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조선시대의 제사는 지금처럼 과한 허례허식이 아니라 음식을 가정 형편에 맞게 올렸으며, 평소 먹던 반찬을 그대로 올려도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우환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건 상식적으로도 형편이 안 좋은데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 차리거나 우환 있는데 무리해서 제사 지내는 꼴을 조상님들이 보고 싶어 하실까? 제사의 의의 자체가 후손으로서 조상께 예를 다하는 것이기에 그 후손들이 직접 음식을 하고 제사상을 차렸다. 그 집안 후손이 아닌 며느리들은 원래 시가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딸도 제사에 참여했다. 시집간 누나가 자신의 집에서 제사상 차리고 남동생이 누나의 집으로 방문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제사상을 차리는 건 노비들이 했지 애꿎은 며느리를 부려먹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가 자기 친정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딸이 제사를 지내고 다른 형제들이 그 집을 찾는 사례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족보 매매로 이름뿐인 양반이 급증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신분제가 뒤엎어지며 너도나도 양반을 표방하려 했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은 진짜 양반이 아닌지라 제사에 대한 왜곡된 생각과 무지로 이렇게 변질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먹은 반찬을 올리든, 피자를 올리든, 찢어지게 가난해서 밥과 간장만 올리든 아무 상관 없다. 우환이 있으면 안 지내도 된다. 애초에 제사상을 차릴 때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말들도 다 현대에 창작된 가짜 전통이다. 종가들을 보면 집안마다, 혹은 지역마다 제사 지내는 방식이나 올리는 음식이 다르다.
또한 해방 이후의 제사는 허례허식의 측면도 있겠지만, 동시에 일종의 잔치 같은 측면도 존재했다. 이 시대에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고기를 입에 댈 수 있었던 것은 추석, 설날, 제사, 가장의 생일 딱 이 정도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타문화권에서 평범하게 하는 축제나 잔치의 성격을 마찬가지로 종교성을 띠고 있는 제사가 적절하게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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