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제대로 밝혀라" - 허성도 교수

비타민D 작성일 22.05.27 13: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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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2010년 6월 17일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한자) 쓰는 사람만 다냐, 글(한자)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 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擊)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거대하고)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거대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거대한)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 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그)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갑지(甲地)와 을지(乙地)는 동일한 자오진선(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자오선(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자오진선(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갑지(甲地)와 을지(乙地)는 동일한 자오선상(子午線上)에 있다.

갑지(甲地)는 북극출지(北極出地), 북극출지(北極出地)는 위도(緯度)라는 뜻입니다. 

갑지(甲地)는 위도(緯度) 37도에 있고 을지(乙地)는 위도(緯度) 36도 30분에 있다. 

갑지(甲地)에서 을지(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 : 북소리)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 종소리)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리수(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라)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명(明)자, 계산할 산(算)자, 과(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서울대학교 |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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