섬은 일본 본토와 이오지마 섬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치치마 섬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 소장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해군은 모리 구니조 소장 휘하에 치치시마 방면 특별 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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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의 조지 부시>

 

1945년 2월, 미군은 이오지마 전투를 위해 일본의 전략적 요충지인 치치마섬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진행한다. 

 

이 때, 제 51뇌격대(VT-51)의 일원 중 한 명인 조지 부시는 본인의 애기(愛機) '바바라'를 타고 8000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며 작전을 수행하던 중 일본군의 대공포에 명중해 추락하게 된다. 

 

하지만 부시는 천운으로 간신히 낙하산 탈출을 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구명정은 상당히 먼 곳에 있었고 미군기가 강하와 상승을 반복하며 구명정의 위치를 가르쳐준 덕분에 가까스로 구명정에 도달한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일본군은 함정 두척을 파견해 그를 생포하기 위해 쫓아왔지만 미군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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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되는 미국 제 41대 대통령> 

 

훗날 천조국 대통령이 되는 부시 중위는 그렇게 두세 시간 가량을 치치지마 섬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풍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치치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 미군 가토급 잠수함에 의해 구조된다. 

 

오가사와라 제도를 겨냥한 수차례의 폭격 중 미군기 몇몇도 격추되어 여러명이 바다로 떨어졌는데, 이 때 일본군에게 잡힌 조종사들은 지미 다이, 글렌 프로이저, 플로이드 홀, 마브 모숀, 워런 얼 본, 딕 울러프, 그레이디 요크, 신원미상. 이렇게 8명의 포로들은 이후 일본군의 식인 희생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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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지마 식인사건의 주범 다치바나 요시오>

 

1945년 3월 이오지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대본영은 다치바나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 109사단장으로 임명하고 해군도 모리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킨다. 두명의 지휘관 중 주도권을 갖고 있던건 다치바나 요시오였고, 모리와 해군은 사실상 육군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최고 지휘관이 된 두 장성은 미군 포로 학대와 처형, 그리고 식인이라는 전쟁범죄를 직접 진두지휘 했다. 이 둘 외에도 마토바 스에오 육군 소좌와 요시이 시즈오 해군 대좌가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이들은 미군 포로 8명을 상대로 총검과 죽창으로 마구 찌르고 용수철 채찍으로 후려치는 등의 고문을 한 후, 포로의 가슴과 배를 가르고 간과 내장, 허벅지 살을 베어 인육을 먹었다고 한다.

 

다치바나의 명령에 따라 마토바가 처형한 미군 포로에 대한 처리에 대한 구두 명령.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칸무리(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사카베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坂部)

 

1945년 3월 9일 오전 9시 대대장 육군 소좌 마토바 스에오

발령 방법: 칸무리 중위와 사카베 군의관을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전후 괌 군사재판에서 증거로 제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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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토바는 보조위생병들 집합시켜 포로의 해부 광경을 지켜보도록 명령했고, 사카베는 마토바의 지시대로 시체를 처리했고 308대대의 장교 전원이 방공호 안에 있는 부대장실로 불려와 포로의 인육을 먹어야 했다. 

 

다치바나는 젓가락으로 인육을 집어 옆자리에 앉은 사카베 군의관에게 먹이기도 했다. 대충 씹는 흉내를 내던 사카베는 곧장 화장실로 가서 모두 토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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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철도에서 학대당한 연합군 포로들>

 

1947년 1월 13일 로빈슨 검사가 일본의 전시 만행을 밝히기 위해 제출한 마토바의 진술서에 식인 만행이 시작된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식인 사건은 1945년 2월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 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가서 다치바나 장군에게 ‘미군 비행사는 스에요시부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는 부건빌이나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으로 옮겨졌으며,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가토 다케무네 대령이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뭔가 육류와 술을 준비할 방도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장군은 내게 미군의 처형에 대해 물으면서 인육을 얻을 수 없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육과 술 한 되를 준비시켰습니다.

인육은 가토 대령의 방에서 요리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맛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인육이 맛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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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일본군에게 참수당한 호주군 중사 레나드 시플릿>

 

해군의 요시이 대령, 구라사키 대위, 고야마 소위는 부하 장교들과 함께 구금 중이던 미군 포로를 살해하여 장기와 인육을 적출한 뒤 이를 병사들에게 먹도록 했다.


일본군 병사 오와미쯔의 진술에 의하면 가장 먼저 잡아먹힌 미군포로는 전신교환원 00이었다.
일본군은 전신 교환원 00을 새로 판 무덤앞에 꿇어앉혀놓고 눈을 가린후 군도로 머리를 자르고 살을 도려내었다.

다음으로 00이 처형되었는데 한 일본군 장교는,
"우리는 죽창으로 00의 간을 산산조각낸후 채소, 간장, 양념을 넣고 삶아 맛잇게 먹었다"고 진술한다.

세번째로 학살된 미군은 비행사 00였다.
일본군은 00의 간과 허벅지고기를 잘게 썰어 삶아먹은 후, 다른 비행사 00을 살해하고 같은 방법으로 그의 간과 허벅지고기를 먹었다. 이런 방식으로 치치시마의 미군 포로들은 일본군에게 잡아먹히게 되었다.

 

당시 치치시마 섬에서 일어났던 식인 행위에 대한 각종 증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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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Missouri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전권 대사 시게미쓰 마모루>


당시 열악한 군비와 부족한 식량으로 태평양의 크고 작은 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군이 기아에 허덕이다 인육을 먹었다는 것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전후 도쿄재판의 기록(1946년 12월11일)에 의하면, 1944년 12월 뉴기니 전선에서 제18군사령부가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며, 실제로 명령을 위반한 병사 4명을 처벌했다고 한다.


하지만 치치시마의 경우는 기아나 식량부족이 원인이 아니었다는게 더 큰 문제였다. 당시 치치시마의 식량상황을 보더라도,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고 한다. 미루어 볼 때 치치시마에서는 기아 때문이 아니라 단순 술안주감으로 포로를 잡아먹었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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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항복하는 다치바나 요시오>

 

1945년 9월 2일 치치지마에 미군이 상륙해서 9월 3일 다치바나 장군과 모리 제독이 대표로 미 해군 전함에서 정식으로 항복했다. 항복교섭에서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군 조종사가 몇 명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했다.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고 둘러댔는데, 그에 대하여 미군 대표인 스미스 대령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으나 이미 일본군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밀하게 입을 맞추어둔 상태였다.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침묵할 것을 지시해놓은 상황이었다.

 

미군은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미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다.


1946년 2월 초, 마침내 셰퍼 미군 소령은 호리에를 불러 "잔학 행위의 수괴는 육군의 다치바나와 마토바 그리고 해군의 모리와 요시이가 아닌가?"하고 다그쳐 물었다.


식인을 했다는 증언은 산더미처럼 나왔지만 증거가 나오질 않아 식인 혐의를 입증할 수 없게 되었으나, 처형된 미군 포로의 시신을 갖고 목베기 훈련 등 엽기적인 행위가 재판에서 증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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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재판 A급 전범들>


1946년 5월부터 9월까지 괌에서 군사재판이 열렸다. 치치시마 관련 피고는 다치바나 중장 이하 25명이었는데, 토라크 섬에서 자행된 포로 생체해부 등, 중부태평양 각지의 만행에 연관된 전범용의자는 모두 63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도 치치지마의 식인사건이 가장 주목을 끌었다.

 

심리 중에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이 이어졌는데, 특히 다치바나의 당번병이 인육을 먹던 일본군의 주연(酒宴) 상황을 묘사하면서, 다치바나가 “맛있다, 한 접시 추가!”라고 했다고 증언하자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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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정부 왈. 쪽바리들이 식인을 저지르다.>


미군신문인 ‘괌 뉴스’는 연일 ‘캐너벌리즘(cannibalism·식인풍습)’이라는 큰 제목으로 재판 경과를 보도했으며, 일부는 미국 본토 신문에도 전재됐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진다. 이상하게 생각한 호리에가 그 사정을 미군측에 문의하자 “상부 명령으로 기사 게재가 금지됐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희생된 미군의 어머니들이,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믿은 아들이 그런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니 너무도 고통스럽다”며

기사가 실리지 않게 해달라고 대통령에게 탄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판 결과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령, 이토 중령, 요시이 대령, 나카지마 대위에겐 사형이 선고됐고, 모리 중장과 가토 대령,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에 처해졌다.

 

해군의 가미우라 소령은 구류 중 자결했으며, 일본 본토로 귀환한 뒤 도망갔던 고야마 소위는 집 근처 야산에서 역시 자결했다. 마찬가지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재판을 받은 사카베 군의관은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중 사형이 선고된 5명은 사형집행일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미군헌병들에게 구타당했고, 5명중 2명은 사형집행일이 오기전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GHQ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다치바나가 수감된 곳의 간수를 담당했던 미군 헌병들이 그들을 매일 두들겨 팼으며, 심지어 같이 수감되어 있던 일본인 장군 4명에게도 매일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본인들도 전범이지만 전쟁 범죄자인 반면 저놈은 아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때려도 된다는 게 이유.

게다가 이 장군들의 부하들까지 원정와서 이 식인귀를 두들겨 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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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재판의 판사였던 라다비노드 팔 판사>


조사결과 엄청난 증언과, 당사자들이 죄를 자백하면서 이 야만적인 사건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도쿄 전범재판에서 난징대학살을 부정하고 일본의 참략을 정당화하며 여러 일본 전범들을 무죄로 풀어주던 라다비노드 판사도 이 사건을 보고 경악한다. 

 

"살면서 이런 또라이들은 처음 본다. 아무리 지금 만든 법으로 이전에 저지른 전쟁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행위 일지라도 이 미친놈들은 아니다."

 

주저없이 다치나바 요시오와 요시이 시즈오, 마토바 스에오, 이토 키쿠지, 그리고 나카지마 노보루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다치나바 요시오 중장은 아군의 사기를 증가시키 위해서였다는 미친 소리로 항소하였지만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던 점에서의 야만적인 행동과 군 지휘부만 식인을 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항소는 무시 되었다.

 

나카지마 노보루 육군 대위는 사형선고 직후 눈물을 흘리며, "포로가 되면 역적으로 취급하는 일본의 국가적 풍토가 결국 외국인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로 발전한 것 아닙니까? 포로학대는 일본 민족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잘못 아닙니까? 나는 국가를 증오하면서 죽어갑니다." 라는 변명을 남기고 사형 당한다.

 

해군 지휘자였던 모리 소장은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했으나, 부하장군인 호리우치 토요아키에게 죄를 뒤짚어 씌우고 종신형을 받았는데 호리우치는 어이없게도 누명을 쓰고 총살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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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히메 현의 호국 신사>

 

어이없게도 현재 에히메 현의 에히메 대학 바로 옆에 있는 호국 신사에 있는 '순국 22열사의 비'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며 영령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다치바나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봉헌되어 있으며, 아직도 수많은 일본인들이 참배하고 있다고 한다.

 

"대동아 전쟁 이후 전범 재판에서 억울하게 죽어서 유족들의 원통함을 달래고자 에히메현을 지킨 호국 영령 22인에게 차배를 올립니다." 호국 신사 안에 새겨져있는 비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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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전 대통령은 1988년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전쟁 중 경험한 가장 최악의 시기였다고 밝혔다. 

그는 1989년 히로히토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제서야 일본인을 용서할 마음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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