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 27명의 목록을 분석한 결과 9명(중복 포함)이 장애인이거나 미성년자였다. 경찰은 1990년 말 9차 사건 용의자로 언어 장애인 박모씨(49)를 연행했다. 박씨는 당시 피해자 김모양의 인근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경찰은 박씨의 얼굴에 손톱으로 할퀸 자국이 있고 무릎이 까져 있으며 가슴에도 찔린 상처가 있다는 이유로 혐의를 추궁했다. 김모군(18)도 9차 사건 용의자로 강압수사를 당했다. 김군은 1990년 12월7일 회사원인 형과 함께 경찰에 붙잡혀 화성의 한 호텔로 끌려갔다. 형은 다음날 풀려났지만 김군은 한 여인숙으로 옮겨져 머리를 벽에 찍히는 등 폭행을 당했다. 양팔은 뒷짐을 지고 머리와 발로만 바닥을 지탱하게 하는 가혹행위인 ‘원산폭격’을 당하고 몽둥이로 머리와 다리 등을 맞았다. 경찰은 김군의 어머니가 항의하자 김군을 풀어줬다.
연관없는 사건에 연루됐거나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도 7명(중복 포함) 있었다. 박모군(19)은 이춘재가 저지른 청주 여공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에 의해 지목됐다. 당시 절도 혐의로 조사를 받던 그는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그를 잠도 재우지 않으며 폭행했다. 거꾸로 매달아 얼굴에 수건을 씌운 채 짬뽕 국물을 붓기도 했다. 박군은 ‘강간치사로 들어가서 몇 년 살다 나오면 된다’는 경찰의 회유에 범행을 거짓 자백했다. 이후 법원은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박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범인이라는 소문이 돌았거나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등 이유로 조사받은 사람도 8명에 달했다. 6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황모씨(20)는 동료에게 ‘내가 화성사건의 진범’이라고 말한 점이 체포의 이유였다. 경찰은 황씨를 유력 용의자로 단정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또다른 김모씨는 6·7차 사건 당시 무직자인데 사건 현장 주위를 배회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 왼쪽 무릎에 피를 흘리며 현장 주변을 배회했다는 이유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한 재미교포가 꿈에서 계시를 받아 지목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사례도 있다.
강압수사는 일부 시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16세 명모군은 1988년 수원 화서역 여고생 강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의 고문을 받았다. 화서역 사건은 1987년 12월24일 여고생 김모양(18)이 실종됐다가 이듬해 1월 화서역 인근 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성당에서 6200원을 훔친 혐의로 수원경찰서에 연행됐던 명군은 여고생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경찰의 ‘비행기 태우기’(몸을 포승줄로 묶고 공중에 매달아 돌리는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후 자백했다. 명군은 이후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숨졌고, 고문 연루 경찰들은 독직 및 폭행치사 혐의로 징역 1~6년의 실형을 살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30대 차모씨는 1990년 9차 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주민 진술에 따르면 차씨는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나온 뒤 “나는 억울하다” “누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내용의 고함을 치는 등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경찰 조사 이후인 그해 12월18일 화성 병점역 인근 열차 건널목에서 운행 중이던 열차에 몸을 던졌다. 10차 사건의 용의자 장기영씨(33)는 절도전과를 가진 데다 추행혐의로 입건된 적이 있어 경찰의 의심을 받았다. 조사를 받던 중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달아난 장씨는 한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경찰이 사건 연관성이 의심될 때 조사를 진행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용의자로 의심되는 시민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거나 고문·폭행했으며 자백을 강요했다. 27건 중 최소 17건(중복 포함)에서 자백 강요 정황이 나타났으며, 폭행·수면방해 등 강압수사가 16건에서 이뤄졌다. 임의동행, 불법구금 정황은 11건에서 엿보였다.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 조사 개시 이후 피해자 접수가 대거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 이 사건 당시 2만여명 시민이 수사기관의 용의선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 중 약 3000여명은 영장도 없이 임의동행 등 방식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노태우 정부 시기 진행된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도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강압수사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피해 접수가 늘어나면 당시 검경의 강압수사 등 원인과 진상을 지금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출범 이후 현재까지 이 사건 피해자 등의 진상규명 요청을 접수해왔다. 이춘재 사건은 앞서 지난 1월 박준영 변호사, 김칠준 변호사 등이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요청했다. 당시 접수된 피해자는 윤성여씨와 9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허위자백을 했다가 풀려난 윤동일군, 이 사건의 피해자였지만 당시 수사 경찰이 시신을 은폐해 30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김현정양 등 3명이었다.
[가족, 법원 앞에 서다]‘살인의 추억’ 모티브 된 윤동일씨의 형 윤동기씨
1990년 1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악기 공장에서 성실히 일하던 동생이 갑자기 사라졌다. 일주일 뒤 동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 벌어진 화성 여중생 살인사건(이춘재 9차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체포됐다는 뉴스에서였다. 영상 속 윤모(당시 20세)군은 모자이크 된 채였지만 영락없는 동생이었다. “그때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일주일 동안 사라졌던 동생이 TV에 살인범으로 나오고 있었었으니까. 부모님이나 저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죠.” 지난 2일 경기 화성의 한 카페에서 서울신문과 만난 윤씨의 형 윤동기(57)씨에겐 30년 전 그날의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동생은 전날보다 부은 얼굴에 반질반질한 연고를 잔뜩 바른 모습으로 면회실에 나타났다. ‘혐의를 부인한다며 경찰들이 또 매질을 한 거구나’라고 윤씨는 생각했다. 동생은 수사기관이 일본에 의뢰한 유전자 검사 결과가 도착해서야 겨우 살인 혐의를 벗었다. 그러나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기까지 3개월 동안 독방에 구금됐다.
집으로 돌아온 동생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지만 평범한 삶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범인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탓일까. 동생의 몸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됐다. 첫 수술에서만 4개의 갈비뼈를 제거했다. 가장 역할을 하던 윤씨는 동생과 부모님이 충격을 받을까 봐 암이란 단어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얼마 뒤 동생의 병이 재발하면서 그마저도 소용없게 됐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아버지는 생전 땅을 사기 위해 모아 뒀던 돈을 5000원짜리 뭉치로 보자기에 고이 싸뒀었는데, 그 돈마저 동생의 변호사 선임비나 병원비에 전부 들어갔다. 강력한 진통제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된 동생을 집으로 데려온 것도 입원비를 댈 형편이 못 돼서였다. “몸에 주먹보다 커다란 욕창까지 생겨 매분 매초가 고통스러웠을 텐데 어떻게 집에서 버티겠습니까. 견디기 어려웠던 동생이 어머니한테 ‘뭐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해 어머니가 자릴 비웠을 때 직접 119에 연락해서 병원에 갔을 정도니까요.”
7살 터울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1997년 결국 스물일곱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발 이후 5년간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동생은 용의자로 몰려 경찰에서 당한 일들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진범의 혈액형으로 알려졌던 B형(실제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기만 해도 잡혀 가던 시절이어서였는지, 가족들 모두 이미 고통 속에 살고 있어서였는지 윤씨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직 진범이 잡히지 않은 때였고, 사람들의 관심도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1980년대 중반 동네에서 칼에 13차례나 찔린 채로 발견됐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어머니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범인은 끝내 찾지 못했다. 윤씨는 해당 범행이 이춘재의 소위 1차 연쇄 강간 사건(1986)보다 앞서 벌어진 것이긴 하나 이춘재의 범행 수법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봤다. “당시 어머니가 40대였는데 이춘재는 나이를 가리지 않았잖아요. 범행 도중에 입에 흙을 집어넣고 ‘서방은 뭘 하냐, 아들은 뭘 하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어머니를 공격한 범인이 만일 이춘재라면, 그때 이춘재가 잡혔다면 가족들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윤씨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