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밝혀두자면
역사가 좋아서 사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원까지 가진 못했지만,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음
<석박사들처럼 한자로 된 1차 사료 긁어와서 맞니 틀렸니를 논할 정도는 아니지만>
앞으로 논할 모든 내용들은 출처는
이 책임
이 시기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사 볼만한 책.
대충 이런 내용들을 다룬 책이니, 이 시기 역사에 관심있는 개붕이들은 참조
자질구레한 내용 뺴고 핵심만 체크해서 적겠음
1259년 5월 14일, 태자[훗날 원종] 속한 사신단은 몽고와의 강화를 위해 강화도를 떠났음.
이때는 당시 칸인 몽케가 죽기 2달전임. [태자를 포함한 사신단을 편의상 원종이라 칭하겠음.]
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원종 일행은 몽케의 남벌군이 있던 사천의 조어산으로 향했음.
근데 몽케가 죽어버림. 원종 일행은 가던 도중 그 소식을 접함.
곧바로 몽고는
쿠빌라이 VS 아릭부카의 칸 쟁탈전에 돌입,
둘다 칭기즈칸 손자.
갑작스러운 소식에 원종은 사태를 관망하고자 육반산에 눌러붙어 눈치게임을 시작함.
<당시 대세는 아릭부카, 칭기즈칸이 제일 총애하는 손자기도 했고.>
근데 당시 열세였던 쿠빌라이가 아릭부카에 밀려 북중국으로 회군하던 루트에 육반산이 포함.
원종 일행과 조우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음.
고려사에는
"이윽고 왕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관문을 거쳐 양초지교에 이르니, 황제가 마침 양양에서 회군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적혀있음.
또한 양인의 회견장면을 묘사한 기사에는 태자가 예복을 갖추어 입고 “폐백을 바쳤다” 는 내용만 있을 뿐,
태자가 고려를 떠날 때 지고 온 펴문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도 작정하고 만난 것이 아닐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
즉, 당시 고려의 오피셜 선택은 쿠빌라이가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는 한 단면.
정확히는 쿠빌라이와 아릭부카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다는 것
제일 결정적인 것은
이후, 그 해 5월 5일에 열린 쿠릴타이에 원종은 참여 안 했음.
쿠릴타이는 몽고를 포함한 유목민족의 대소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회의임.
내전을 치루고 있는 쿠빌라이랑 아릭부카 입장에서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만약,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쿠빌라이를 원종이 처음부터 찜했다면, 쿠릴타이에서 쿠빌라이를 당연히 지지했을 꺼임.
근데 지지 안했음.
즉, 쿠릴타이가 열릴 때까지도 고려의 픽은 쿠빌라이가 아니었음.
쿠발라이 입장에서 볼떄, 원종이 이런 행동은 눈엣가시였음.
안 그래도 불리한 상황에서 아릭부카와 결전을 치뤄야 하는데, 고려의 태자가 자기를 지지 안한다?
저러다 고려가 아릭부카한테 붙으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음.
그래서 쿠빌라이는 원종을 간접적으로 압박함.
고종<원종의 아빠>의 죽음으로 귀국하려는 원종을 호송한다는 명분하에, 다루가치+몽고 군단을 대동시켜 고려로 보냈음.
내전으로 병력 상황이 빠듯한 상황에서도 만 단위가 넘는 병력을 원종 호송한답시고 고려로 보냈다는 것.
즉, 너네 선택 잘 해라. 안 그러면 피 볼꺼라는 쿠빌라이의 고려를 향한 협박이었음.
압박을 받으며 고려로 돌아온 원종.
대신 쿠빌라이에게 복속에 대가로 6가지 조건을 제시.<이건 원종이 잘 했음>
아릭부카와 결전을 앞둔 매우 긴박한 사태라 쿠빌라이는 이를 수락함.
고려 조정 입장에서도 최상의 타협책을 제시한 셈.
대타협이 맺어진 후,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 밖에 있는 나라로서, 당태종이 친정을 했어도 복속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세자가 내게 내귀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함.
이런 립서비스가 필요한 만큼 쿠빌라이의 당시 상황은 절박했음.
즉 정치 선전 의도가 강함.
이후 고려는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쿠빌라이를 선택했다면서 역사를 각색함.
최대한 짧게 쓰긴 했는데.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음.
오타는 보이는대로 바로바로 수정할께.
출처는 본문 앞 부분에 보여준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