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씹어보는 원균포.......

신들어라 작성일 21.10.30 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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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동래부 및 인근, 현재의 부산광역시 전역에서 있었다고 알려지는 전투들임

음력 4월 13일 절영도(현재 영도)에 상륙한 왜군은 당일에 부산진 전투
음력 4월 14~15일 대다포진-서평포진 전투

음력 4월 15일 동래성 전투, 소산역 전투
들을 3일간 거치고 현재의 부산광역시 전역을 제압했음

부산진첨사 정발과 약 600의 병력, 다대진첨사 윤흥신과 약 800, 동래부사 송상현과 약 3,000,
밀양부사 박진이 약 500의 병력을 이끌고 지도의 부곡이라고 표시된곳 부근의 소산역이라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왜군을 막았음
이 좁은 구역에 약 5,000에 가까운, 조선의 입장에선 최후방인 이곳에 두기엔 엄청난 수의 대병력이 목숨을 걸었던 거임

1차 상륙한 왜군 2만과 비교하면 겨우 5천이었지만 한양함락때까지 조선군이 동원한 병력들과 비교하면 놀랍게도 이 정도면 대병력임

그것도 당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여타 조선군들과는 달리 나름 잘 훈련받고 장비도 빠방한 정예병들이었지

당시 동원된 백성들까지 합하면 더 많은 수의 사람이 목숨을 걸었고.

이들이 목숨을 건 이유는 제승방략의 작동을 통해 적을 막는 것, 그리고 다른 아군의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고
나름의 목적을 달성함

한양함락때까지 겨우 20일밖에 안걸렸는데, 왜군은 이 좁은 구역에서 무려 3일을 허비함

그야말로 처절한 저항과 희생의 눈물겨운 결과였음

그리고 이 희생을 토대로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지요..

 

무려 70~100여척의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던 경상우수영의 최고 사령관이

그대로 기동해서 왜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적의 보급선과 추가상륙을 막는 대신에

전멸하는 와중에도 구원요청을 보낸 경상좌수영의 구원을 포기하고,

휘하 제장들의 결렬한 항의도 무릅쓰고 함대를 모조리 스스로 불태우고 배 한척만 들고 튀지만 않았어도 말이지


참고로 저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보유한 판옥선의 수는 20~30척 정도였을거라고 추정된다고 함

그러니까 이순신의 2.5배~5배쯤 되는 전력을 저렇게 날려 버린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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