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살인사건

락킷걸 작성일 19.04.08 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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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 - 웨인 윌리엄스

 

 

범인이 검거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 받은지 20년이 지났지만,

 

애틀란타 아동 살해 사건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건의 발단은 1979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여인이 도로를 청소하다가 길거리에서 흑인 소년 두명의 사체를 발견하게 된다.

 

한명은 머리에 22구경 권총을 맞았고, 다른 한명은 질식사였다.

 

그 후 2년 동안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으로 적어도 27명에 달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고, 미국 전역이 뒤숭숭해졌다.

 

특히 애틀란타 흑인사회의 분노는 아주 대단했다.

 

매체들의 관심이 집중 되었고,<뉴욕타임즈>는 '연쇄살인범'이라는

 

당시로서는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던 용어까지 써가며 기사를 내보냈다.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었으며, 대통령까지 관여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주요 용의자가 체포되고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논란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 살인 사건은 치안 당국에 막대한 난제를 던져 주었다.

 

우선 살인범의 범행수법에 일관성이 없었다.

 

대부분 피해자들은 목이 졸려 질식사 당했지만, 일부는 총에 맞았고,

 

또 다른 일부는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맞아 죽은 이들도 있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남자였지만, 어린 소녀들도 몇몇 있었다.

 

예를 들어, 1980년 3월4일, 12세 소녀 엔젤 르네어는 과제를 마치고 놀러 나간 뒤 귀가 하지 않았다.

 

6일 뒤 엔젤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아이의 목에는 전기줄이 감겨 있었고, 입에는 여자 속옷이 처박혀 있었다.

 

게다가 한창 공포가 떠돌던 때에 범인은 성인 남성들에게도 범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20세의 래리 로저스, 21세의 에디 던컨,

 

23세의 마이클 맥킨토시, 27세의 너대니얼 카터가 목숨을 잃었다.

 

1980년 봄 애틀란타의 흑인들은 살인을 막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애틀란타의 흑인 젊은이들을 몰살하려는 kkk단원들이 활동한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하원 인종평등위원회의 로이 아이니스 의원은

 

악마 숭배자들의 소행이라는 식으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살인범에게 10만달러의 현상금이 붙자 각지에서 범인을 잡으려는 전문가들이 모여든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범인 검거에 연방 기금을 지원하겠다고 했고,

 

버트 레이놀즈, 무하마드 알리 등 유명인사들도 재정을 지원하겠다고 나선다.

 

fbi 요원 35명이 포함된 특별수사팀이 조직되었고,

 

수사팀은 2만명을 직접만나 면담하고, 15만 명과 전화 통화를 하여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사건은 1981년 5월 22일 이른 아침에 드디어 돌파구가 열렸다.

 

차타후치 강의 다리 위에서 망을 보던 경찰은 강물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게 되고,

 

급하게 다리를 빠져나가려던 차량 한대를 멈춰 세웠다.

 

차량의 운전수는 웨인 윌리엄스라는 23세의 흑인 청년 이었다.

 

 

윌리엄스의 성장 배경에는 연쇄살인범에게 흔히 나타나는 징후들이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스의 부모는 교사였고, 그는 안정된 온화한 가정에서 재능을 키워나가도록 격려를 받으며 자랐다.

 

그는 라디오 방송에 열광하였으며, 장래에 음악 사업으로 큰 성공을 이루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던 소년이었다.

 

그는 16세 때 자신의 집 지하실에 방송국을 만들어 음악을 송출하기도 했다.

 

윌리엄스는 전기 계통 외에 사진에도 관심이 많았고, 카메라 조작 실력도 꽤 뛰어났다.

 

하지만 적극적인 어린 윌리엄스에게 모든 것이 다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지성과 야심을 지녔지만 대학을 마치지 못했으며,

 

조지아 주립 대학을 1년만 다니고 중퇴하였다.

 

장차 제2의 스티비 원더를 발굴하려던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는 허풍선이고 거짓말쟁이라는 평판을 얻게 된다.

 

대단한 인물과 만나게 해주겠다고 남들에게 큰소리 뻥뻥 쳐놓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식이었다.

 

윌리엄스는 극단적 개인주의자가 되었으며,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지도 못한 채

 

20대에 접어들게 되었고, 여전히 부모에게 얹혀 살았다.

 

한편 윌리엄스는 말썽 있는 행동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찰관 흉내를 냈을 뿐 아니라, 사고 현장에 병적일 만큼 지나친 관심을 보였는데,

 

끔찍하고 처참한 사고현장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는 단파 수신기로 경찰의 이동 상황을 엿듣고서,

 

교통사고나 화재, 비행기 추락사고 현장을 쫒아다녔으며,

 

사진과 비디오를 찍어서 지역 언론들에 팔아넘겼다.

 

 

 

당시 다리에서 검문을 받은 윌리엄스는 곧 풀려났다.

 

그러나 이틀 뒤 강에서 시체가 발견되었고, 윌리엄스는 엄중한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에 소환된다.

 

그 후 윌리엄스 집에서 방송매체를 통해 기자회견을 가졌고, 결백을 주장했다.

 

윌리엄스는 여러가지 알리바이를 댔는데 그것이 허점투성이라는 것이 이내 밝혀졌다.

 

경찰은 그를 24시간 내내 감시했고, 법의학 전문가들은 윌리엄스와 범행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에 정신없이 몰두했다.

 

 

마침내 FBI과학자들은 몇몇 피해자들의 집에서 찾아낸 섬유조직과 개털이

 

윌리엄스의 자동차 매트, 집안 깔개, 침대시트에서 나온 것과 일치하다는 결과를 얻었고,

 

1981년 6 월 21일 전격적으로 윌리엄스를 체포한다.

 

9주에 걸친 재판기간 동안 검찰은 윌리엄스를 폭력적인 동성애자로,

 

흑인 젊은이들에게 인종주의적 자기혐오증을 투사한 범죄자로 몰아붙였다.

 

윌리엄스가 몇몇 피해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는 목격자들도 등장했다.

 

재판이 끝날 무렵에 변호사는 윌리엄스를 증언대에 세웠는데,

 

화가 난 윌리엄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사를 '멍청이' 라고 욕했고,

 

여러 정부 관계자들을 비난했다.

 

결국 윌리엄스는 결백을 열렬히 주장했지만,

 

살인 두건에 대해 유죄가 확정되었고,

 

그 각각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윌리엄스가 누명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를 유죄로 몰아간 정황 증거들은 기껏해봐야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정부가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또한 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중요한 정보는 감추어졌다.

 

윌리엄스에게 충분한 변론의 기회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 경찰이 범인을 제대로 잡은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체포된 후 애틀랜타에서 아동 살해 사건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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