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그녀를 기억해 본다.....

신들어라 작성일 19.10.08 23: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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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24년전인 1895년 10월8일에 명서황후 가 시해된 날입니다.

시아버지를 배척하고, 나라의 국고를 탕진하고, 친가들과 정권을 잡아, 러시아 와 손잡고 일본의 제국주의 로부터 벗어나려 꿈꿨던 조선의 여인......민 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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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제국주의 일본의 야심으로 뒤덥여 버린 1895년 조선...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으로 위장한 일본군 20 여명이 경복궁으로 난입하자 이 소식을 들은 명성왕후는 궁녀들이 입는 옷으로 급히 갈아 입고 궁녀처럼 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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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일본 낭인들은 지휘자인 일본군 장교 와타나베 대위의 명령에 따라 현장의 궁녀들 모두 집합시킨 후 아이를 낳은 여자를 확인하기 위해 잡히는데로 궁녀들 모두 옷을 벗겨 이를 확인하면서 모든 궁녀들의 한쪽 가슴을 잔인하게 칼로 도려내고 그런 식으로 명성왕후가 누구인지 가려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와중에 명성왕후의 아들 순종의 부인이자 며느리었던 세자비 민씨도 역시 한 쪽 가슴이 도려지는 일을 당하였고, 드디어 궁녀들 중에 명성왕후를 찾아내자 그들은 곧바로 고종과 순종이 보는 앞에서 명성왕후의 배와 옆구리를 세 번 칼로 찔렀다.

그 후 그들은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고종비인 명성왕후를 조용한 뒷뜰로 끌고가 명성왕후의 치마와 아랫도리를 모두 벗겨낸 후 20여명이 모두 돌아가면서 잔인하게 윤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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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 중에는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도 있었다. 그는 사전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포섭되어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가담했으며 20여명의 낭인(일본군인)이 참혹하게 명성왕후를 살해할 때 이들과 함께 칼로 명성왕후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윤간행위에도 직접 가담했다.

이를 현장에서 말리는 궁궐 내 일부 조선중신들도 함께 잡아다 사지를 모두 자르는 등 눈 뜨고 보지 못할  그런 잔인한 행위들을 서슴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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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현장의 상황을 보고 받은 일본 정부 각료로서 대한제국 소속 고문인 이시즈카 에조는 이렇게 자국 장관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스에마쓰 장관님,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건청궁 옥호루에서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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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순종)를 불러 죽은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벗겼습니다.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

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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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시해에 가담한 우범선 과 그 일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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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시해 때 사용한 칼의 글귀

"‘일순전광 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번개같이 단칼에 찔렀다는 설명이 써있다."



 

그리고 이들은 명성왕후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한명 씩 돌아가며 칼로 이마에 십자로 그은 후 곧바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칼로 난도질하였고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처참하게 훼손된 명성왕후의 시신을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명성왕후 침실에서 멀리 떠러진 녹산 남쪽 숲 속에서 기름을 부어 불태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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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 낭인그룹 중 유일한게 조선인이었던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1857-1903)은 바로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육종학자 우장춘의 친아버지로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 병력을 직접 동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군 낭인그룹을 호위하며 명성왕후의 시해를 도와주었고 시해 후 명성왕후의 시신까지 완벽하게 처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명성왕후 공동 시해범인 우범선은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에서 근무하다가 별기군이 창설되자 여기에 참여하는데 그 후 그는 친일 개화파 세력과 교류하며 친일행각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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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이어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포섭되면서 미우라에게 조선정치는 민비(명성왕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개혁이 어렵다며 민비 시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입장에 섰다. 이어 그는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과 제3대대장 이진호를 포섭하여 사변에 참여토록 주도하였고,  명성왕후 시해 후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동경에서 편안하게 일본 군부의 보호 하에 명망생활하면서 사카이라는 일본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우장춘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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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조선에서 명성왕후 시해범이라는 범죄인을 처단하려는 조선 암살단들이 계속 일본 내륙으로 잠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며 1903년 일본 구레시로 몰래 이사했다가 그해 말 복수를 다짐한 고종의 밀명으로 일본에 건너 온 조선인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을 당한다.

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5/13/108747/1

우범선 묘는 동경 아오야마 묘지에 있었으나 같은 낭인출신(일본군 대위 출신)의 일본인 후원자가 우범선의 유골을 분골하여 그의 사후 1년 후에 다시 동경에 묻었다. 

그의 아들 우장춘은 한국전쟁 와중에 귀국하여 그의 일생을 부친의 과오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조국의 농업발전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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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최초로 궁궐에 전화가 설치되자 고종은 명성황후의 묘에 전화를 설치하고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하고 안부를 전하며 울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 까지는 못 하는구나........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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