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 767회분
'고종 황제의 비자금은 어디로 갔는가'
입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내탕금(황실이 사용하는 재정)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1907년에100만마르크 정도의 금액을독일은행에 비자금을 만들게 되는데
현시가로 따져보면 약 500억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고종이 쓴 비자금의 용도는
일본 영사 보고서에 따르면
여러사람의 항일운동자금줄이라
명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야사를 기록한 책이지만 한국야담사화에서도
독립운동가(우당 이회영 선생)에게 자금 하사
상하이임시정부 설립
밀사 파견을 기록했으며
그 외 도쿄보다 2년 일찍 전차 설립도 고종의 내탕금으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07년 고종황제는 폐위를 당한후,
고종은 러시아에 이범진 영국에 이한우
미국에 헐버트를 파견하여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데
이런 부분들도 전부고종 비자금,
즉 내탕금으로 해결하고자했습니다.
그래서헐버트에게 위 자금을
찾아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호머 헐버트(1863-1945)는조선 후기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던 선교사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죽을때도 한국에 와서 죽었고
고향보다 한국에 묻히길 원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종황제 비자금을 받아서 한국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헐버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하이에 있던비자금을 '나베시마'라는 인물이 빼내가버렸습니다.
그알 팀이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조사를 했는데..
1. 본사건물이 철거되면서 도이치 뱅크에 자료가 없다는 점
2. 1923년, 독일이 전쟁 배상금으로 많은 화폐를 찍어내면서 화폐개혁을 통해 10억마르크가 1마르크로 변했다는 점
3. 상속채권과 같은 채권의 재산권행사는 30년이라는 점
4.1952년 독일채권회의가 열렸지만, 우리는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여 권리가 없다는 점
이런 저런 이유들을들어 손댈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일전에 50만 마르크를 빼간 일본에게서는 법적인 책임이 없을까요?
나베시마.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최측근 인사로써, 외교관으로 활동한 인물로, 통감부의 공을 크게사 후에 외무총감까지 지낸인물입니다.
통감부래안을 살펴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비자금 실체를 알고 고종의 명령서를 위조하여'덕화은행'의 돈을 인출해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돈을 이완용 부자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인한 사람이 이윤용(이완용의 형)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즘 1905년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증거들이 하나둘씩 발견되면서, 일본에게 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지만
1965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청구권의 관한 부분의 포기를 선언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도 불리합니다.
고종이 독일에 보낸 서한 내용입니다
본인에게는 아직 2천만의 신민이 있습니다....
절박함이 보이지만
이미 일본이열강들과의 조약을 맺으며 동맹관계를 형성해왔기 때문에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에 관해
서울대 역사학과 이태진 명예교수님 의견.
경기대학교 안창모 교수님의 의견.
출처 - 펨코
저 또한 고종에 대한 이미지가 무능한 왕으로 알고있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군요.
어쩌면 친일파와 일제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로 전해져오는 역사가 생각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