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밤이 되면 야외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전차노선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간혹 트랙 옆에서 철로를 베개 삼아 잠을 자기도 했다. 철로는 한국인들이 이용하는 전통적인 베개와 크기와 형태가 유사했다. 더구나 철로의 냉기는 한 여름 밤 무더운 몸을 식혀주는 훌륭한 안식처가 될 수 있었다. 1901년 여름 서울을 방문한 한 미국인은 "우리는 기운을 잃은 유령들처럼, 차디 찬 그리고 그들에게는 안락한 철로에 목을 베고 하얀 옷을 입은 채 길게 누워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철로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전차의 운행 시간을 잘 알고 있어 막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돗자리를 깔고 철로에 목을 베고 누워 찬 밤공기를 즐기곤 했다. 그러나 1901년 8월 어느 날 아마도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막차의 출발이 지연되었다. 적어도 당시 두 사람은 이 전차가 늦게 출발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막차가 이미 지나갔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돗자리를 펴 철로에 목을 베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당시 전차는 전등은 물론 아마도 종을 장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밤이 깊었고 시간이 이미 늦었기 때문에 운전자가 전차가 오고 있음을 보행자들에게 알리는 종소리나 전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운전자는 밤이 깊어 거리에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하고 늦은 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전차를 평소보다 빨리 운전했다. 그는 철로에 목을 베고 누운 두 사람을 보고 급히 종을 울리고 소리를 쳐서 이들에게 경고하며 전차를 멈추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 결국 이들을 치고 말았다.
전차는 엎드려 잠자고 있던 두 사람의 목 위로 지나가고 결국 두 사람은 마치 "전기단두대"처럼 목이 잘리고 말았다. 흥분한 군중들이 두려움에 떨며 모여들었고 이웃들의 목을 토막 내 죽음으로 몰고 간 이 살인기계를 부수자고 복수의 소리를 치며 거리로 나섰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운전자는 운이 좋게도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캘리포니아 하우스"가 도착하자 곧 뿔뿔이 흩어졌다. "캘리포니아 하우스"는 1898년 최초의 전차 폭동 이후 한국에 온 캘리포니아 출신 일단의 카우보이와 기관사들을 의미했다. 이들은 커다란 체구와 거친 외모를 지니고 있어 체격과 싸움실력으로 쉽게 한국인들을 압도했던 것이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기관사이며 기술자이지만 사실 이 회사가 높은 임금을 주고 고용한 경호원들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한성전기회사는 철로는 이 회사의 사유재산임을 알리는 전단지를 도시 전역에 전봇대에 붙이며 사건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누구도 철로에서 잠자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다. 이에 사람들은 전단지를 거칠게 찢어 버리고 자신들은 철로 위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다시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긴박한 상황이 계속 되더니 급기야 한성전기회사는 한국인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 미국인 방문객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전기단두대를 영웅적으로 무시하며 차디 찬 강철 위에 목을 베고 밤공기를 계속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전차의 운행 일정을 일부 변경했다. 야간전차는 반드시 일정에 따라 운행했다. 만약 출발이 지연되거나 기계가 고장날 경우, 야간전차는 다음 날 아침까지 운행을 연기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이 회사는 한국인들과 잠시 평화로운 휴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전차와 관련된 폭동과 소란은 다음 여러 해 동안 계속 일어났다.
참고문헌 리스트 Burton Holmes, The Burton Holmes Lectures, vol. 10. William Sands, Undiplomatic Memories. Fred Harvey Harrington, God, Mammon, and the Japanese. Horace N. Allen, Things Kor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