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을 치던 부관 송희립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이순신은 스스로 투구를 벗고 돌격북을 치면서 싸움에 맞서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李舜臣方戰 免冑自中丸以死).”고 했다.
여기서 면주(免冑)는 투구를 벗었다는 뜻이다.
그는 또 통제사 충무이공 명량대첩비 비문에서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원인은 당파(동인과 서인) 간의 대립과 항쟁으로 점철된 당쟁의 희생물(黨禍)”이라고 했다.
숙종 때 좌의정인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은 가승발(家乘跋 집안의 역사기록)에서 “공은 용의주도하게 방비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왜 몸을 버리고 죽어야 했을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되 공이 성공한 뒤에도 몸이 위태해질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화살과 탄환을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고 했다(當矢石而不避). 어허! 참으로 슬프도다. 과연 그랬을까(嗟乎或其然乎今).”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린은 선조에게 “성(城)을 버리고 군사를 잃은 배신 무리들도 공신이라 자임하여 자기 방창(房窓) 아래에서 늙어 죽건만, 이순신에게는 그 혁혁한 충렬과 큰 공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몸을 버림에까지 이르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보답인가.” 하고 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